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 조선인 대학살의 진실을 밝히다
― 강덕상
운명의 날인 1923년 9월 1일.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는 새벽부터 세찬 비가 내렸다. 10시경 비가 개면서 불볕더위가 시작되었다.
이날도 고학생으로 유학 와 있던 『아리랑』의 주인공 장지락은 도쿄 어딘가에서 노동을 하며 점심때가 다가오니 시장기를 느꼈으리라. 훗날 〈까치까치 설날〉과 〈반달〉을 작곡한 윤극영은 도쿄의 동양음악학교에서 공부에 골몰하고 있었을 게다.
시각은 11시 58분 44초. 진도 7.9로 가나가와현神奈川県에서 가까운 사가미만相模湾이 진원지인 대지진이었다. 이런 강진은 처음이었다. 초기의 미동은 12.4초간이었고 격동은 10분 동안 계속되었다. 도쿄의 조선YMCA 총무였던 최승만은 이렇게 기억한다.
아침을 아무렇게나 한술 뜨고 메지로目白역에서 간다神田역 방면으로 가던 중 신주쿠新宿역에 거의 다다랐을 때 전차가 별안간 펄떡 뛰기를 되풀이했다. 승객의 얼굴은 핼쑥해지고 불안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렇게 수십 분, 차 속에서 내다보이는 3, 4층 집에서는 연기가 자욱이 솟아 오른다. 비로소 지진임을 안 나는 차에서 내려 사무소로 가보았다. 콘크리트 땅바닥이 금이 가서 다니기가 어려웠고 역장 이하 사무 보는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최승만의 회고처럼 지진은 격렬했다. 밥상이 불쑥 솟아오르고 집이 흔들리고 지붕이 춤추며 전선이 윙윙댔다. 기와가 떨어지고 담벼락이 무너져 내렸다. 나무가 흔들리고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걸어야 했다. 흔들림이 조금 가라앉기 무섭게 사방팔방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피운 풍로와 아궁이의 불씨가 사방으로 번졌다.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온 도시를 사로잡을 듯 타올랐다. 도쿄에서만 187곳에서 불이 났고 바람마저 강해 검은 연기는 사방을 뒤덮고 거대한 화마는 하늘까지 집어삼킬 기세였다.
급기야 혼조本所의 육군 피복창에서는 3만 8,000명이 불에 타죽었다. 불길을 막아 줄 어떠한 방어막도 없었던 탓이다. 불에 타 떼죽음을 당한 곳은 이외에도 다나카田中 중학교 등 여러 곳이 있었다. 집계를 해 보니 무너진 집이 12만 호, 완전히 불타 버린 집이 45만 호,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10만 명이 넘는 재해였다. 통신시설은 망가지고 도쿄에서는 63개의 경찰서 중 25개소가 불에 타거나 무너졌고 경시청마저 불길에 휩싸였다. 이재민의 울음소리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배고프다고 어린이는 아우성쳤고 다친 사람의 신음 소리가 애를 끊게 했다. 도쿄와 요코하마 등 간토 지방은 죽은 사람이 9만 명이 넘고 이재민이 340만 명에 이르는 죽음의 도가니였다.
문제는 이때 6,661명이나 되는 조선인과 700여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 100년이 지났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죽음에 사과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유언비어에 흥분한 자경단원이 저지른 일이고 일본인 희생자도 있다며 진상규명조차 외면하고 있다. 강제연행과 강제징병,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대하는 태도처럼 간토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서도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일본의 뜻대로 사건은 묻혔을지 모른다. 오래된 일이고 증거자료 또한 일본에 있으니 한국에서 접근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일사학자 강덕상이 있었다. 그는 1975년에 발간된 『관동대진재』와 이를 보완해 2003년에 펴낸 『학살의 기억, 관동대진재』이하 『학살의 기억』 등을 통해 조선인 대학살에 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세상에 고발했다. 그의 연구는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담고 있었다.
첫째, 진도 7.9의 대지진이라 해도 자연재해인데 왜 계엄령이 발동되었는가? 둘째, 조선인 학살을 조장한 유언비어는 어디서 나와 어떻게 전파되었는가?였다. 일본 정부는 감추려 하고 일본의 역사학계에서도 자신들의 치부이기에 머뭇거렸지만 강덕상은 정면으로 다가섰다. 그의 연구와 삶은 이 의문에 대해 답을 찾는 순례의 길이었다. 그 여정에서 강덕상은 소중한 결론을 얻었다.
간토 조선인 대학살은 결코 흥분한 자경단이 벌인 예상치 못한 범죄가 아니라는 것.
수백만의 이재민이 반정부투쟁에 나설까 두려워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権兵衛 내각이 직접 ‘조선인 습격설’을 퍼트리고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것.
이것이 간토대학살의 진실임을 강덕상은 사료와 연구를 통해 밝혀냈다.
발동된 계엄령, 타깃은 조선인
지진이 일어난 9월 1일,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는 그날 밤 충격을 수기로 남겼다.
자동차로 관저를 출발하여 간다교神田橋에서 스다초須田町 우에노上野 방면으로 갈 작정으로 간다교를 지났지만 앞쪽 길에서 화염이 넘실거려 그 열기를 견딜 수 없어 할 수 없이 자동차를 버리고 걸어갔다. 거리의 상황을 보니 너무나 엄청난 재해인 것에 놀랐다. 도쿄 시내의 쌀 창고도 거의 불타버렸고 후카가와의 육군 미곡창도 화염에 휩싸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렇게 현장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는 식량창고가 불탄 것에 주목한 듯싶다.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츠시赤池濃도 “나는 천 가지, 만 가지로 생각해도 이번 재해가 너무 심해 어떤 불상사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염려했다”라고 했다. 도쿄의 치안 책임자인 두 사람은 지진으로 고통받는 일본 민중이나 조선인의 구제보다는 일왕의 안전과 체제의 보호만이 관심사였다. 실제로 아카이케는 지진 직후 궁궐로 달려가 섭정히로히토의 옥체를 배알하고 “무사하신 모습을 뵙고서 감격을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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