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 해설
배움이 다시 우리의 ‘희망’이 되려면
이반 일리치의 책을 처음 접했거나 그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독자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교육의 고질적 문제인 주입식 교육과 획일화 교육, 그리고 지독한 입시 경쟁에 문제의식을 가진 독자라 해도, 학교를 넘어서 아예 오늘날의 ‘교육’education과 ‘가르침’teaching이라는 행위 자체를 격렬히 비판하는 일리치의 논지는 꽤나 낯설고 거칠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이 처음 나온 1971년 시점에 주로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을 예로 들어 서술한 부분들에는 이입하기가 더 어려운 듯하다. 어쨌든 이후 50년 동안의 변화와 발전으로 전 세계 교육 상황은 한결 나아진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찬찬히 따져보면 일리치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그다지 어긋남이 없어 보인다. 그의 논점은 크게 두 가지다. 의무화된 학교교육 또는 제도교육이 첫째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고, 둘째는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오늘의 현실에 비춰 잠시 생각해보자.
불평등의 심화, 자유의 억압
보편적 의무교육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대다수 교육자들은 여전히 학교가 기회의 사다리를 제공하며 사회적 평등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보편과 평등의 원리 위에 세워진 근대의 공교육이 이제는 졸업장과 성적에 의한 등급 매기기 제도로 변질하여 기존의 불평등을 추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현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즉 교육이 기회의 사다리를 놓아주기는커녕 부모의 부와 능력에 힘입어 경쟁의 좁은 문을 통과한 이들에게만 사회적 기회를 부여하는 선별적 통과 의례가 되었다는 얘기다. 교육은 이제 빈부격차를 더욱 벌리고 ‘부의 대물림’을 정당화하는 절차로 기능한다. 세계 어느 나라나 이런 상황은 비슷하거니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한국의 학교교육은 수월성秀越性이라는 이름 아래 쭉정이 골라내기 교육이 되어, 한편으로는 능력주의 사회의 탈락자들을 양산하는 기능을 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입시 경쟁을 위한 엄청난 사교육비―성공 확률이 희박한 도박판의 판돈 같은―로 가정 경제를 갉아먹는 주범이 되었다. 하지만 ‘능력’ 혹은 ‘수월성’이란 무엇인가? 학생의 학업 능력이 대개는 고학력의 부유한 부모에게서 이전된 능력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불평등 구조가 예전의 가정교육 같은 사적 영역이 아닌 학교교육이라는 공식적 절차를 통해 고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오늘날의 교육제도는 다른 측면에서도 불평등을 심화하는데, 모두가 공평하게 내는 세금이 고등교육이나 특정 대학 등에 주로 지원됨으로써 선택된 일부에게 더 많이 쓰이는 것이 그러하다. 이런 특혜가 ‘뛰어난 인재 양성’이라는 명분대로 사회 전체의 자산으로 환원될까? 부의 재분배 시스템이 원래 허약한 사회에서 교육은 그 자체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 더 큰 빈부격차를 생산하며, 그 격차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봉사하기까지 한다.
또한 의무화된 학교교육은 자유로운 배움의 기회를 빼앗는 역할도 한다. 한국의 경우를 보자. 1만여 곳에 이르는 전국 초·중등학교에서 5백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교육부가 편성한 ‘교육과정’에 맞춰 똑같은 것을 공부하는 모습은 차라리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각자의 미래를 위해 써야 할 시간과 비용을 제도화된 교육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입시 경쟁의 수단밖에 되지 않는 이 획일적 교육과정 아래서는 창의성 없는 순치된 시민들만 배출될 것이다. 학교 졸업 후에는 한 번도 쓸 일이 없는, 시험 치르는 데만 필요한 지식을 위해 우리는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고 자유로운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제도교육이 강제적이고 획일화된 교육과정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시민의 창의성보다는 기존 시스템에 끼워 맞출 수 있는 부품을 공급하는 것이 국가와 경제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필요성을 입증이라도 하듯 한국의 새 정부는 교육부를 경제부처의 하나로 생각해야 한다면서 ‘고등교육정책실’을 ‘인재정책실’로 개편하려는 중이다. 인간을 산업 시스템에 갈아 넣는 일개 자원으로 보고, 배움이란 것 역시 인격의 완성이나 문화 발전의 토대가 아니라 국가경제 성장을 위한 기능적 수단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단화된 교육, 개인 편차를 고려하지 않는 획일적 교육과정, 불평등만을 재생산하는, 가르치기 위해 가르치는 교육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무려 50퍼센트에 이른다는 미국 공립학교 중퇴율이 그 증거다. 이유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학생들은 학교교육이 자기 삶에 별로 쓸모가 없음을 이미 깨닫고 있는 듯하다.
