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즐거운 읽기 경험이 사라진 시대
오늘날 “나는 읽는 게 정말 즐거워”라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대체로 두 가지 부류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진심으로 글 읽기를 즐거워하는 극소수의 ‘독서 은하계’ 거주민, 둘째는 읽기는 좋다라는 생각에 빠져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의무감으로 읽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 사람. 물론 둘 모두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고, 그러니까 ‘문해력’이라는 단어가 이슈가 되고 있다.
나는 문해력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예전부터 문해력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문해력이라는 ‘유행어’를 둘러싼 국내 풍경이 능력을 위한 독서·독서를 위한 독서를 강권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정부까지 나서서 ‘문해력을 키우자’고 이야기한다. 그 본의는 어떤지 몰라도, 잘해 봤자 둘째 부류의 사람들만 양산되는 듯하다.
문해력과 관련해, 곧잘 간과되고 있지만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무엇을 어떻게 읽을지를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과연 무엇을 읽을 것인가’는 21세기에 새삼스럽게 제기된 질문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인류가 진지하게 붙든 질문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정보 홍수의 시대로 여겼다. 기원전 900년경에 쓰인 『성서』 「전도서」에 이미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라고 쓰여 있다. 다산 정약용은 반산 정수철에게 “옛날에는 책이 많지 않아 독서는 외우는 것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고四庫의 서책이 집을 가득 채워 소가 땀을 흘릴 지경”이라고 한탄했다. 구텐베르크 인쇄 혁명으로 사상 최초로 책이 ‘찍혀 나오기’ 시작하던 1550년에 이탈리아의 작가 안톤 프란체스코 도니는 이렇게 불평했다. “책이 너무 많다보니 제목들을 읽을 시간조차 없다.” 수많은 텍스트 중에 ‘어떤 것’을 취사선택해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딱히 오늘날뿐 아니라 오랫동안 모든 진지한 독자의 주된 관심사였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과거엔 그것이 ‘문제’라는 점은 알았지만 오늘날은 그걸 문제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정도일까.
나는 이 책에서 ‘책’에 대해 주로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책을 읽겠다’는 마음으로 책 읽기를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점만큼은 서두부터 강조하고 싶다. 책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가치 있는 텍스트 읽기 경험을 추구하다 보니 책으로 귀결되었다. 이 차이는 꽤 크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의 주된 관심사는 제 나름의 물성을 가진 책이라는 물건이라기보다 ‘주로 책의 형태로 제공된 텍스트가 신실한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제공한 진실한 읽기 경험’ 및 그것을 가능하게 한 진심 어린 헌신·열정·노동이다. 그리고 그 ‘진실한 읽기 경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종이책을 통해 할 수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 판단의 경로를 이 책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오래전부터 나는 기사를 읽고 쓸 때마다 갈증을 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정치인이 반지성주의라는 단어를 써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발생하면, 통상 기사에는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팩트’와 각지의 ‘반응’ 정도를 싣는다. 만약 조금 더 긴 분석 기사라면, 과거에 반지성주의라는 말을 써서 물의를 빚은 다른 정치인의 사례나 반지성주의의 사전적 의미 또는 기원 그리고 기사의 주제에 맞는 전문가의 코멘트 한 마디 정도가 따라붙는다. 그러면 댓글에는 그 말을 한 정치인을 욕하는 글이 주루룩 달린다. 이때 언론사는 빨간 깃발을 들고 두두거리며 황소여론를 약올리는 투우사 같은 역할을 오랫동안 했는데, 요새는 깃발마저 개인 유튜브에 빼앗겨 어리둥절해 있다.
그런데 이럴 때 반지성주의라는 말이 어디에서 기원했고, 그 맥락이 등장한 배경은 무엇이며, 오늘날 한국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지 조금 더 파고든다면 어떨까?
