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가 내를 용서는 해 줄란지
이재훈 씨는 2021년 4월 22일 평택항에서 하역노동을 하다 300킬로그램 무게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진 이선호 씨의 부친이다. 그는 사고 당시 선호 씨와 함께 평택항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했다. 이 글은 2023년 3월 그와 나눈 대화를 옮긴 것이다.
선호가 토요일은 친구들하고 놀러 나가고 일요일은 낮 12시까지 잔단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꼭 짬뽕을 무러 가요. 내가 ‘야 이 자슥아, 아침부터 무슨 짬뽕을 먹노’ 그래도 꼭 짬뽕 먹고 싶다고 그래요. 그럼 같이 먹으러 가 주죠. 기숙사 들어가기 전에도 먹고 주말에도 먹고. 짬뽕을 그래 좋아했어요.
지하고 내하고 나눴던 추억들이 너무 많아요. 옛날에 (선호) 어릴 때 같이 다니던, 초량에 있는 목욕탕을 내가 아직까지 갑니다. 내가 가 어릴 때 사우나실 데리고 들어가서 애국가 4절까지 부르고 나오고 그랬거든요. 가는 목욕 끝나면 꼭 요만한 거, 입술 파래지는 팬돌이 음료수 먹고.
지금 사는 집 근처에도 좋은 목욕탕 많아요. 근데 일부러 그까지 갑니다. 거기 목욕탕이 아직 리모델링이 안 돼서 옛날 모습 그대로거든요.
선호 생각은 수시로 납니다. 내가 사고 나고서 불면증이 심해가지고요, 잠을 잘 못 잡니다. (거실에) 멍청하니 앉아가지고 밖에 쳐다보고. 잠 깨면 그만입니다. 다시 못 자요. 출근해서 일해야 하는데 잠을 못 자니까. 환청도 들리고. (선호가) 이야기하는 거죠. 나도 ‘선호야 어데 있노’ 부르고요. 지금도 선호가 중간문 열고 ‘다녀왔습니다’ 하고 들어올 것 같고 그렇습니다.
가를 생각하면 항상 미안해요. 내가 죽어서 저세상 가서 만날지 모르겠지만, 만나면 지가 내를 용서해 줄란지, 용서 안 해 줘도 할 수 없는 기고. 용서를 빌 수도 없고. 내가 지를 거길(평택항) 델고 가지 않았으면, 지 군대 안 가려는 걸 좀 늦게 보냈으면 코로나 시기에 (평택항에 안 가서) 사고하고 연관도 없었을 거고. 희한하게 그래 됐어요. 내가 미안하죠.
항간에서는 우리 아가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살림 보탤라고 평택항 가서 일하다가 사고 당했다 그런 얘기 하는데 그건 아니었고요. 내가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짜치게도 생활 안 했어요. 투잡하면서, 내 나름대로 취미 생활도 하면서 항상 아들내미한테 ‘네가 벌어서 네가 써야 된다’ 하고 돈의 소중함, 노동의 중요성 이런 거 가르치려고 했던 거지, 지 벌어 갖고 가계 보태고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선호 죽고) 엄마가 통장 열어보니까는 돈이 600만 원인가 나왔다대요. 친구들 얘기 들어보니까 중고차 살라 그랬대. 전에 내 차 갖고 연습시키니까 운전을 잘하더라고. 그래서 내 차 하루이틀 보험 넣어서 친구들이랑 충주도 갔다 오고 했었어요.
내가 물론 태어난 데가 부산이지만 2004년도에 평택 올라가서 17년 있었거든요. 돈 벌라고 갔다가 결국 내 자식 거기다가 버리고 왔는데. 그래서 (사고 후에) 부산에 오기 싫었어요. 근데 딸내미가 갑자기 여기로 이사를 오게 된 거예요. 아내도 심리적 안정을 취하려면 아무래도 손녀딸 봐주면서 신경을 쏟아붓고 해야 슬픔을 조금 잊지 않겠어요. 그래서 우리도 같이 부산에 왔지요.
선호 방은 우리가 부산 내려오면서 지가 쓰던 유품이랑 옷이랑 해서 넣어놓기는 했어요. 근데 죄짓고 미안한 마음이 있어 가지고 잘 못 들어갑니다.
