윤지관 │ 덕성여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한국대학학회회장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교양 이념의 현재적 의미: 매슈 아놀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버클리 대학교 초빙교수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방문펠로를 지냈으며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역임했다. 1985년부터 덕성여자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재 한국대학학회 회장으로 대학문제를 연구하고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저서로는 『민족현실과 문학비평』 『리얼리즘의 옹호』 『놋쇠하늘 아래서』 『근대사회의 교양과 비평』 『세계문학을 향하여』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 『사학 문제의 해법을 모색한다』 등이 있다. 역서로는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공역) 등을 비롯해 프레드릭 제임슨의 『언어의 감옥』 빌 레딩스의 『폐허의 대학』 등 다수의 이론서가 있다.
‘대학은 사라질 것인가?’ 이 도발적인 질문에 답하기는 쉽고도 어렵다. 지금 형태의 근대대학의 원형은 유럽의 중세대학들이다. 11세기의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 12세기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대표되는 중세대학은 학생과 교수의 조합으로 시작되었다. 중세도시를 배경으로 생겨난 이 대학들은 중세적인 보편주의에 기반을 둔 자율적인 학문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전역에 걸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대학들은 중세가 무너지고 근대가 시작되자 쇠퇴한다. 중세대학은 사라지고 근대대학이 발흥하게 된 것이다.
근대대학은 이성의 원칙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18세기 말 칸트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독일에서 창립된 베를린대학이 근대대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대학은 국가사회에 필요한 고급기술을 가르치는 ‘상위학부’와 자유로운 이성의 원칙에 따르는 ‘하위학부’로 구성된다. 전자는 법학 신학 의학이 중심이고 후자는 철학이 중심이다. 대학의 존재는 이 두 학부의 결합이며 이 가운데 그 본령을 이루는 것은 철학, 즉 지금의 개념으로는 인문학이다. 베를린대학은 교양교육과 전문교육을 양축으로 하는 오늘날의 대학의 원조다.
베를린대학 창립의 또 다른 역사적 의미는 대학이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기구로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국민국가에 필요한 민족문화를 진흥하고 교양을 갖춘 민주적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대학의 사명이 된다. 근대대학은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유럽의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고, 각 도시의 중세대학들은 사라지거나 19세기를 거치면서 베를린대학의 모델에 따라 근대대학으로 재탄생한다. 이후 이 모델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각지로 퍼져나가고 한국의 대학도 그 전통 속에 있다.
그렇다면 2백 년의 전통을 가진 이 근대대학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대학은 사라질 것인가? 어떤 기구도 영원하지는 않다는 차원에서는 ‘그렇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세대학이 근대의 도래와 함께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대학도 근대의 종언과 더불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국민국가가 해체되지 않는 한 대학도 그와 함께 지속될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지금의 세계질서는 비록 지구화로 국민국가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담론이 무성하지만 여전히 국민국가들 사이의 관계로 형성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는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들어와서 대학이 몰락했다거나 죽었다는 말이 흔히 들린다. 이런 말들은 대학이 외형적으로 팽창하고 발전해온 현실과는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들이 근대대학의 본령에 충실한가라고 묻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교양교육의 기반을 이루는 인문학이 위기를 맞고, 대학은 자본의 노예가 되어 국민문화를 보존하고 교양을 전파하는 기구로서의 소명을 방기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반면에 근대의 종언과 탈근대의 도래를 말하는 입장에서 근대대학의 기능 또한 종식되고 재탄생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앞으로 대학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현재 대학의 위기의 근원을 살펴보고 미래 대학의 모습을 그려보는 일은 필요하다. 서보명 교수의 『대학의 몰락』, 요시미 순야의 『대학이란 무엇인가』, 빌 레딩스의 『폐허의 대학』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책이다. 현재의 대학들이 부딪친 문제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책으로는 미국 대학의 경우 『최후의 교수들』, 한국 대학의 경우 『미친 등록금의 나라』를 추천한다.
한국을 비롯하여 오늘날의 대학이 처해 있는 위기의 성격을 간명하게 서술한 책으로 미국 시카고신학교 서보명 교수의 『대학의 몰락』이 있다. ‘자본에 함몰된 대학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에서도 드러나듯 서 교수는 오늘날의 대학이 철저하게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흡수되어 있다고 본다. 주로 미국의 대학들을 예로 하여 이같은 관점을 피력하고 있지만 한국의 대학들도 미국에 대한 의존이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마찬가지의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쟁을 앞세우고 경제적 효율성에 따라 대학을 평가하는 신자유주의의 흐름은 한국 대학에서도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 속에서 대학은 지식인이 아니라 기능인을 길러내는 체제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이 책의 논지는, 인문학이나 교양교육이 쇠퇴하고 대학이 취업기관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한국 대학에도 해당된다.
