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개념 잡기
“국민이 다스리는 나라”
흔히 민주주의라고 쓰는 단어는 현대에 만들어낸 기술적 용어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사용되어온 역사적 개념이다. 즉 명확한 의미를 갖도록 특정 분야 전문가들이 서로 합의하여 세세하게 규정한 과학적·객관적 용어가 아니라, 오랫동안 온갖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온 복잡한 개념이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술적 용어가 아닌 역사적 용어의 경우, 같은 단어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어느 정도의 핵심적 유사성은 갖지만 구체적으로는 의미가 상당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라면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 모두 밀가루 면 요리를 뜻하지만, 국가별·지역별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과 일본의 ‘라멘’이 다르듯, 그 미묘한 차이는 실제로는 매우 큰 차이일 수도 있다. 민주정도 마찬가지다.
연원을 따져보면, 서로 비슷하게 영어로 democracy, 프랑스어로 démocratie, 이탈리아어로 democrazia, 독일어로 Demokratie로 쓰는 이 개념은 그리스어 dēmokratiā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흔히 인민으로 번역되는 데모스dēmos와 통치로 번역되는 크라토스kratos가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이 어원을 따르자면 인민이 통치하는 것이 데모크라티아, 즉 민주정·민주주의인 것이다. 이 단어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정에서 인민이 하는 일이 투표가 아니라 통치라는 점이다. 인민이 통치하는 민주정이란 인민이 대표를 뽑고 뒤로 물러나는 정치체政治體가 아니라 스스로 국사에 관여하는 정치체다.
여기서 국민國民과 인민人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현재 용법대로의 국민은 영어와 프랑스어의 nation에 해당하는 단어를 일본에서 19세기에 번역한 말인데, nation은 민족으로도 번역된다. 인민은 영어의 people, 프랑스어의 peuple, 이탈리아어의 popolo에 해당하는 개념을 번역한 것으로, 역시 일본에서 탄생한 조어다. 냉전 상황에서 북한이 공식적으로 인민이라는 단어를 애용하다보니 우리 사회는 그 단어를 피하고 국민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쓰고 있다.
그러나 국민은 국가의 존재를 전제한 다음에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인 반면, 사회나 국가가 형성되기 전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인민이다. 따라서 국가가 존재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형성하는 권리, 또는 정부나 헌법의 상위에 있는 결정권이라는 뜻의 주권主權을 이야기할 때는 국민보다 인민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더 정확하다. “국민이 모여서 합의한 끝에 사회를 창설하고, 그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국가를 형성했다”는 문장은 성립이 안 되지만, 이 문장에서 국민을 인민으로 바꾸면 말이 된다. 인민은 국민, 신민, 시민보다 더 근본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렇다보니 학자들이 강연회에서 자연스러운 학술어인 인민을 사용하다가 청중으로부터 “당신 사회주의자 아니냐”는 냉전기를 연상시키는 불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특정한 국가에 소속되어서 그 나라 실정법의 통치를 받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국가 성립 이전의 개인과 군중을 포괄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계약, 주권, 통치에 얽힌 온갖 역사적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필자는 우리에게 더 익숙한 국민 개념을 잠시 옆으로 밀어놓고, 다소 낯설더라도 더 정확한 인민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전제와 사유의 굴레를 벗어던질 필요가 있다. 특히 서양에서 민주 개념에 새겨져 있는 민과 주의 뜻을 풍부하게 맛보려면 냉전 이데올로기에 속박된 언어습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민주정, 민치정
한발 더 나아가보자. 오늘날 우리는 손쉽게 민주주의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서양어에서 dēmokratiā와 그 파생어들은 어떤 이념이나 이론체계‘~주의’가 아니라 정부형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보다 민주정이 개념의 원래 의미에 더 가까운 말이다. 또한 dēmokratiā와 그 파생어들은 인민이 주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지 않다. 앞서 말했듯 그 단어들은 인민이 통치함을 뜻한다. 즉 번역에 수반되는 필연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최대한 뜻을 정확하게 옮기려면 민주주의도 아니고 민주정도 아닌 민치정民治政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와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버리고 민치정이라는 말을 쓰자고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제안일 것이므로 이 책에서 dēmokratiā는 민주정이나 민주주의로 새길 것이다. 하지만 그 단어의 서양 원어에 담긴 뜻은 민‘주’가 아니라 민‘치’라는 점을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기억해낸다면, 민주주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치治와 주主의 차이, 즉 인민이 국가를 통치하는 것과 인민이 국가의 주인인 것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국가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국가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운영과정에서 소외되고 실제 결정권은 갖지 못한 채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기만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②공화주의, 자연법, 자연권, 투표와 같은 정치이론과 제도가 발전해가는 속에서 유독 민주주의만이 오랜 세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차이를 알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민주정은 인민이 통치하는 정부형태이다. 이것은 서양어의 뜻에 가장 잘 들어맞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규정한 것이다. 즉 개념적으로 민주주의는 1명의 군주나 소수의 귀족이 아닌 다수의 인민이 국가를 다스리는 경우를 가리킨다. 군주 1인이 통치하는 정부형태를 군주정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왕좌는 보통 혈연관계에서 세습되지만 반드시 혈통에 따라 세습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소수의 귀족이 통치하는 정부형태를 귀족정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통치하는 귀족집단에 소속될 권리 역시 반드시 혈통에 따라 세습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처럼 세습이라는 요소가 필수적이지 않다면, 귀족정과 민주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근대 이전까지 이 두 개념은 투표와 추첨으로 구분되었다. 귀족정은 뛰어난 사람들을 투표로 선출해서 통치하게 만드는 것이고, 민주정은 능력에 상관없이 인민 중에서 추첨을 통해 관직에 앉을 사람을 고르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