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논의를 위한 지도
정치 불신과 시민 참여
1960년대부터 이어진 주요 정치사회적 흐름
1960년대에 포착된 두 가지 주요한 현상이 있다. 그중 하나는 자유주의 물결과 탈물질주의 가치관이 확산되며 사회 전반에 실재하는 권위의 합법성이 도전받은 흐름이다. 이는 사회운동social movement의 등장과도 연결되는데, 사회운동은 여러 사람이 사회 개혁을 목표로 집합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현상은 정치 불신political distrust의 심화이다. 정치 불신은 “정치 체제에 대한 부정적이고 평가적인 정량 내지 판단”을 의미한다. 정당체제의 민의 왜곡 증가, 부정 선거의 출현, 사회·경제문제 해결에 무능한 정부, 부정적 견해의 언론 보도 확대 등이 정치 불신의 주된 원인으로 지적됐다.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가중되고 있는 정치 불신은 정부 경제에 필요한 요소이자 자연스러운 정치 문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시민들의 민주주의 신뢰도와 연동되는 평가라는 점에서 단순한 감정이 아닌 중요한 지표이기에 눈여겨봐야 한다. 더욱이 현재 세계정치 지형은 경기 침체와 불평등 확대, 극단주의 부상 등으로 요동치고 있다. 또한 선거 투표율 저하, 정당 가입률 하락, 정치적 양극화 심화 등이 곳곳에서 발견되면서 ‘민주주의 위기’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는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측정하는 방식은 각 사회와 시대마다 다르다. 그러나 다양한 민주주의 개념을 관통하는 공통의 핵심은 시민들의 뜻과 의견이 사회의 법과 정책에 반영되도록 제도적 원리와 장치를 두는 것이다. 특히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정치권력의 정당성은 사회구성원이자 피통치자인 시민의 선거 투표를 통해 확보되는 만큼 시민의 목소리를 수렴하고 이를 체제의 원리로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살아 있는 정치적 이념’으로 표현한 마이클 사워드Michael Saward는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1940년대에 썼던 글에서 가정한 ‘경쟁적 엘리트’라는 전제가 그동안 형태와 강조점이 달라졌을 뿐 거대한 민주주의 서사에서 힘을 잃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특히 참여주의·마르크스주의·여성주의 서사들이 경쟁적 엘리트라는 전제에 저항하며 이의를 제기해왔음을 환기했따.
1970년대 이후로 세계 정치 체제는 권위주의가 약화되는 반면 민주주의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민주주의 원리를 악용해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는 역사적 사례가 늘어갔다. 2000년대 이후 ‘민주주의 질quality of democracy’이라는 개념이 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받은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이 개념에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부식시키는 경향이 현대사회에서 두드러지고 있으며, 따라서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로 구분하는 층위에서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질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란 완결되는 과제가 아니며, 누적되는 구조적 문제와 새로운 형태의 도전에 맞서 끊임없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영구한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강조되고 있다.
한편으로 시민의 주된 정치 참여 방식은 1960년대 이후로 변화해왔다. 1960년대까지 시민의 주된 정치 참여 방식은 선거 투표와 정당 참여 정도였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이런 방식 이외에 집회와 시위, 불매 운동, 저항 행동 등 엘리트 중심의 지배 형태에 도전하는 정치 행위가 증가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지나면서는 운동 주체와 조직화가 확대되며 정치 부문에서 사회운동과 사회 변동이라는 주제가 중요하게 다뤄졌다. 그리고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체들이 새로운 정치의 주체가 되는 “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부상했다.
1990년대에 데이비드 마이어David Meyer와 시드니 태로우Sidney Tarrow는 사회운동을 포함해 시민 집단행동의 규모와 빈도가 증가하고 그 제도적 영향력이 크게 확장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에 주목하며 이를 “사회운동의 사회Social Movement Society”로 명명했다. 또한 1990년대 전후로 인터넷이 보급되며 많은 국가가 정보 사회와 네트워크 사회로 이행했고, 그 영향을 받아 시민들의 정치 참여와 사회운동 방식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뀌었다.
등장 초기에 사회운동은 일탈적·감정적·비합리적 현상으로 인식됐고, 사회운동 참여자들은 구조 변동의 희생자처럼 여겨졌다고전적 집합행위론. 그러나 이후 합리성 개념이 다뤄지며 이를 비판하는 패러다임이 정립됐다자원동원론. 이 과정에서 사회운동이 단지 일탈적·감정적·비합리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관점이 부상했고, 사회운동 참여자들은 전략에 따른 행동 수단을 이용하는 사람들로 새롭게 인식됐다. 반면 이런 관점은 합리성을 강조하면서 감정을 경시하고 미시적 동학과 내적 합리성 등을 간과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이후로도 새로운 유형의 시민 정치가 증가하고 집합행동과 사회운동이 일상화됐다. 이와 같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학계에서도 여러 시도가 전개됐으며, 이러한 흐름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인터넷이 도입된 이후 온라인 행동주의가 등장하면서 사회운동 이론과 온라인 행동주의 분석의 연계 가능성, 그리고 사회운동에서 강조된 조직의 역할과 중요성 등이 다시 논의되고 있다. 물론 여기까지의 내용은 세계사적 흐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시민들의 정치 참여와 집합행동, 사회운동을 바라보는 주된 견해는 그것을 일탈적·감정적·비합리적으로 인식했던 사회운동 등장 초기의 관점에 머물러 있다. 심지어 통치 집단의 통제 가능한 범위에 놓인 대상으로 여기는 인식도 강하다. 헌법 제21조에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으나, 이 조항은 아직도 종종 무시되거나 오독되고 있으며, 시민의 집회·결사의 자유는 여전히 빈번하게 침해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시민들의 항거 행동은 꾸준히 있어왔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사회의 정치사는 물론 시민들의 저항운동사와 긴밀히 얽혀 있다. 시간의 축을 과거로 이동해 그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자. 1948년 한반도에서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남한 단독 총선거가 강행됐다. 그 결과 한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됐다. 불행하게도 정당 질서는 미군정을 기준으로 개편됐고, 이승만 정부 때부터 금권선거가 자행됐다. 게다가 박정희 정부가 정치 결사 제한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시민들은 집권 정당 이외의 다른 정당·노동조합·시민단체에 가입하거나 활동하는 것을 제약당했다.
결국 한국에서 정당은 당원들의 자발적 조직화를 바탕으로 경쟁하지 못했고 국민 동원 조직으로 전락했다. 국민의 자발적 결사권은 국가 동원 의무로 대체되면서 심각하게 훼손됐으며, 시민들의 정당정치 불신은 깊어졌다. 국가의 통제와 억압이 강했던 권위주의 시대에 시민들은 저항하고 쟁투하며 정당 민주화를 요구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 이행기 전후로 시민들의 주권자 지위 회복 과정에서 사회운동의 역사가 축적됐다. 시민들의 사회적·정치적 권리 향상과 정치 참여 방식은 사회의 권력 구도와 연동해 변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