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발행인프랑스 파리3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석사학위를, 파리8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파리 외교전략연구원과 런던 정경대LSE 초빙연구원을 지냈고, 지금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판 편집인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20세기 사상 지도』(공저) 『책으로 읽는 21세기』(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거의 석유 없는 삶』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화들』『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등이 있다.
영국인들이 2016년 6월 23일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한 이른바 ‘브렉시트’Brexit는 전문가들 사이에 흔히 반反이민정서 내지 제노포비아가 주요 원인으로 언급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다. 장기불황에 따른 대량실업, 빈곤 노동계층의 급증, 그리고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영국인들의 삶을 짓누르는 현실에서 브렉시트가 표출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유럽 경제위기의 진원지로 지적된 그리스와 스페인 지도자들이 최대 채권국인 독일과 유럽중앙은행ECB에 채무 탕감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자국의 EU 탈퇴 의지를 대외적으로 밝혔지만, 정작 EU 탈퇴는 EU의 주축국이라 할 영국에서 먼저 이뤄졌다.
왜 영국에서일까? 영국은 지난 30여 년 동안 그 어느 국가들보다 신자유주의 체제로 질주했다. 1980년대 초, 마가렛 대처의 보수당 정부는 규제완화, 구조조정 및 노동유연성 강화, 금융 산업 중시의 산업재편 등을 통해 산업 및 사회 붕괴를 초래했고, 그 뒤를 이은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도 앤서니 기든스가 대처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되살린 ‘제3의 길’을 채택해 친기업적인 정책의 강화와 복지정책의 축소를 지향했다. 후에 대처는 자신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토니 블레어와 신노동당”이라고 답했다.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 국가인 영국이 사회자유주의로 이동한 것은 영국 출신의 지성인 타리크 알리가 명명한 ‘극단적 중도파’의 성장을 가져왔다. 극단적 중도파는 상위 1%를 위한 친기업가 성향의 좌파와 우파 간의 결합으로 탄생한 그룹으로, 부유층을 위한 엘리트 정치를 표방한다. 당시 노동당은 부유하고 세계화된 도심에 편중된 부가 어떤 식으로든 빈곤한 지역으로 유입될 것이라는 ‘낙수 효과’에 환상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로 나타나자,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고든 브라운은 공공 지출을 통해 근로조건부 급여In-work benefits 및 공공 부문 일자리를 막대하게 늘렸다. 이렇게 경제위기가 찾아왔고, 보수당이 이끄는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 강도 높은 긴축재정이 시작됐다. 근로조건부 급여와 공공 부문 임금이 대거 삭감됐다.
그런 와중에 영국의 극우파들과 보수당 우파들은 끊임없이 자국의 문제를 외부 탓으로 돌렸다. 특히 이주민들의 유입에 초점을 맞추면서 EU 탈퇴 캠페인을 벌였고, 마침내 영국인들은 그 불확실한 미래에 극단적인 표를 던졌다.
그럼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어떠한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도입된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갈수록 급진화하면서, 유럽 내 국가들 사이에 극단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빈부격차 심화, 복지시스템 붕괴 가속화, 그로 인해 이제까지는 시민권 취득이 가능했던 외국인 노동자들의 강제추방 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경제적‧사회적 격변으로 인해 대중들의 정치적 성향은 변화했고, 이제 아무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일대 지각변동이 이어지고 있다. EU 탈퇴 문제는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의 입장을 벗어나 국가 주권을 둘러싼 대립구도로 나타나고 있다. EU 탈퇴를 지지하는 측에 극우파 정당과 극좌파 정당이 함께 있고, ‘유럽통합주의’ 측에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2015년 그녀와 대립한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도 나란히 있다. 다양한 형태의 극단화 현상은 기존의 정치 구도가 재편 중인 현시점을 특징짓는 요소이다. 대립구도의 양상이 바뀌고 있다. 그리고 이는 앞서 우리가 언급한 ‘브렉시트’ 찬성파의 승리를 비롯해 그리스의 시리자 집권, 스페인 포데모스의 높은 지지율 등 유권자들의 선택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그리스에서는 사회민주주의의 위기가 ‘트로이카국제통화기금, 유럽중앙은행, 유럽연합’에 휘둘리는 정부에 대한 반대 시위의 형태로 나타났다. 수개월 간 시위가 이어진 끝에, 2015년 총선에서 시리자가 승리를 거두고 사회당PASOK은 소수당으로 밀려나는 이변이 연출됐다. 그러나 EU 기관들과의 협상에서 시리자당은 우파당과의 어떠한 차별점도 내세우지 못했다. 개혁전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시리자는 기존 사회자유주의 정당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됐다. 반대로 오스트리아에서는, 시민들의 반대시위가 극우정당인 FPÖFreiheitliche Partei Österreichs: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정치세력 확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점증하는 유권자들의 불만 속에서 유럽의 어떠한 국가도 신뢰할 만한 정치적 솔루션을 제안하지 못함으로써 공포, 외국인혐오증, 국수주의, 이기주의, 희생양 찾기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극단화가 만연하지만, 유럽 각국의 정치권이나 시민운동 조직에서 이렇다 할 대안을 마련치 못하고 있다. 더 민주적이고, 더 인류애적인 시민정신이 구현되고, 사회 운동의 초심이 발현되어야만 변화의 길이 열리는 법이다. 브렉시트 및 유럽의 극단화는 단순히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극우성향을 띤 아베의 일본과 푸틴의 러시아, 그리고 최근에 극단적 미국 중심주의로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의 미국도 이미 지구촌 공동체로부터 엑시트Exit를 도모하는 상황에서 지구적인 시민정신과 사회운동이 더할 수 없이 필요조건으로 다가온다.
“구세계는 죽었고, 신세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 과도기적 상태에서 괴물들이 나타난다.” 이탈리아 사르데냐 출신의 지성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 경구가 우리의 뇌리와 가슴에 울림으로 다가온다.
유럽은 어디로 가고 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는 사회변동의 격변기에 처한 우리 사회의 향방을 스스로 묻는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해답은 아무래도 책에서 찾는 게 나을 성 싶다. 유럽의 정치사상을 전공한 필자의 관점에 비추어, 오늘의 유럽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몇 권 꼽고 싶다.
영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로 유럽연합 지지자인 앤서니 기든스가 진단하는 통합유럽의 미래.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는 분쟁과 회원국의 자국 이기주의, 유로화 체제의 불안정, 유럽연합에 대한 회의론까지. 유럽은 더는 강력한 대륙으로 보이지 않는다. 유럽의 미래는 유럽 연합의 성패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란스럽고 강력한 대륙 유럽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앤서니 기든스는 유럽연합의 공동체적 운명을 강조한다.
유럽학자 클라우스 오페의 따뜻하지만 냉철한 분석서. 유럽연합의 현상을 ‘이중의 덫’으로 파악한 저자는 하이에크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시장’론에서 시작하여 시장 자체가 저절로 형성되어 그냥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정책의 지원과 도움과 승인과 보호를 받아 유지되는 것이며, 시장 자체가 끊임없이 경쟁이라는 작동원리를 회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자기파괴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간략하지만 명확하게 밝혔다. 이 두 가지 전제 위에 저자는 유로존과 유럽연합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명쾌하게 분석했다. 지금의 유럽연합이 직면한 문제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