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복 │ 아동문학평론가저서 『판타지 동화 세계』『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 그림책 『엄마, 잘 갔다와』 『숲까말은 기죽지 않는다』등이 있다. 작가들과 아동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후원으로 직접 책을 만들고 독자들과 직접 만나 토론도 하고 놀이도 하는 출판놀이 운동을 하고 있다.
얼마 전 월간 『어린이와 문학』 잡지에서 최근에 나온 주목할 만한 작품을 선정한 뒤에, 이 작품을 놓고 대담하는 자리가 있었다. 이 대담에 참여하면서 한 가지 스스로 질문해 본 문제가 있다. 동화는 시대가 요구하는 질문에 어떻게 응답을 해 왔는가? 또, 어떻게 응답을 해야 하는가? 이런 물음은 특히 지금과 같은 시국에서는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비껴갈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질문에 응답해 보기 위해 이론서 『동화의 정체』를 다시 한번 속독해 보았다. 이 책의 요지는 이렇다. 동화가 문명화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아이들을 지배계급의 요구에 순응시키는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독자 대상으로 하는 동화가 제도권 밖을 사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양에서 아동문학의 길을 연 페로, 그림형제, 안데르센은 주로 지배계급의 요구를 반영하는 쪽으로 민담을 재구성하였다. 이에 비해서 조지 맥도널드, 오스카 와일드, 프랭크 봄의 동화는 지배계급이 요구하는 담론을 전복시키는 방향으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옛이야기를 재창작하였다고 말한다. 동화가 걸어온 길에도 양쪽의 방향이 존재하는데, 그럼 지금 우리 동화의 현실은 어떤가? 20여 편의 추천작 가운데, 『어린이와 문학』에서 토론 대상으로 삼은 작품 가운데, 몇 편만 뽑아 소개를 해 본다.
먼저 『싸움의 달인』을 보자. 제목부터가 재미있다. 지금 이 시대 진정한 싸움의 달인에 어울리는 캐릭터는 어떤 모습일까. 아이들은 대개 학교와 집을 오간다. 아이들 삶의 터전인 학교와 집은 문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배계급의 논리를 주입시키는, 즐거운 놀이터와는 거리가 먼 장소로 변해가고 있다. 자본이 전제군주 노릇을 하는 시대에, 학교와 집은 자본의 논리가 그대로 작동하는 축소판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작가는 용산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무거운 주제를 아동 문학으로 가져와 탐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계층의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대립하는 구도로 되어 있다. 동화라는 형식에서는 이런 둘로 나누어지는 대극의 존재가 한자리에서 부딪힐 때, 매우 유머러스한 풍경을 많이 만들어낸다. 주인공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삼촌한테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장면이나, 학교에서 그 기술을 배워 상대를 제압해 가는 장면도 그렇고, 초반에는 이런 이분법의 설정이 그야말로 도식이 아닌, 유머를 발생시키는 설정으로 승화되어, 문장이 흥겨운 리듬을 타며 잘 읽힌다.
후반으로 가면 동화 속 시공간이 철거 현장으로 옮겨간다.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적인 문제로 비약해 갈 때, 진정으로 싸움에서 이기는 달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아동문학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한국에서는 아동문학이 2000년대 들어서면서 대중문예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베스트셀러가 양산되고, 구매력을 가진 학교, 도서관, 부모들이 왕성하게 아이들에게 책을 구입해 읽히기 시작하였다. 재미를 추구하는 아이들 독자 대중에게, 이 시대가 끊임없이 낳고 있는 삶의 어두운 현실을 어떻게 형상화시켜야, 즐겁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을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계몽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다. 아동문학이 갖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재미를 추구하는 다수의 아이들 독자에게 갈수록 세상은 어두운 존재의 내면을 드러내면서 아이들 삶의 미래를 억압해 들어오는데, 이 삶의 갈등문제를 어떻게 형상화시키고 읽히게 할 것인가?
진정한 달인은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승패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먼저 울기 때문에 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즐기지 못할 때 지는 것일지 모른다. 첨예한 현실 갈등의 문제를 풀어내는 다양한 캐릭터의 성격, 언어의 리듬, 대립의 형식에서 나오는 유머러스한 장면 연출을 비롯해서, 아이들에게 읽히는 작품에는 아주 많은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싸움의 달인』이 뒷부분으로 가면서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질문에 진지하게 응답의 의무를 지키고 있는 김남중 작가의 작품은 지금 현실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작품의 하나로 추천하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네모 돼지』도 흥미롭다. 단편 모음집이다.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은 문체가 다양하다. 한 작가가 여러 문장의 맛을 구사한다는 느낌이 든다. 신화, 민담, 소설의 문체를 넘나든다. 「나는 개」란 단편을 한번 보자. 아주 비극적인 내용이다. 개의 눈으로, 개가 일인칭 시점에서 자기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날 자기 집을 찾아온 이웃집 아이가 반가워서 다가간 것인데, 그 아이는 자기를 문 것으로 오해를 하였다. 아이의 부모들이 개에게 물렸다고, 항의하러 찾아오고, 어디 그 개가 어떤 놈인지 구경이나 한번 하자고 애의 아빠가 달려들더니, 개를 집어 들자마자 그냥 창밖으로 집어 던지고 말았다. 아파트 8층 밖으로. 작품 말미에서 창밖으로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을 날고 있는 개는 일인칭 시점에서 자신의 내면을 전해준다. 절규에 가까운 이 내면의 언어가 신화이면서, 동화이면서, 소설인 듯한 문장의 맛을 느끼게 하는 묘한 울림을 준다. 「고양이 국화」란 단편에서는 이 작가가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독특해 보인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자비한 자비의 관점에서, 인간과 동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동정을 걷어내고 현실의 냉엄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려내고 있다.
서양에서 시작된 근대 동화 운동의 뿌리는 페로나 그림형제가 문장의 옷을 입힌 옛이야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한국의 동화는 서양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물론 지금은 이러한 도식적인 흐름을 넘어서 한국의 동화만이 갖고 있는 사유를 반영하는 작품들이 한국만의 아동문학사를 이루어낼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역시 어느 때든지 시대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시점에서는 늘 시작할 때의 자리로 돌아가 근원에서부터 새롭게 사유해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서양에서 동화의 뿌리를 제공한 유럽 쪽의 민담이 글의 옷을 입히는 과정에서,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민중의 서술 관점이 어떻게 지배 계급의 이념을 전달하는 관점으로 변형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한 탐구를 깊이 있게 해보는 과정도 필요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림 메르헨』을 읽어보았다. 저 위에 소개한 『동화의 정체』와 함께 이 책을 읽어보면서, 동화 문학이 가져야 할 다양한 형식미와, 아이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일상과 이 일상을 전복하는 매직의 요소를 어떻게 조화롭게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자본이 전제군주 노릇을 하는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진정한 ‘싸움의 달인’의 캐릭터를 어떻게 형상화시킬 것인가?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신화적인 캐릭터를 어떻게 형상화시킬 것인가? 지금 동화의 세계는 기존의 질서를 뒤바꾸는, 새로운 전복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