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수업은 금요일 오후 세시 삼십분에 시작했다.
짧은 커트 머리에 갈색 뿔테안경을 쓴 그녀의 얼굴은 얼핏 보면 강사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한 편이었다. 영문과 전공수업은 전부 영어 강의여서 그녀는 영어로 수업을 소개했다.
“이 수업의 목표는 영어로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한국어 억양이 강하게 드러나는 영어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원어민처럼 영어로 말할 수 있는 학생들이 섞인 강의실에서 한국어 억양이 강한 영어로 수업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일지 어림하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분명하게 말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조금 크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아무것도 놓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강의 소개를 끝내고, 학생들의 질문을 받았다. 영어가 유창한 학생들이 가장 먼저 질문을 했다. 그녀는 학생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는 한번 더 말해달라고 요청하고는 성실하게 답했다. 금요일 오후 수업이어서 수강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채로 강의실에 들어갔지만,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고 한국어 억양이 강한 영어로 또박또박 자기 생각을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 질의응답이 끝날 무렵에는 내가 그녀의 수업을 좋아하게 될 거라는 희미한 예감이 들었다.
수업은 매시간 그녀가 선정한 영문 에세이를 읽고 A4 용지 한 장 분량의 에세이를 제출하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읽어야 할 책의 양이 많은 탓에 수강신청 정정 기간 동안 많은 학생들이 빠져나갔고, 결국 수강생은 열댓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첫 번째 수업시간에 우리는 조지 오웰이 버마에서 경찰관으로 일했을 때 쓴 에세이를 읽었다. 그녀는 에세이를 한 줄 한 줄 따라 읽어내려가며 강독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그 수업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시멘트에 밴 습기가 오래도록 머물던 지하 강의실의 서늘한 냄새, 천원짜리 무선 스프링 노트 위에 까만 플러스펜으로 글자를 쓸 때의 느낌,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작은 강의실에 퍼져나가던 울림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고른 에세이들도 좋았고, 혼자 읽을 때는 별 뜻 없이 지나갔던 문장들을 그녀가 그녀만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도 좋았다. 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 언어화될 때 행복했고,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곤 했다. 가끔은 뜻도 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다. 너무 오래 헤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09년 2학기, 구 년 전 그때 나는 스물일곱의 대학교 3학년 학사 편입생이었다.
사 주 차 수업시간이었다. 그날은 생리한 지 사흘째가 되던 때였다. 나는 생리 첫째 날과 둘째 날에 피의 양이 많은 편이었다. 보통 셋째 날이 되면 쏟아져나오는 경우는 드물었고, 넷짜 날이 되면 피의 양이 미미해졌다. 은행에서 일할 때는 일이 몰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갈 수 없어 탐폰을 이용했는데 공중화장실에서 탐폰을 사용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약을 먹어야 할 정도의 생리통은 늘 있었지만, 피의 양 때문에 생활에 지장을 받은 적은 없었다. 문제가 생긴 건 편입을 할 즈음이었던 것 같다. 갑작스럽게 피가 쏟아져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매번 조심했지만, 그날은 사흘째였고, 수업 직전에 생리대를 갈아서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휴식시간이 없는 세 시간짜리 수업이었고, 나는 청바지에 짧은 남방을 입고 있었다. 수업이 반 정도 지났을 때 바지에 피가 새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학생들과 뚝 떨어져서 맨 뒤쪽에 앉은 탓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바지를 가릴 외투도 없어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나머지 시간을 견뎠다.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다 젖어서 차가웠다. 수업이 끝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학생들이 전부 바깥으로 나갔고 강의실에는 나와 그녀만 남았다. 나는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나를 분명히 도와주리라는 믿음을 품고 그녀를 불렀다.
“선생님.”
처음에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몇 번 더 부르고 나서야 그녀는 내 쪽을 봤다.
“저, 갑자기 피가 너무 많이 나와서……”
나는 일어서지 못하겠다는 표시를 했다. 그녀는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자신의 검은 재킷을 벗어줬다.
“우선 이거라도 둘러봐요.”
