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에서 벗어날 용기
명랑한 모험가
한승태
“사회적인 메시지도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다시 꺼내서 읽어보고 싶은 책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때로는 본론에서 벗어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봐요.”
한승태
‘몸으로 쓰는’ 르포작가. 몇 달, 몇 년을 겪고 관찰한 다음에야 책을 썼다. 《인간의 조건》과 《고기로 태어나서》는 그러한 노동의 결과물이다. ‘노동 3부작’을 마무리한다는 단기 목표를 갖고 있다. 물성을 가진 글과 책을 배타적으로 사랑한다.
2022년 2월 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한 음식점
인터뷰어 조문희
타조알 얼굴에 에반게리온 어깨. 작가 한승태의 첫인상이다. “생각보다 마르셨…네요?” 악수차 내민 손이 길고 곱다. 마주 잡고 꾸벅, 잠깐 인사한 뒤 곧추세운 머리는 천장에 닿을락 말락 하다. “키도 크…시네요?” “그런가요? 하하.” 187센티미터라고 하는데, 얼굴이 작고 어깨가 넓어서인지 아무래도 더 커 보인다. 키를 줄여 말하는 사람도 세상에 있다더니, 주변을 괴롭게 하는 희귀종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본 눈동자가 검은 뿔테안경을 뚫고 빛난다. 그리고 미소, 소년처럼 씩-.
그의 책을 읽으며 편견을 꽤 가졌던 모양이다. 첫 작품 《인간의 조건》2013에서 그는 꽃게잡이 배의 선원에서 비닐하우스 농부로 바다와 육지를 오가고, 자동차 부품공장 노동자부터 편의점 알바생까지 공장지대와 도심 한복판을 돌아다닌다. 그다음 작인 《고기로 태어나서》2018는 닭, 돼지, 개 농장에서 일한 기록이다. 힘깨나 쓰는 팔뚝에 손가락 두툼한 ‘어른 사내’일 줄 알았는데. 셜록 홈즈가 살아나도 이 사람 직업은 못 맞출 것 같다.
단서라면 옷차림. 그는 ‘노스페이스’ 플리스 재킷과 함께 왔다. 두툼한 패딩은 벗어 의자에 걸었고, 재킷 안에는 흰색 티셔츠 하나를 겹쳐 입었다. “막 일하고 오는 참이에요.” 인터뷰 당시 그는 한 유명 고층빌딩에서 청소 업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얼굴은 목보다 살짝 까만 편,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한창 바깥일을 하던 그가 비닐하우스 농장을 찾아갔다가 “한국 사람이야?”라는 질문을 받은 에피소드《인간의 조건》가 생각났다. 일터가 달라지면 피부색까지 바뀌는 ‘찐’ 일꾼이다.
그는 자신의 취재와 서술 방식을 두고 “슬쩍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제 성격에는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슬쩍’은 어폐가 있는 말이다. 그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 동안의 노동 경험을 토대로 첫 책을 썼다. 두 번째 집필도 4년간 일한 다음에 착수했다. 그는 “조지 오웰의 책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1933을 모티프로 삼았다”고 책에 썼는데, 오웰이 두 도시에서 부랑자로 산 기간도 5년이다. 얼마나 몰두해 살았던지, “일이 끝날 때쯤엔 ‘야 이렇게 당연한 걸 가지고 책을 쓰는 게 말이 되나’ 생각이 든다”고 했다. “밖에서 되돌아보면, ‘그때 내가 왜 그랬지’ 싶죠.”
인터뷰 중 그는 ‘키 덕분에 인력시장에서 눈에 쉽게 띄었다’며 농담했지만, 독자는 290밀리미터 발에 맞는 장화가 없어 고생한 그의 경험을 알고 있다. “힘든 거 키 큰 애 시켜”라는 말이 유행한 농촌 마을 에피소드에서 그가 겪었을 설움을 짐작한다. 그런 고생담도 대부분 유머러스하게 전개된다. 괴로움의 ‘뒷면’까지 직시하기에 가능한 서술이다. 작가로서 “(긴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을 욕망한 결과물이기도 한다.