근래 길고양이 혐오·노키즈존 등에 대한 기사는 지역과 일시만 바뀐 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사람들도 기사에 분노하거나 공감하는 등 둘 중 하나로 갈라지곤 한다. 양측이 서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을 일 따윈 없다. 나는 조금 더 본질적으로 왜 사람들이 길고양이를 혐오하는지, 노키즈존은 왜 없어지는 편이 좋을지 등에 대해 바닥부터 성찰하고, 다른 관점으로 살펴보는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간혹 잘 쓰인 칼럼이나 SNS에서 이슈가 되는 글이 그런 역할을 하곤 했지만, 어떤 사안에 대한 짧은 글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때 책은 순식간에 생각의 밀도를 높여 주는 지팡이혹은 디딤돌,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어떤 주제에 대해 책 한 권 분량으로 고민한 흔적 그리고 그 흔적을 ‘굳이’ 종이로 엮어 낸 결과물이 바로 책이기 때문이다. 글이든 영상이든 쉽게 쓰고, 쉽게 소비되는 시대에 여전히 책 한 권 분량의 생각을 삭여 내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주장을 겸손하게 검증하고 또 모은 결과물이 갖는 밀도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다. 책을 펼쳐 들었을 때 나는 평소 기사를 읽으면서 느꼈던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밀도 높고 흥미로운 시각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모두가 지금 막 발생한 사건의 뉴스만을 숨 가쁘게 다룬다면 나 하나쯤은 아예 뉴스를 구실 삼아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책과 함께 늘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예를 들어 광복절을 앞두고는 매년 이어지는 비슷한 형식의 기사 대신 일본 저널리스트 헨미 요의 『1937 이쿠미나』를 진지하게 읽어 보며 악의 평범성을 고민하고 자신을 벌거벗는 단계까지 반성하는 사람의 몸부림을 숙연히 바라보면 어떨까? 전 여당 대표의 장애인 혐오 발언에 대한 기사를 리트윗하고서 ‘심한 욕’을 하고 마는 대신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의 ‘말 돌리기 혐오’에 분노해 프랑스 언어철학자 필립프 브르통이 대단한 기세로 쓴 책 『조작된 말』을 소개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회사의 뉴스레터 프로젝트로 내가 2021년 8월부터 발송해 온 ‘인스피아’는 종종 서평 뉴스레터로 소개되곤 하는데, 매 편 꽤 여러 종의 책을 다루기는 하지만 처음 기획할 때부터 서평을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책을 담당하는 문화부 기자도 아니고 대단한 독서 마니아도 아니었다. 시작할 당시 목적은 단 하나였다. 필자든 독자든 모두 진절머리를 내고 있는 망가진 글의 생태계 안에서 읽는 맛·읽을 가치가 있는·읽을 수 있는 텍스트를 쓰고 싶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주제는 어느 것이든 상관없었다. 책은 바로 이때 강력한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어떤 주제든 모종의 진정성이 담겨 있는 책을 읽을 때 나는 본래 목적을 잊어버릴 정도로 빠져들었다. ‘읽고 싶은 글’에 대한 오랜 갈증과 뉴스레터를 준비하던 ‘진공의 시간’이 가져다준 재미였다. 그렇게 어떤 책이든 닥치는 대로 빠져들어 읽다 보니 ‘책을 읽는 게 이렇게 재미있다면 그냥 내가 느낀 이 재미를 레터에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터에서는 책 소개나 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내 질문을 앞세웠는데, 이유는 당시 내가 나의 질문과 답답함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어떻게든 얻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 모든 책을 읽어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정숙한 도서관이 아닌 왁자한 저잣거리 한귀퉁이에서 좌판을 벌여놓은 채로 책을 읽은 꼴이다. 이렇게 해서 책을 지팡이 삼아 해찰한다는, 서평도 아니고 칼럼도 아니고 에세이도 기사도 아닌, 수상한 뉴스레터가 그야말로 얼렁뚱땅 시작되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