요시미 순야의 『대학이란 무엇인가』는 근대대학의 형성 및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좋은 개설서라고 할 수 있다. 도쿄대 교수인 저자는 중세대학의 탄생에서부터 근대 이후 대학의 재탄생에 이르기까지 대학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대학이 무엇인지 더 깊이 알고 싶은 일반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단순한 개설만은 아니다. 우선 일본 학자답게 순야는 일본의 대학을 예로 하여 어떻게 서구 대학의 모델이 비서구권에 이식되었는지를 탐구한다. 그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대학의 유형은 베를린대학의 고전적인 형태가 아니라 미국식 대학이라고 보고, 일본의 대학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한다. 순야의 또 다른 문제의식은 대학이라는 기관을 ‘미디어’로 보자는 것이다. 즉 대학은 사람과 지식을 연결 짓는 매개체이며, 출판중심의 근대와는 달리 인터넷세계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 대학의 매개체적 기능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순야의 이같은 시각은 대학의 ‘몰락’이나 ‘죽음’ 담론을 넘어서 대학의 미래를 사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앞의 두 책이 어느 정도 개설적인 내용이라면 빌 레딩스의 『폐허의 대학』은 오늘날의 대학에 대한 이론적인 논의를 담은 학술서라고 할 수 있다. 몬트리올 대의 젊은 교수였던 빌 레딩스는 1994년 이 책을 준비하던 중 비행기사고로 목숨을 잃었지만, 사후 출간된 이 책은 앞의 두 저자 특히 순야가 이 책을 중시하는 데서도 보이듯 대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필독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레딩스가 이 책에서 역설하는 바는 오늘날의 대학들은 근대대학의 이념이 무너지고 그 폐허만이 남아 있는 곳이며, 이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북미의 대학을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이 책은 대학이 국민국가의 민족문화를 가르치고 확산시키는 근대적 기능을 상실하고 ‘수월성’을 이념으로 하는 관료주의적 기업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근대대학의 사망선고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주장은 당시 부각되던 탈근대주의, 즉 ‘국민국가의 종언’ 담론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논란의 여지도 있지만, 이 책의 미덕은 근대대학의 발전과정과 성격을 문화론적 시각에서 치밀하게 분석한다는 데 있다. 문화이론에 관심이 있는 독자나 연구자들에게 좋은 공부가 될 만한 책이다.
레딩스가 이론적으로 분석한 수월성의 대학이 실제로 어떻게 확산되고 작동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독자라면 프랭크 도너휴의 『최후의 교수들』을 보면 된다. 오하이오 주립대 영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오늘날 미국 대학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교수’가 사라지고 있는 현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최후의 교수’란 일차적으로는 미국 특유의 종신제 교수가 줄어들고 계약직 교수가 증가하는 추세를 일컫고 있지만 이 책의 서술범위는 좀 더 광범하다. 미국의 대학들이 20세기 후반부터 어떻게 급격하게 영리를 앞세운 기업형으로 변신하고, 이 과정에서 대학의 본령과 맺어져 있는 인문학이 쇠퇴하고 있는지를 역사적 관찰과 풍부한 사례분석을 통해서 전하고 있다.
이상의 책들이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의 대학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 책이라면, 한국 대학의 현실을 간명하고도 깊이 있게 다룬 책은 의외로 드물다. 그만큼 한국에서 대학에 대한 담론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2011년 나온 『미친 등록금의 나라』가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대학 등록금 문제를 다루고 있다. 등록금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대학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른바 ‘반값 등록금’이 추진되어야 할뿐더러 당장이라도 실현가능하다는 논거를 제시한다. ‘반값 등록금’은 지난 대통령 선거의 쟁점 중의 하나였으나 현 정부가 등록금 인하 대신 국가장학금을 도입함으로써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고, 고액등록금 문제는 지금도 해결과제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등록금 문제를 논의하면서 한국 대학의 현실을 전체적으로 조감하게 한다는 데 있다. 고등교육에 대한 공적 지원의 빈곤이라든가 전체 대학의 80%를 차지하는 사립대의 열악한 교육 현실과 전근대적 경영 등을 적절한 자료를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 출간된 지 5년이 지났음에도 한국 대학이 당면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 토대가 될 만한 책이다.
대학은 사라질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쉽고도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대학이 죽어 있고 궁극적으로는 사라질지라도,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현시대에 올바로 대처하는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대학은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