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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의 힘
대영제국이 북미 대륙에 처음 자리를 잡는 과정은 험난했다. 캐나다 최동단에 있는 뉴펀들랜드섬의 세인트존스에는 1583년 8월 5일에 “그의 군주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름으로 새로이 발견한 이 땅을” 점유하고 “그럼으로써 이곳에 영국의 해외 제국을 세운” 험프리 길버트 경의 상륙을 기념하는 현판이 있다. 이 현판을 보면 길버트 경이 자신의 업적에 큰 성취감을 느꼈을 것이고 런던으로 돌아가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자신을 떠받드는 사람들 속에서 여생을 보냈으리라 자연스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현판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길버트 경은 그로부터 35일 뒤 고국으로 돌아가던 중 바다에서 영원히 실종되었다.
영국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길버트 경의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이부동생인 월터였다. 이부형이 익사한 당시 월터는 겨우 29세였지만, 이런 젊은 나이도 아랑곳없이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의 형 길버트가 죽기 전 계획하고 자금을 조달했던 대서양 건너 땅의 탐험을 이어서 완수하도록 그에게 칙허를 내렸다. 길버트가 바다에서 실종된 지 막 여섯 달이 지났을 때, 여왕은 월터에게 “외딴 이교도와 야만인의 땅, 나라, 영토 중 그 어떤 기독교도 군주도 소유하지 않은 곳을 찾아내고 수색하고 발견하고 살펴볼” 권리를 부여했다. 결국 월터는 여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어 1580년대 중반 여왕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가 ‘월터 롤리 경’으로 알려진 것은 이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롤리에게 맡긴 임무는 식민지를 세우라는 것, 여왕의 표현으로는 “월터 롤리의 재량에 따라 그곳에 거주하거나 남아 있으면서 건설하고 요새를 만들라”라는 것이었다. 롤리가 직접 북미에 간 적은 없지만, 1587년에 그가 보낸 원정대가 식민지를 건설했으니 그곳이 바로 현재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다. 그러나 원정대는 거기 ‘남아 있지’ 않았다. 남녀노소 총 100명이 넘는 몇몇 가족이 그곳에 정착하여 로어노크 식민지를 세웠지만, 이 개척자 주민들이 비옥한 아메리카 땅에서 먹고살아 보겠다고 떠난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 잉글랜드에서 배를 타고 그곳을 찾아간 이들은 그곳에서 거주 중인 사람을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땅에는 어떤 고난이나 투쟁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오늘날까지도 그곳 주민들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로어노크가 지금도 ‘잃어버린 식민지’라 불리는 이유다. 식민지 주민들이 사라져버린 이 수수께끼 같은 사실을 설명하려는 여러 가설 중에는 그들이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항해하다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설, 혹은 그 지역에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함께 살기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두 주장을 뒷받침할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없다.
1990년대 말에 로어노크 식민지의 실패 원인을 설명할 만한 흥미로운 증거가 등장했다. 어느 연구팀이 버지니아주 남동부에 있는 몇백 년 된 사이프러스 나무들의 나이테를 들여다보다가, 로어노크 식민지가 사라진 3년의 기간 동안 그 지역이 800년 만에 찾아온 혹독한 가뭄에 시달렸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시기에는 극단적인 식수 부족 때문에 주민들이 살아남기가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데이터를 확보한 과학자들은 “그동안 로어노크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어설픈 계획 수립, 부족한 지원, 자신들의 생명 유지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무관심으로 비판받았지만. (…) 나이테를 이용한 기후 복원 정보에 따르면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우고 지원을 충분히 받은 식민지라도 1587~1589년 사이에는 기후 조건 때문에 크나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960~1970년대에 사회심리학자들은 여러 실험을 통해 외부에서 지켜보는 관찰자는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본 관찰자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거짓말을 했을 것이 분명할 때조차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은 성격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인격만 비판할 뿐 실제로는 맥락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로어노크 식민지에서 일어난 일을 평가할 때도 이런 식의 귀인 오류가 일어나, 식민지 주민들의 죽음은 가뭄이라는 상황 요인 때문에 보는 게 가장 합리적인데도 주민들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맥락 요인이 행위 당사자의 성격 못지않게 중요할 때조차도, 인류에게는 사람이 처한 맥락보다는 사람 혹은 행위 당사자의 영향력을 알아보기가 훨씬 더 쉬운 모양이다.
물론 로어노크 식민지의 실패를 순전히 기후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잘못이다. 로어노크 식민지가 생기고 그리 오래되지 않아 건설된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주민들 역시 그 지역에 750여 년 만에 닥친 최악의 가뭄을 겪었음에도, 그 식민지는 (비록 가까스로지만) 살아남아 80년 넘게 버지니아 식민지의 수도 역할을 이어갔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역사적 사건들을 식민지 주민들의 성격 아니면 그들이 처한 상황 중 하나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사람들과 그들이 처한 맥락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편이 낫다. 어떤 일이 전개된 이유를 이해하려 할 때 여러 요인이 각자 역할을 해서 결과를 만들어냈음을 인지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아메리카 식민지가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사람과 상황의 어떤 필수적 조합이 필요했던 것이다.
본성 대 양육 대결의 종말
이 책은 인간이 어떻게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는지에 관한 책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말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이 말을, 사람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부모 밑에서 한 경험에 따라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지가 결정된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서 부모가 물려준 DNA 분자들도 우리에게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생물학적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함께 영향을 미치는 경험과 DNA는 각각 양육과 본성에 해당한다. ‘본성과 양육’은 이론가들이 늦어도 1582년부터, 그러니까 길버트가 뉴펀들랜드를 영국 국왕의 땅으로 선언한 바로 그해부터 줄곧 논쟁했던 개념이다. 1582년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큰 학교의 교장이었던 리처드 멀캐스터가 교육에 큰 영향을 끼친 《기초 교본Elementarie》이라는 책을 출간한 해이기도 한데, 이 책에서 멀캐스터는 ‘본성’과 ‘양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어린이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설명했다.
(…)
이제 후성유전학은 생물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했고, 후성유전학자들의 새로운 발견은 종양학, 영양학, 심리학, 철학 등 여러 다양한 학문 분야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의 DNA 위에 있는 혹은 DNA에 달라붙은 뭔가이를 ‘후성유전적 표지’라 부른다가 실제로 존재하며, 이들이 DNA가 기능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이유로 후성유전 과정은 우리의 거의 모든 특징에 영향을 미친다. 아직은 과학자들이 후성유전적 표지에 관해 알아야 할 사실들을 막 알아가기 시작한 단계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확실히 획기적이다. 경험그리고 우리가 처한 환경 속 여러 상황이 일부 후성유전적 표지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일란성 쌍둥이 사이의 차이, 식생활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어머니의 행동이 성인이 된 자녀의 스트레스 상태에 미치는 영향 등 아주 다양한 것들을 후성유전적 표지로 설명할 수 있다. 후성유전학의 이런 발견들은 본성 대 양육 논쟁을 뿌리째 뒤흔드는 데 일조했다. 요컨대 후성유전적 사건들은 DNA와 환경의 접점에서 발생하므로 이를 알면 우리의 특징들이 언제나 본성과 양육 두 가지 모두의 결과라는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식민지 주민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 두 가지 모두가 최초의 아메리카 식민지의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했던 것처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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