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수 │ 시민운동가
변호사 자격은 있으나 휴업한 지 10년 정도 된다. 제주대학교에서 8학기 동안 교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참여연대,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등에서 조세 개혁, 예산 개혁을 위한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녹색당 창당에 참여해 현재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기본소득을 한국에 도입할 것을 주장하는 책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를 펴냈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에게는 책임윤리가 요구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자신의 행동이 낳은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려운 듯하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치인은 마땅히 헌법정신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이라면 국가공동체의 일에,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이라면 지역공동체의 일에 충실한 것이 본연의 임무이다. 그러나 권력을 사유화하고, 자신과 측근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당연히 그런 정치인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이것은 법적으로 처벌받느냐 마느냐의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다.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형성된 유권자와의 신뢰관계를 부정한 것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과는 별개로 정치적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최소한의 책임의식조차 갖추지 못한 정치인들이 수두룩한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정치인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난 9월 25일 백남기 농민이 운명을 달리했을 때, 서울대병원의 주치의는 백남기 농민의 사인을 ‘외인사’가 아니라 ‘병사’로 적어서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다가 돌아가신 분의 사인을 ‘병사’라고 적었다는 것은 의료계의 상식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처럼,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전문가들의 윤리의식 부재도 심각하다. 의료계만이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적인 것이 핵발전소(원전) 문제이다. 대한민국의 핵발전소는 시험가동 중인 신고리3,4호기를 합치면 26기에 달한다. 전 세계에서 원전밀집도가 가장 높은 상황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원전을 계속 지을 계획이다. 그러나 올해 9월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에서 드러났듯이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 원전이 밀집해 있는 한반도 동남쪽에는 60개에 달하는 활성단층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금까지 원전을 마구 지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원전을 지어서 돈을 버는 기업들의 이해관계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원전마피아’의 일부로 불리는 소위 ‘전문가’들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원전은 안전하다’는 신화를 옹호하는 일에 참여해 왔다.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전문가의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원전과 관련해서 흘러다니는 많은 용역비 등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郎같은 시민과학자가 아쉽다. 『시민과학자로 살다』라는 책도 썼던 다카기 진자부로는 1961년 도쿄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원자력 관련된 일을 하며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다카기 진자부로는 핵발전의 위험성을 알리며 시민의 입장에서 활동을 했다. 이런 시민과학자가 있다면, 지금처럼 핵발전소가 무분별하게 늘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과학만이 문제가 아니다. 교육에서도 윤리의 부재 현상이 심각하다. 특히 폴리페서polifessor로 불리는 대학교수들의 문제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드러났다. 예를 들면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안종범 씨는 성균관대 교수로 있다가 정계에 입문했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한 일은 국가의 경제정책을 다룬 것이 아니라, 대기업들로부터 뇌물을 걷어들이는 것이었다.
'대학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졌던 사람이 왜 이런 일까지 했을까'라는 의문이 일어난다. 아마도 ‘윤리’라는 단어 자체가 그의 머릿속에는 없지 않았을까?
반면에 안락한 교수생활을 버리고 농부가 된 사람도 있다. 미국의 리 호이나키Lee Hoinacki는 뒤늦게 공부를 해 박사학위를 받고, 일리노이주에 있는 생거먼 주립대학Sangamon State University이라는 실험적인 대학의 교수가 된다. 그는 정년보장 교수가 된 직후에 대학을 그만두고 시골로 가 농부가 되었다.
리 호이나키가 쓴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서, 리 호이나키는 자신이 대학을 그만두게 된 이유를 밝힌다. 그는 "부정不正한 사회의 가운데서 엘리트 그룹의 일원으로 어떻게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나날의 고투 속에서 기진맥진해 있는 동안에 어떻게 내가 특권적인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인가?" 등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다가, 대학을 그만뒀다. 그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양심적 목소리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지식인으로서 이런 정도의 고뇌를 하지는 못할망정, 권력과 자본에 빌붙어서 이익을 취하려는 이들이 넘쳐나는 대한민국의 대학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한국에서 책임윤리가 부재한 또 다른 집단을 꼽으라면 법률가가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사법시험을 합격한 엘리트 검사 출신들이 연루되었다. 이들은 정의의 편에서 법지식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지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쏟았다. 그리고 ‘법’의 이름으로 불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이야말로 ‘악마의 변호사’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법률가라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도 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 돈을 인도 민중들을 위한 일에 썼다. 『간디자서전』을 보면, 그가 법률가와 운동가로서의 이중적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잘 나온다. 그리고 그는 정의롭지 못한 ‘악법’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 운동을 펼쳤다. 나쁜 법을 그냥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의 준수를 정중하게 거부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했다.
정치인, 전문가, 지식인, 법률가. 사실 이 모든 사람들의 책임윤리는 많이 비판받아 왔다. 그러나 그 몸통에 해당하는 존재에 대해서도 윤리를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재벌에 대한 얘기다.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에 대해 윤리를 요구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도 가능하다. 그러나 특별한 윤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요구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온정적인 자본가일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불법을 저지르며 정당하지 않은 몫까지 탈취해가지는 말라는 것은 요구해야 한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한국의 재벌총수 일가들은 이런 최소한의 윤리의식조차 상실한 듯하다. 불법·변칙 증여로 그룹 지배권을 세습한 삼성재벌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삼성재벌은 소극적 협조자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비선 실세를 활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재벌 3세인 이재용 씨의 그룹 지배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국민연금까지 이용했다. 국민들의 노후보장을 위해 운영되어야 할 국민연금이 재벌총수 개인의 사익을 위해 동원된 것이다. 그 결과 국민연금은 5천억 원의 손해를 보았고, 이재용 씨는 그 정도 규모의 이익을 보았다.
과거 삼성그룹에서 근무했다가 2007년 삼성재벌의 각종 비리를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현실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라는 것은 법의 정신이 아니다”라고 썼다. 아무리 재벌총수의 재산이 많다고 해도, 결국 재벌회장도 1명의 시민이고 유권자인 것이 민주공화국이다. 그리고 그도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살려면 최소한 법은 지켜야 하지 않겠나? 그렇지 않고 돈으로 법도 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 희망은 없는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한국사회에서도 책임윤리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지금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시민들도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다. 분노할 일에 분노할 줄 알며, 아무리 각자생존의 사회라고 해도 함께 살 길을 모색하려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무너진 책임윤리를 바로세울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