이거는 선호가 잘 입던 옷인데 날도 더운데 맨날 이거를 입고 댕겼어요. 내가 ‘니 비니루(비닐) 그런 거 와 입고 다니노’ 놀리고 그랬지요. 지 쓰던 전공책이랑 어릴 때 불던 리코더도 있고요. 이거 선호가 부두 갈 때 쓰던 시계는 아직도 아침 7시 20분에 알람 울려요. 항상 마음이 그렇죠. 아들놈이, 있던 놈이 없어졌는데. 그것도 다 커 갖고.
사고 나기 전에는 내도 솔직히 산재에 대해서 신경 많이 못 썼습니다. 대한민국 어느 부모가 ‘내 자신이 일하는 데서 죽거나 다쳐서 오면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하고 살겠어요. 뉴스 나오면 남의 일이죠. 그러다가 이게 어느 날 갑자기 내 가족이 피해를 당하면 내 일이 되더라는 거죠.
다음 주 토요일에 서울에 가요. ‘다시는’산재 피해자 유가족 모임에 가입을 했는데 거기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하거든요. 평일에 하는 거는 내가 직장생활 때문에 참석을 못 하는데 토요일에 하는 거는 내가 미안해서라도 가지요.
피곤하다, 멀다 그렇게는 생각을 안 합니다. 절대 우리와 같은 아픔을 가지는 가족들이 다시는 이 세상에 생겨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요. 선호 사고 때 정말로 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겠어요. 정말로 그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우리 자식 이름을 사회에다 알렸을까 싶어요. 그게 너무 고마워서 정말로 그때 나처럼 이런 일을 당해서 실의에 빠진 사람들 있으면,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가려고 합니다.
선호 1주기2022년 4월 22일 때 납골당 갔다가 장례식장에 들렀어요. 그때 염하시던 분하고 주방 일 보시던 분하고 다 불러가지고 감사 인사를 전했는데 그분들이 안 그래도 선호 생각이 나셨다는 거예요. ‘오늘 걔 일 년째 되는 날인데’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장례식장 사장님한테 내 번호를 주면서 ‘혹시라도 산재사고로 장례식장 와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 연락처 주이소, 내가 그 사람들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랬어요.
내는요, 아무 때나 어느 매체 기자가 됐든 간에 인터뷰에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부산에 온다 카믄 시간을 내고요. 그 사람이 필요하다꼬 하면 내가 서울 올라가서라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물론 그래요. 우리 아 산재 사망사고 이후에 최초라는 수식어란 수식어는 다 달았어요.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하고 회사 사측이 100퍼센트 자기들 잘못 인정했고요. 장례식장에 고용노동부노동부 장관, 법무부 장관, 심지어는 대통령까지도 왔었고요. 그래서 ‘내 새끼 죽고 나서 애비로서 내가 할 건 다 했다’ 그랬어요. 그렇다고 해서 죽은 놈 살아오는 건 아니지만은.
그런데 다른 사고들 보면 정말 너무하더라고요. 아직도 김용균 같은 경우는 사측이 잘못이 없다고 하고 어떤 회사는 심지어 유가족들한테 ‘지 잘못으로 죽어놓고 우리한테 뭐라고 하냐’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겁니다. 어떤 건설사는 형사조정안으로 1억 원으로 합의 보라고 하니까 그것도 안 하겠다고 소송을 걸고요. 그리고 대한민국 공무원들은 사업주보다 더 나쁜 놈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일 똑바로 했으면 사업주들이 저래 얼렁뚱땅 해겠냐고.
내 같은 경우는 (작업반장으로서) 사고 현장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사측이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 반박했죠. 사측이 처음에 우리 아들 ‘안전모 안 썼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래, 우리 아들 안전모 안 썼다, 그래서 우째라고. 너거 CCTV 한 번 돌려봐라, 어디 안전모 쓰는 놈이 한 놈이라도 있나. 너거 안전관리하는 직원들도 안전모 안 쓰고 댕긴다. 안전모 안 쓴 놈 회사에서 일해도 좋다꼬 들여보내놓고 사고 나니까 안전모 안 썼다 카는 거, 그거 너거가 할 소리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번엔 사측이 또 ‘안전관리자가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러더라고요. 선호한테 사고 당시에 일 시킨 그 젊은 직원 누군지 내가 알거든요. 내가 가보다 현장 더 오래 있었는데 가는 안전관리자 아니에요. 정진기업(동방의 하청업체) 직원이지. “가가 무슨 안전관리자고, 가는 그냥 잡부다” 그랬어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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