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서문
나는 10대 중반에 철학소년은 아니었지만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칸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명하게 보이는 것을 근본적으로 의심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제대로 읽지도 않을 때부터 그들은 내게 히어로였다. 하지만 이후 현대철학 책을 읽게 되자, 그들 대부분이 비판대상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게는 그것을 반박할 만한 식견이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옹호하는 담론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표준적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철학 자체를 회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문학으로 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후에도 그들을 계속 의식하고 있었다. 문학비평이라는 형태로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있다고 해도 좋다. 먼저 1980년대에 『탐구Ⅱ』라는 작업으로 데카르트를 구출하려고 했다. 이어서 1990년대에 『탐구Ⅲ』(=『트랜스크리틱』)에서는 칸트를 그렇게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에 관해서는 매우 늦어졌다. 그것은 2011년 4월부터로, 그 기회는 갑자기 찾아왔다.
나는 그 전해에 출판한 『세계사의 구조』에서 자세히 논할 수 없었던 그리스의 정치와 철학에 대해 논하려고 했다. 당초 나는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에 대해 사고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소크라테스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는 불확실한 상태였다. 문예잡지 『신초新潮』에서 5월부터 『철학의 기원』을 연재하기로 정해져 있었지만, 사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명확한 비전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4월이 되자 어떤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매번 다이몬(정령)이 나타나 지시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은 자질의 소유자는 현재도 드물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특이한 것은 다이몬이 명령한 사항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공인(公人)으로 활동하는 것을 금지한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민회에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민회에 가는 것은 아테네 시민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그런데 다이몬이 그것을 방기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민회에서 활약할 때에야 비로소 어엿한 시민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부자의 자제들이 소피스트에게 돈을 주고 배운 것은 민회에서 훌륭히 행동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이몬은 민회에 가지 말고 정의를 위해 싸우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택한 것이 아고라(광장 · 시장)에 가는 것이었다. 민회가 공적인 장場인데 반해 광장(아고라)은 사적인 장이다. 하지만 그곳이 그저 사적인 곳만은 아니다. 민회 이상으로 보편적으로 열린 장소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오늘날 직접민주주의로 불리며 종종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간주된다. 민주주의란 바로 데모스=시민의 지배이다. 그런데 여성, 외국인, 노예는 민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데모스’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대거 광장에 있었다. ‘정의’는 오히려 거기서 발견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광장에 나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것을 나는 불현 듯 깨달았다. 그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상황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11년 3월 11일 도호쿠東北대지진과 후쿠시마원전사고가 있었고, 4월에 항의데모가 시작되었고 나도 데모에 참가했다. 그 시점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소크라테스가 민회가 아닌 광장으로 간 것은 말하자면 데모를 하러 간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광장에서 누구하고든 문답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문답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그것은 스무스하게 일정한 끝(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서 대화란 자기대화, 즉 내성內省이지 타자와의 대화가 아니다. 타자와의 대화가 그처럼 보기 좋게 완결될 리가 없다. 예를 들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쓰고 있는 것처럼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종종 상대방을 화나게 했다. 그 때문에 두들겨 맞고 걷어채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그것을 참았다. 친구가 소송하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당나귀가 나를 걷어찼다고 하면, 내가 당나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 하겠는가.”(『그리스철학자열전』)
나는 일본의 국회 주위를 걸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국회는 아테네로 치면 민회이다. 그곳에는 선거로 뽑힌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데모크라시라고 말한다. 확실히 그러하다. 그런데 그렇다면 국회 바깥의 데모 · 집회는 어떻게 되는가. 주권자로서의 국민은 국회 쪽에 있는가, 데모 · 집회 쪽에 있는가.
민회와 광장.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이들의 가치서열은 아테네에서는 명백했다. 그런데 다이몬은 소크라테스에게 공인公人으로서 활동하는 것을 금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폴리스나 정치로부터 몸을 빼지 말고 사인私人으로서 정의를 위해 활동하라고 말한다. 다이몬의 지령은 바꿔 말해 폴리스를 공인과 사인의 구별이 없는 곳으로 만들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이몬의 요구는 공소空疏한 것이 아니다. 공인과 사인의 구별이 없는 사회, 즉 민회와 광장의 구별이 없는 사회가 일찍이 이오니아에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소노미아(무지배)이다. 그것은 이오니아 몰락 후 상실되었을 뿐 아니라 망각되었다. 단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흐름 속에 희미하게 계속 살아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을 공부했다고 이야기된다. 그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에도 풍자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적 정신을 그처럼 이어받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의식을 넘어서 다이몬의 지령이라는 형태로 상기된 것이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말로 이야기하자면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강박적인 것이다. 그 결과 소크라테스는 말하자면 아테네에 이오니아의 이소노미아를 회귀시키려고 했다. 그가 아테네의 데모크라시에 위협으로 간주된 것은 그 때문이다.
이윽고 『철학의 기원』의 연재를 개시한 시점에서는 전망이 분명해졌다.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의 철학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환언하자면, 그는 아테네의 데모크라시 안에 이오니아적인 이소노미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를 수수께끼로 만들었다. 하지만 수수께끼는 오히려 우리가 아직 데모크라시의 허구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2015년 1월
가라타니 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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