이반 일리치는 현대 교육이 가진 이런 문제점이 본질적으로는 강제적이고 의무화된 학교교육 시스템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본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과 비용을 강요하지만 기회는 달리 배분하는 교육이 불평등을 심화하고 시민적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문제는 역시 의무교육을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한국은 특목고, 자사고, 대학 서열화 등으로 교육의 불평등 구조를 아예 노골적으로 제도화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이 책이 더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을 다시 출간하기까지
일리치의 『학교 없는 사회』가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1970년대 말부터 다섯 차례에 이른다. ‘탈학교 사회’ 또는 ‘학교 없는 사회’로 제목을 바꿔가며 출간되었는데, 2009년에 또 한 번의 번역이 나온 것이 마지막이다. 그간의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이렇게 지적한 2009년의 번역이야말로 숱한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하지만, 이 책이 이렇게 여러 번 번역된 데는 교육 문제에 대해 그만큼의 절실함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옮긴이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1980년대이다. 당시 대학가에서 이 책은 거의 베스트셀러에 준할 만큼 읽혔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국민교육헌장」이라는 포고문에 표현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그 위에 수립된 제도권의 획일화 교육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던 때였다. 대학생들은 소그룹별로 ‘의식화 교육’이라는 정치적 대안 교육을 스스로 시도하고 있었고, 소외된 계층을 위한 노동야학이나 생활야학에 나선 학생들에게도 특별한 교육적 지침이 필요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활동들에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는 책들로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비롯하여 이반 일리치의 이 책과 에버렛 라이머의 『학교는 죽었다』 등이 주로 읽혔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관심이 이 책들에 담긴 교육 정신과 철학을 제대로 소화했는지는 의문이다. 교육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보다는 학생, 노동자 등의 정치적 각성에 더 관심이 컸고, 당시의 군사정부에 대한 저항적 의도가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일리치의 책 역시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보다는 다소 방편적인 의도로 읽혔던 것 같고, 프레이리가 주창한 의식화 교육도 정치적 저항의 일환으로 수용된 측면이 컸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교육과 근대의 교육 이념을 거부하고 ‘학교 체제’ 자체를 비판 대상으로 삼은 일리치의 메시지가 얼마나 급진적인 것인지를 알아챈 사람은 많지 않았던 듯하다. 학교가 그렇게 문제라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오히려 학교교육이 적어서 문제 아닌가? 하지만 일리치는 이 책에서 불평등은 학교교육에 내재된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학교를 개혁하거나 해방시키는 것을 넘어 ‘학교로부터 사회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이런 생각은 책 제목에도 잘 드러나 있다. ‘Deschooling Society’라는 원제는 정확하게는 ‘학교교육이 없는’이라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서 ‘사회가 학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적극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못 배운 이들이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학교교육을 받지 않아서’라고 받아들이듯이 학교는 기존의 사회적 피라미드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학교는 그 정도로 강력한 이데올로기이자 통치 제도가 되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런 학교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사회, 곧 ‘학교화된’ 사회 전체를 해방시켜야 한다. ‘deschooling’이라는 단어에 담긴 저자의 진의는 그런 것이었다.
일리치 사상의 얼개
이 책의 주제를 언급하기에 앞서 일리치의 사상 전반을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일리치의 책들은 주제와 주장이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한 책으로 시야를 좁히면 그의 생각을 제대로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이 책에서 저자가 스치듯 언급하는 ‘subsistence’ 같은 단어가 그러하다. 본문에서 ‘이럭저럭 살아가다’로 옮긴209쪽 옮긴이 주 참조 이 단어는 근대 시장경제가 탄생하기 이전에 자급자족적 경제를 일구며 살아가던 전통적 삶을 지칭하는 칼 폴라니의 용어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계획에 따른 삶에 대비되는 인간의 본원적 삶을 강조하려는 일리치의 의도가 배어있다. 