한승태의 글은 한 편의 완결된 소설과는 다르다. 소설보다는 에피소드의 모음에 가깝고, 그마저도 갈등의 발단은 있지만 이렇다 할 절정 없이 흐지부지 끝나거나 해소된 줄 알았던 위기가 다른 현장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고기로 태어나서》의 목차는 ‘닭고기의 경우’ ‘돼지고기의 경우’ ‘개고기의 경우’로 단순하다. 이야기는 ‘일하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힘들었다, 그만뒀다’는 구조로 요약된다. 그렇다고 그의 이야기에 짜임새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자 출신 작가 장강명은 “르포는 픽션으로 치면 모험소설과 비슷한 구성이고, 1인칭 화자는 주인공인 모험가 역할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참, ‘한승태’는 그의 필명이다. 어릴 적 즐겨 읽은 명랑 학원물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 사진은 싣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앞으로도 일해야 하는데, 얼굴이 알려지면 힘들어요.” 2022년 2월, 명랑한 모험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2018년 《고기로 태어나서》를 출간한 후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다음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2019년엔가, 인공지능AI 발전으로 대체될 일자리 순위가 발표된 걸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순위표상 높은 자리에 있는 직업 순서대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텔레마케터가 대부분 발표에서 1위라, 얼마 전까지 대형마트 AI 고색센터에서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했어요. 요즘은 고층빌딩을 청소합니다. 오늘도 일 마치고 오는 길이에요.
줄잡아 5년 주기로 책을 내셨어요2023년 역시 《고기로 태어나서》 이후 5년째 되는 해. 그사이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세요.
노동을 하죠.(웃음) 책 소재인 동시에 생계 수단이에요. 책 인세를 받긴 하지만 금액이 크지 않아요.
《인간의 조건》에 “어느 날 일을 마치고 고시원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동안 겪어본 직업이 꽤 여러 가지였다. (…) 책을 한 권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라고 쓰셨어요. 애당초 글을 위해 일을 시작한 건 아니었나봐요.
실제로 일이 먼저였어요. 원래 글 쓰는 걸 좋아하긴 했죠. 생계를 위해 일했고, 글 쓰고 싶은 마음은 저녁마다 일기를 쓰며 풀었어요. 나중에야 ‘나중에 이걸 모아서 책으로 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책에는 어선 얘기가 먼저 나와요. 첫 직장치고는 예사 선택이 아니네요.(웃음)
돈이 정말 궁했거든요.(웃음) 그때가 졸업 직후, 스물여덟쯤이었어요그는 현재 40대 초반이다. 부모님은 제게 ‘공무원이 돼라’고 바라셨는데, 저는 글을 쓰겠다고 우겼거든요. 갈등이 심했고, 결국 집을 나왔어요. 그런데 보증금으로 쓸 목돈이 없는 거예요. 그때 눈에 띈 게 어선 광고였어요. 단기간에 큰돈을 모을 수 있다는.(웃음) 그때만 해도 이걸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이런 경험은 나중에 쓸 수 있을지도’라는 막연한 예감 정도는 있었죠. 나름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전업 노동자가 아니어서 구직 과정에서나 일할 때 티가 나지 않던가요. 키가 유난히 커서 눈에 띄기도 하고요. 거친 뱃사람에 대한 신화가 있다 보니 두려웠을 것도 같은데요.
배 타기 전에는 어쩐지 거기 사람들은 전부 전과자고, 문신이 있을 것 같아서 두려웠어요. 저는 이력을 다 속이고 들어가니까, 말하다가 들킬까 봐 조바심 들 때도 있고요. 그런데 막상 일하다 보면 생활만 다를 뿐 다 평범한 사람들이고, 저한테도 특별히 관심이 없어요. 키도 그저, 크니까 쓸모 있겠지, 눈에 들어오는 정도? 그냥 거기 녹아드는 거죠.
다른 장르 말고 ‘논픽션’을 택한 이유가 있나요?
