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장
어리석은 쥐의 비극
어느 울창한 숲에 저녁이 찾아오고 있었다. 구석진 곳의 땅이 들썩들썩 움직이더니, 갈고리 모양의 손이 쑥 올라왔다. 곧 까만 생물체가 빠끔 머리를 내밀었다. 두더지였다. 두더지는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핀 후, 아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작은 몸집의 또 다른 두더지가 나타났다.
작은 두더지가 몸을 푸르르 털자 잔뜩 묻어 있던 흙이 사라지고, 검정색 털옷을 입은 두더지의 제 모습이 드러났다. 그런 딸 ‘로즈’를 두더지 아빠 ‘밥’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 우리 자리로 가자.”
밥의 말에 로즈는 익숙한 몸짓으로 아빠의 뒤를 따랐다.
얼마 가지 않아 둘은 긴 통나무 앞에 멈춰 섰다. 벼락에 맞아 쓰러진 나무였다. 밥이 통나무 앞의 깊이 패인 골에 들어가서 앉자, 로즈도 그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밥과 로즈가 ‘우리 자리’라고 부르는 그곳은 마치 요새처럼 감쪽같이 부녀를 숨겨 주었다.
저 멀리 해가 붉은 빛을 온 천지에 내뿜으며 마지막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로즈는 매일 보는 이 풍경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풍경을 즐기시는 아빠의 시간을 존중하기 위해서다. 어쩌면 이 시간에 아빠는 자신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정리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드디어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로즈야, 오늘은 어리석은 쥐들에 대해 이야기해 줄게.”
“재미있겠네요. 빨리 해 주세요!”
밥은 로즈의 재촉에 빙긋이 웃었다. 그러고는 늘 그랬듯이 천천히 로즈를 이야기 속으로 데려갔다.
‘마우스랜드’라는 제법 큰 마을이 있었다.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 주민의 대다수가 쥐들이었지만, 통치자는 늘 고양이었다.
쥐들은 자기들보다 똑똑하고 힘이 센 고양이가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양이를 자신들의 대표로 뽑았다. 하지만 대표가 된 고양이는 쥐들에게 불리한 법안만 잔뜩 만들어 냈다.
‘시속 10km 이상 달리는 쥐는 징역 6개월에 처한다.’
‘쥐구멍을 직경 30cm 이하로 파면 징역 1년에 처한다.’
이 법안들은 고양이가 쥐를 잘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마우스랜드의 쥐들은 점점 살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실시되는 선거에서 매번 새로운 후보를 대표로 뽑았다.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 누런 고양이, 얼룩 고양이…. 그러나 어떤 고양이가 통치자가 되든 쥐들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쥐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에 띠를 두른 쥐 부부가 마우스랜드에 나타났다.
“왜 우리는 우리와 같은 쥐를 대표로 뽑지 않은 거죠?”
띠쥐 부부의 말에 쥐들은 충격을 받았다. 삼삼오오 모여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더니 결국 온 마을이 술렁거렸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변하자 고양이 정부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밀 창고에 감춰 뒀던 식량을 쥐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결정했다.
“역시 고양이 정부는 달라.”
쥐들은 식량을 나눠 주는 고양이 정부에 고마워하며 이들을 다시 평가했다. 분노의 감정은 금세 사그라들었고, 마을은 평온을 되찾았다.
다시 선거철이 돌아왔다. 띠쥐 부부는 고양이의 당근에 속지 말고, 이제야말로 쥐를 대표로 뽑을 기회라고 주장했다.
이때까지 귀를 쫑긋거리며 이야기를 듣던 로즈가 신나서 외쳤다.
“멋져요, 띠쥐 부부!”
“응, 띠쥐 부부는 늘 함께 토론하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현명했단다.”
“그럼 이제 귀들의 정부가 들어섰겠네요.”
“과연 그럴까? 이야기를 더 들어 봐.”
쥐들은 띠쥐 부부를 보면서 수군거렸다.
“저 부부의 저의가 뭘까?”
“왜 머리에 띠를 두르고 그래? 우리와 뭔가 다르지 않아?”
그때 군중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띠쥐 부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빨갱이가 나타났다. 잡아라!”
이제 어느 누구도 띠쥐 부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띠쥐 부부는 절망했다.
어느 날부터 마을에서는 더 이상 띠쥐 부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고양이의 보복을 피해 서쪽 숲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밥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런데 로즈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밥이 돌아보니, 로즈는 발을 잔뜩 움츠린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화가 났을 때 보이는 행동이다. 그때였다.
“쉿!”
갑자기 밥이 로즈의 손을 잡고 나무 밑 굴속으로 냅다 뛰었다. 로즈는 아빠의 행동으로 미루어 천적인 올빼미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올빼미에 대한 두려움보다 아빠의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밥과 로즈는 굴속 깊은 곳의 비밀 아지트에 도착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로즈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아빠, 선거 결과는 어떻게 되었어요? 설마…?”
“응, 네가 걱정한 대로야.”
“쥐들은 왜 그렇게 다 어리석을까요?”
“모든 쥐가 다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야. 띠쥐 부부는 현명했잖아.”
로즈는 ‘아, 맞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밥은 쥐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오랫동안 고양이 정부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누구나 같은 상황에 처하면 비슷하게 행동할 거라고 덧붙였다.
“로즈야, 두려움은 우리의 생각을 빼앗아 간단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두려움은 우리의 생각을 감옥에 가두거든.”
“아빠, 그럼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어요?”
“응, 있지.”
“무엇인데요?”
“어떤 두려운 상황에서도 이야기를 잊지 않아야 해. 오늘 올빼미의 위협 앞에서도 네가 이야기를 잊지 않고 궁금해했듯이 말이야. 이야기는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어 주거든. 이야기를 잊어버리면 존재도, 상상도, 미래도 사라지게 된단다.”
로즈는 아빠의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따. 하지만 아빠의 비장한 표정으로 보아 아주 중요한 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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