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판에 부쳐
들어가는 말
경제학은 돈 버는 법을 가르치는 학문이 아니다. 책방의 경제 코너에는 돈 버는 법에 관한 신간 서적이 가득하지만, 그것은 경제학과는 관계없는 속물학에 불과하다. 경제학이란 인간이 육신을 가진 동안 겪어야 하는 물질생활에 관한 철학이다. 그래서 경제학자를 세속 철학자worldly philosopher라고도 한다. 경제학이 철학이라면 경제학의 관심은 돈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넘어선, 좀 더 고상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고틀로프 프레게Gottlob Frege는 “훌륭한 수학자는 이미 절반의 철학자이고, 훌륭한 철학자는 이미 절반의 수학자다”라고 말했다. 철학과 수학은 그만큼 가깝다. 그런데 이 말은 경제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훌륭한 경제학자는 이미 절반의 철학자이고, 훌륭한 철학자는 이미 절반의 경제학자”인 것이다.
훌륭한 경제학자는 훌륭한 철학자다.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좋은 예다. 영국에서 경험주의 철학이 꽃을 피울 때 그가 《국부론》을 통해 제시한 경험론적 사고의 틀이 경제학인데, 그는 글래스고대학교의 도덕철학 교수였다. 훌륭한 철학자가 경제학자인 경우도 있다. 애덤 스미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대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그랬다. 금본위제도 하에서 국제수지가 자동으로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경제적 원리를 가격-정화-플로우 메커니즘price-specie-flow mechanism이라고 하는데,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바로 흄이다. 그러니 경제학과 철학의 사이는 결코 멀다고 할 수 없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국제금융기구에서 근무할 때 필자의 ‘세속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강단에 선 적이 있다. 어느 날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분의 권고로 워싱턴 D.C.에 있는 아메리칸대학교의 철학과 학생들 앞에 선 것이다. 강의 제목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 중앙은행의 손익 개념’이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말한 ‘이발사 패러독스Barber Paradox’를 경제학에 접목해서 필자의 생각을 발표했다.
강의 내용은 이러하다. 한 마을의 유일한 이발사가 자기 머리를 자르는 데에는 그의 빗과 가위가 무용지물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나라에서 유일하게 화폐를 발행하는 은행, 즉 중앙은행의 손익을 평가하는 데에는 통상적인 화폐로 평가한 손익 개념이 무용지물이다. 중앙은행의 손익은 화폐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환율 상승에 따라 보유하는 외화 자산에서 이익이 생겼다면, 기업과 개인에게는 희소식이다. 하지만 중앙은행에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환율 상승은 화폐 가치를 지키려는 중앙은행의 목표와 존재 이유가 실패했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폐 가치로 표시된 손익은 중앙은행에 무의미하다. 화폐를 발행하는 중앙은행의 성과는 화폐가 아닌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미국 학생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철학은 현실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던 예비 철학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설명을 듣고 무척 흥미로워했다. 경제 시스템의 한가운데 있는 중앙은행이 버트런드 러셀이 던진 이발사 패러독스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은, 인간이 당면한 문제의 중심에 항상 철학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자면, 그날의 짧은 강의는 미국 학생들뿐만 아니라 필자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생면부지의 학생들 앞에서 자기 철학을 강의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기묘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경제문제에 관한 해답을 경제학 교과서에서만 찾지 않으려 하는 필자의 태도를 비로소 세상에 드러냈다는 점이었다. 일종의 커밍아웃이었는데, 이후 다른 사람들에게도 필자의 세속 철학을 떳떳이 밝히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경제문제에 대한 해답을 왜 경제학 교과서 밖에서 찾는가?
일찍이 경제학을 배우기도 전인 고등학교 시절에 한문 선생님에게서 ‘문文, 사史, 철哲은 하나’라고 배웠다. 요즘에는 인문학을 ‘문·사·철’이라고 한다. 인문 대학을 대표하는 것이 어문학과, 역사학과, 철학과이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필자가 배운 ‘문·사·철은 하나’라는 명제는 3개 학과가 인문 대학에 몰려있다는 뜻이 아니다. ‘문文’이란,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장르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를 말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파토스pathos의 영역이다. 이에 비해 ‘철哲’은 논리와 사상,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로고스logos의 영역이다. ‘사史’는 사회제도 또는 사회 구성원의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토스ethos와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문·사·철은 하나’라는 말에는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사회나 제도의 영향을 받아 굳어지며, 반대로 사회 구성원의 사상과 감정은 관습과 제도를 변혁시켜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다른 사회과학 이론과 마찬가지로 경제 이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경제 제도는 아메리카 대륙처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도량형처럼 인간이 고안해 낸 계약이다. 따라서 모든 경제 이론이나 제도에는 치열한 논쟁과 반목이 담겨있고, 수많은 사람의 희망과 절망이 버무려져 있다.
그런데 숫자와 공식으로 가득 찬 일반 경제학 교과서는 경제이론을 효율적으로 소개하는 데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하는 바람에, 그것이 나오게 된 사회적 배경이나 그 이론을 관철한 사람의 내면세계와 같은 중간 과정을 빠뜨린다. 그 결과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경제학부에서 사람 냄새가 아닌 기계 냄새가 난다. 체온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아이러니를 극복하려면 경제문제는 경제학 교과서를 뛰어넘어 생각해야 한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