처음부터 논픽션 작품을 써야겠다는 결심이 있던 것은 아녜요. 좋아하기는 했죠. 실화와 기록물이 주는 무게감이 마음에 들었어요. 픽션은 상대적으로 휘발성이 강한 느낌이랄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요. 어릴 때는 이것저것 많이 읽었어요. 대학을 춘천에서 다녔는데, 문학 동아리 활동을 했어요. 졸업 후엔 그 가락으로 신춘문예를 포함한 여러 공모전에 투고했는데 한 번도 안 됐어요.(웃음) 그러다 일을 했고, 조금씩 논픽션을 더 선호하게 된 것 같아요. 현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니 책을 읽는 감상도 달라졌달까.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바뀐 것일 수도 있고요.
써보고 나니 더 알게 됐어요. 이게 내게는 더 잘 맞는구나. 공모전에 넣었다가 안 된 글에 비하면, 배 타고 돌아와서 쓴 글에서는 어떤 ‘선’을 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순전히 주관적 느낌이지만, 디테일이나 표현 방식, 표현 수위 모두가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 얘기, 대화를 그대로 적었는데, 머릿속에서 지어낸 것과는 맛이 다르더라고요.
한승태의 글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그의 ‘맛깔나는’ 표현을 입에 올린다. 일터에서 만난 아저씨들이 내뱉은 욕설을 있는 그대로 적시하지만 불편하지 않다. 그 자신의 서술에도 유머가 묻어난다. 돈사장에서 그는 돼지 똥을 물에 풀어 논에다 뿌리는 일을 한 적이 있다. 똥도 비료니까. 그런데 호스가 두꺼운 데다, 똥물의 수압이 높아 팔심만으로는 붙들기가 어려웠단다. 다리 사이에 끼워봐도 호스가 이리저리 날뛰었던 모양이다. “입으로 설사를 내뿜는 아나콘다의 등에 올라 로데오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병아리 부화장에서 일한 경험은 이렇게 썼다. “산란계 병아리 작업을 빼놓고 부화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재닛 리가 샤워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만 보고 (영화) 《사이코》1960에 대한 평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문장이 유머러스한 걸로 정평 나 있어요.
개인적 취향인데, 원래 유머가 있는 문장을 좋아합니다. 재밌는 표현이 있으면 따로 적어놨다가 기회가 될 때 이리저리 바꿔 적용해봐요. 《고기로 태어나서》를 쓸 때는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의 책 《마지막 기회라니?》2010·2014를 보며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중간중간 에피소드를 배치한 것도 특이해요. 노동 현장의 비참을 다루는데도 읽다 보면 웃음이 나와요.
취향인 동시에 의도적 선택이에요. 벌어진 일을 있는 그대로 촬영한다면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촬영이란 결국 전체 중 특정 장면을 잡아내는 것이고, 제가 잡는 기준은 ‘재미’였어요. 어떤 일을 겪게 되면 머릿속에서 유머러스한 상황으로 정리를 해요. 거짓말로 지어내려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웃기거나 ‘웃픈’ 지점을 찾아보는 거죠.
기자분들도 이런저런 노동을 하고 르포 기사나 책을 많이 내잖아요. 귀담아들을 만한 메시지가 많지만, 전달 방식은 뭐랄까, 내부 문서 같은 느낌이에요. 그 이슈와 주제에 공감하는 사람하고만 소통하는 글요. 그래서인지 내용은 참 좋은데도 파급력이 강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논픽션을 쓸 때 좀 다르게 해보고 싶었어요. 어떤 심각하고 어두운 주제든 재밌게 쓰고 싶다는 것이 우선순위였죠.
재미가 일종의 파급력 확보 수단이군요.
두 가지 측면인데요.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라는 점에서 일단 필요하고, 저자의 메시지를 독자가 받아들이게 만드는 ‘쿠션’으로도 유용해요. 논픽션은 태생적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만큼 메시지와 연결되기 때문에, 도덕적인 톤이 자연스레 들어가는 것 같아요. 도덕적 메시지가 나쁘다는 건 아닌데, 독자의 자의식을 자극하는 면이 있잖아요. 누가 가르치려고 하면 ‘그건 아닌데’ ‘내 생각은 다른데’ 툭툭 반발이 튀어나오는 것처럼요. 어떤 책을 향유하는 데 걸림돌이라고 생각해요. 유머는 도덕적인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방법 같아요. 같은 메시지라도 웃음을 동반하는 쪽이 받아들이기 편하잖아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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