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역사적 트라우마의 재현 (불가능성):
홀로코스트 담론에 대한 비판적 읽기
1
포스트 홀로코스트의 도래
20세기가 전쟁과 폭력의 시대였음은 그 기간 동안 일어난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충분히 증명된다. 가공할 무기와 엄청난 인명 살상, 인간성의 바닥을 보여주는 맹목적 광기와 집단적 증오는 역사의 진보와 인간에 대한 신화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전쟁이라는 집단적 폭력은 역사 이래 인간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인간의 낯익은 동행자이지만, 20세기 인류가 경험한 전쟁과 폭력은 그 조직성과 잔혹성에 있어서 비교를 불허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의 무대에 올린 끔찍한 잔혹극이자 배우와 관객 모두를 공포와 혐오에 몸서리치게 만든 잔인한 폭력극이었다.
20세기 서구가 자행한 잔혹행위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장면은 ‘홀로코스트’the Holocaust라 불리는 나치의 유대한 말살사건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특정 인종이라는 이유로 절멸시키려한 이 집단 학살사건은 문명의 야만을 드러냈으며, 아도르노로 하여금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고통스러운 명제를 던지도록 만들었다.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 따라서 근대 이후 서구 역사를 추동해왔던 이성의 기획 자체를 비판적 심문에 부치지 않을 수 없었던 극단의 사건이 홀로코스트이다. 홀로코스트는 서구 지식인들로 하여금 인간과 비인간, 이성과 광기, 주체와 타자, 문명과 야만 등 안정된 구분과 구별을 가능케 해주었던 온갖 이분법적 경계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 사건에 대한 해명과 반성, 죄의식과 윤리적 책임은 20세기 서구 지성계를 그 이전과 확연히 구분해주는 시대적 이정표이다. 소위 ‘포스트 홀로코스트’Post-Holocaust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포스트’라는 접두어의 남용이 우리 시대의 특징 중 하나이지만 포스트 홀로코스트는 또 하나의 포스트주의를 양산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에 등장했던 그 모든 포스트주의의 기원과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역사적 준거점의 하나가 홀로코스트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한계의 사건the event of limit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이 사건을 어떻게 증언하고 그것에 대해 어떤 역사적, 윤리적 책임을 지는 것이 불행했던 과거의 극복과 화해에 이르는 길일까? 아니, 이 한계 사건을 인간의 담론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기존의 담론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소위 경계 위반의 담론이라 할 수 있는 다양한 포스트주의의 핵심적 에피스테메를 들여다볼 수 있는 물음들이다.
이 글은 ‘트라우마’라는 정신분석학적 범주의 역사적 활용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미국 비평계의 주요 담론들을 검토함으로써 홀로코스트 ‘이후’를 준비하는 역사적, 윤리적 담론에 요구되는 사항들을 점검해 보려고 한다.
2. 트라우마, 쾌락원칙 너머의 역사와 충동과 만나는 통로:
지그문트 프로이트
서구 담론계 일각에서는 전쟁과 학살, 인종폭력과 가정폭력, 강간과 테러 같은 끔찍한 사건의 충격을 개념화하기 위해 ‘트라우마’trauma라는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활용한다. 정신분석학에서 트라우마란 주체를 감싸고 있는 심리적 방패막을 붕괴시킬 정도의 강한 충격을 심리기구가 적절히 처리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트라우마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trauma’는 ‘상처’wound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τραῦμᾶ’에서 유래했다. 서구사회에서 트라우마는 원래 외부적 충격으로 신체 조직에 일어난 손상과 그 손상이 유기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기 위해 17세기 의학에서 사용되었다. 이후 이 용어는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정신적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기 시작한다. 신체적 상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가 이후 정신에 적용되었지만 정신분석학적 트라우마 개념은 애초의 의미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정신에 난 ‘상처’이자 ‘흉터’scar이다. 그러나 정신의 상처는 신체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불가불 얽혀 있다. 정신의 상처는 감각의 마비, 불면증 같은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신체적 증상은 감정인지 불능, 기억상실 같은 정신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로저 룩허스트의 지적처럼 신체와 정신의 이 분리불가능성이야말로 안과 밖의 분리불가능성과 더불어 트라우마 개념을 강력하게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이다. 