나는 일어나서 그녀가 준 재킷을 허리에 둘렀다. 일어나보니 나무 의자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몇 번이나 물티슈로 의자를 닦고, 닦은 휴지를 학교 앞에서 받은 광고 팸플릿으로 말아 가방에 넣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집이 어디예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이촌동이요.”
“그럼 우리집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요.”
그녀는 나를 보고 그렇게 말하면서 미소 지었다. 그 순간 그녀가 얼마나 가깝게 느껴졌는지 나는 기억한다.
“걸어서 십 분 거리, 금방 가요.”
나는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강의실에서 봤을 때보다도 더 왜소했다.
“오늘이 셋째 날이어서 방심하다가…… 아까 오후까지는 괜찮았거든요.”
“희원씨라고 했죠?”
“네.”
“그럴 때가 있잖아요. 신경쓸 것 전혀 없어요. 나도 한 번 그런 적 있었는데……”
그녀의 집으로 가면서 우리는 생리를 하다 겪은 곤란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강의실에서 느꼈던 혼란스러움이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조금은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피 묻은 바지를 갈아입기 위해 개인적으로 처음 이야기해본 강사의 집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녀의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그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저번주에 낸 에세이 재미있었어요.”
그 말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언급한 에세이는 내가 은행에서 스물넷부터 스물여섯까지 일하면서 받았던 인상을 간략하게 스케치한 글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대학에 왔군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보았다. 마치 우리가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듯이, 내가 은행에 들어가기 전부터도 알던 사이였다는 듯이.
“길을 바꾸기 어려웠을 텐데, 멋지네요.”
그녀의 집은 오층에 있는 꽤 널따란 원룸이었다. 싱글 침대와 삼 인용 가죽소파, 옷장, 싱크대에 붙은 이 인용 식탁, 큰 책상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책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옷장에서 운동복 바지와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팬티가 든 상자를 꺼냈다.
“새 팬티라 한번 세탁해야 하는데, 어쩔 수가 없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 앞에서 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그녀가 건넨 것들을 받아들고 화장실에 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그녀는 내 쪽을 보더니 “바지가 깡총하구나. 그게 그나마 제일 긴 바지인데”라고 말하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차 마실래요? 페퍼민트랑 루이보스 있는데. 초콜릿도 있어.”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그렇게 용건만 보고 나가는 것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나는 쭈뼛거리며 식탁으로 다가가 앉았다. 한입에 마실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루이보스 차를 마시고 냉동실에서 꺼내 차갑고 딱딱한 다크초콜릿을 먹으며 우리는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곳에서 나는 그녀가 박사학위를 받은 지 삼 년이 되었으며, 전공수업은 이번에 처음 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도 그녀에게 은행에 다닐 때의 이야기를 했다. 은행에서 일할 때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녀는 상체를 내 쪽으로 내밀고 앉아서 중간중간 맞장구를 치거나 질문을 던졌다.
“늘 궁금했어요.”
내가 말했다.
“뭐가요?”
“사람이요. 저 사람 왜 저래? 그러면서 혼자 생각하는 거예요. 정말 왜 저럴까. 응대하다보면 개인적으로 얘기해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어요.”
“호기심이 많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앞으로도 몇 번은 더 볼 표정. 그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흘겨보면서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듯, 웃기는 사람이라는 듯 짓궂게 미소 짓는 얼굴.
나는 재미있는 사람도, 웃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나는 비정규직 은행원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다이어트가 필요한 어린 여자애였으며, 누군가에게는 일을 처리해줄 기계였고, 누군가에게는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감정도, 생각도, 느낌도, 자기만의 언어도 없는, 반격할 힘도 없는 인형이었으니까. 나는 얼떨떨한 마음에 웃어 보이고는 이제 그만 집에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선생님 재킷은 세탁해서 다음주에 드릴게요.”
“그럴 필요 없는데. 그게 마음 편하면 그렇게 해요.”
내가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나갈 채비를 하자 그녀가 물었다.
“원래 이촌 살았어요?”
“아니요. 원래는 안양 살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용산 쪽에서 살기 시작했어요.”
“그렇군요.”
나는 그녀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그다음날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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