정신과 육체, 안과 밖의 경계 와해와 그것의 낯설고 새로운 연결 가능성은―물론 많은 위험과 불확실성이 뒤따르지만―트라우마 개념이 지닌 잠재적 가능성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정신적 충격을 가져오는 힘은 ‘자극’stimulus과 흥분excitation으로 개념화된다. “우리는 트라우마를 짧은 시간 안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대처하거나 처리할 수 없는 강력한 자극의 증가가 정신에 일으키는 경험에 적용하는데, 이 경험은 에너지 작동방식에 지속적인 혼란을 초래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 에너지의 혼란이란 자극의 평형상태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의 원칙’the principle of constancy의 교란 상태를 의미한다. 후일 프로이트는 항상성의 원칙이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일부임을 인정하게 되고, 심리적 평형을 무너뜨리는 강한 자극을 쾌락원칙을 넘어선 힘으로 정리한다. 강한 자극의 대량 유입으로 정신의 방패막에 구멍이 뚫리고 흥분이 증가하면 심리기구는 중단된 쾌락원칙을 재가동하기 위해 쾌락원칙과 모순되지는 않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프로이트가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 부르는 것은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으로 돌아감으로써 트라우마적 충격을 제어하려는 심적 작업을 가리킨다. 쾌락원칙이 다시 작동하려면 자아ego는 먼저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자극’unbound free stimuli, 다시 말해 자아에 의해 통제되고 다스려지지 않은 자극을 묶어야binding, 독일어로는 Binding이고 그 반대말은 Entbinding이다 한다. 이 묶기 작업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이 작업이 수행되지 못하면 통제되지 않은 자극이 자아를 침범하여 그 방어막을 무너뜨리게 된다. 그 결과는 심적 체계의 붕괴이다. 이것이 트라우마이다. 반복강박이란 불쾌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트라우마적 장면으로 돌아가 뒤늦게라도 자아가 자극을 묶고 통제master하는 작업이다. 반복강박은 트라우마적 상황을 표상질서와 묶으려는 자아의 힘겨운 시도이다. 심적 기구가 자극을 방출discharge하고 정동affect을 발산하여 정화catharsis를 하기 전에 자극을 표상질서와 묶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극을 묶으려면 고도의 심적 에너지를 투자하는 작업, 프로이트가 독일어로 besezung이라 부르고 영어로 카덱시스cathexis라고 번역되는 작업이 필요하다. 심리기구는 자극의 구속에 필요한 에너지를 조달하기 위해 다른 조직체에서 에너지를 끌어와야 하기 때문에 다른 심적 기능들은 위축되거나 마비된다. 그러나 이 묶기 작업을 거친 이후에야 심리기구는 중단된 쾌락원칙을 재가동할 수 있고 트라우마 이전의 평형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
프로이트에게 쾌락원칙을 중단시키는 자극은 ‘외적’ 자극과 그가 ‘충동’drive이라 부른 ‘내적’ 자극을 모두 포함한다. 무의식적 욕망과 충동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심적 드라마에 일차적 관심이 놓여 있던 정신분석가로서 프로이트가 강조한 것은 내적 자극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외적 자극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사실 정신분석가로서의 긴 활동기간 동안 프로이트는 트라우마를 발생시키는 원인과 관련하여 하나의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 외적 자극에 대한 강조에서 내적 자극으로 논의의 무게 중심을 옮김으로써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실제 사건을 무시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그의 동시대 정신분석가였던 샤르코, 자네와 더불어 트라우마 연구의 선구자로 호명되었지만, 이 호명이 늘 호의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언 해킹은 프로이트가 트라우마 관념에 “시멘트칠을 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많은 트라우마 연구자들은 1897년 프로이트가 성적 ‘유혹이론’을 포기하는 시점부터 지적 배반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이 순간부터 프로이트는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일으킨 실제 사건에 대해 떠올리는 기억, 오늘날 ‘회복기억’recovered memory이라고 불리는 것의 진실성을 부정하고 피해자의 기억을 거짓말이나 환상으로 치부해 버리는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반 데어 콜크처럼 신경과학적 연구와 트라우마론을 결합시키고 있는 현대 정신의학자들 또한 트라우마 사건 자체의 사실성을 지우고 그것을 무의식적 욕망과 환상으로 대체해 버리는 것 같은 프로이트의 시각을 문제 삼는다. 특히 남성의 성폭력에 맞서 피해 여성의 진실성을 지키려는 다수 페미니스트 활동가와 정신의학자들에게 프로이트는 여성의 말을 믿지 않으려는 남성 이데올로기의 표본으로 여겨져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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