또한 ‘education’이라는 단어도 후일의 저서 『그림자 노동』을 보면 좀 더 명확한 설명이 나온다. ‘educatio’에두카티오라는 라틴어 어원은 근대 국민국가 성립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데, 교육학계의 속설처럼 ‘(인간의 가능성을) 끄집어낸다’는 의미의 ‘educat’가 아니라 ‘기른다’는 의미의 ‘educit’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국민을 양육하는 일은 원래 가톨릭교회가 ‘젖먹이’로 여긴 신자들에 대해 자임하던 역할이었는데, 교회의 이런 보호 체제가 근대의 국민교육 체제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본문에서 왜 저자가 학교 제도를 국교 수립establishment에 비유하고 그것의 헌법상 폐지를 주장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일리치의 사상 전체는 이처럼 각각의 책들에 흩어져서 하나의 큰 책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리치를 읽는 데 어려움이 따르는 것도 이 때문인데, 그의 ‘큰 책’에서 몇 가지 주요 개념을 짚어둔다면 이 책과 그의 사상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리치가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주제는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라는 근대적 인간이 탄생한 과정이다. 우리는 근대 문명을 인류 진보의 당연한 귀결처럼 생각하지만, 일리치는 수천 년 인류 역사에서 근대야말로 인간의 본래 삶에서 벗어난 매우 기이한 시대로 본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땅자연이 허용하는 제한조건 안에서 자급자족과 상부상조라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최소한의 행복을 구가하고 자율적 삶을 이어가던 존재였는데, 이런 관계에서 풀려나와 하나의 ‘경제 단위’로서의 인간이 처음 등장한 시대가 근대이기 때문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근간으로 한 자본주의 산업 체제에서 생산-소비에 최적화된 주체가 바로 ‘호모 에코노미쿠스’이다. 표준적 시민으로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주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등가 교환의 기초인 화폐처럼 먼저 언어를 통일할 필요가 있었고, 그 다음으로 보편 교육이 필요했다. 보편 의무교육이라는 근대적 교육 체제는 시작부터 경제적 요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인간을 바라보는 근대 경제학의 관점과도 통한다. 근대의 주류 경제학은 ‘주어진 자원은 희소한데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는 희소성 법칙Law of Scarcity에 근거하여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리치는 이 법칙이야말로 인간을 ‘필요의 동물’로 만들기 위해 꾸며낸 허구에 불과하다고 본다. 인간은 최소한의 도구를 만들어서 스스로 땅을 일구며 생존을 도모하는 존재였고, 또 자연은 적절한 한도 내에서 인간에게 충분히 만족할 만큼의 혜택을 베푸는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필요needs란 산업 체제가 생산한 상품의 소비를 위해 인간에게 원래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불가피한 조건인 양 덧씌운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사실 우리가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생산품들은 그것을 보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필요한지 몰랐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근대 경제학은 이처럼 한편으로는 자연의 희소성,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필요를 지어냄으로써 생산과 교환의 시장경제가 인간에게 본래적인 것처럼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던 것이다.
일리치에게 필요의 경제가 문제인 것은 무엇보다 인간의 자급자족 능력 곧 자연의 혜택에 의지하여 스스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본연의 능력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자급자족subsistence은 시장의 한 요소로 함몰되지 않는 자립적 인간 활동의 물질적 측면을 가리키는 개념이기에 일리치에게 있어 더없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인간의 공동체적 관계 안에 단단히 묻혀 있는embedded 경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와 문화적 맥락에서 뽑혀나간disembedding 시장경제가 성립하면서 교환가치―그것의 표현물이 곧 상품이다―가 인간 삶을 독점하는 체제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상품이 아니면 필요를 충족할 수 없는 불구화된 삶을 극복하고 자립적 삶을 회복해야 한다는 일리치의 주장은 제도 비판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제 제도가 공급해주는 상품과 서비스가 없으면 단 며칠의 생활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학교가 아니면 배울 수 없고, 병은 병원에 가야만 고칠 수 있으며, 차가 없으면 가까운 거리도 이동하기 어렵다는 믿음은 필요의 경제가 만들어낸 허구이다. 이런 신화로 인해 인간의 자립적인 활동은 누추하고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친구들과의 즐거운 오락보다는 TV의 볼거리가 훨씬 자극적 쾌감을 주고, 비닐 포장에 담긴 새 메뉴의 음식이 흙 묻은 식재료로 차려낸 한 끼 식사보다 더 인정을 받는 사이, 우리는 내 손으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특히 학교, 의료, 교통은 인간의 삶을 근대 산업 체제에 포획하기 위한 대표적 제도들인데,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 『의료의 한계』,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등에서 이 제도들의 문제를 통렬히 비판한다.
일리치는 이렇게 우리 삶이 근대 산업 체제에 붙들린 상태를 근본적 독점radical monopoly이라 부른다. 여기서 독점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전문가의 독점이고 다른 하나는 상품의 독점이다.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소비 위에서 작동하는 산업 체제는 필연적으로 그것들을 계획하고 생산하는 자본가들, 관리자들, 전문가들의 독점을 낳을 수밖에 없다. 또한 상품이 필요를 독점한 세상은 곧 우리의 삶이 상품에 의해 점유된 세상이기도 하다. 인간은 상품에 의존하여 삶을 영위하는 존재로 위축되었고, 자율적 삶의 가능성을 상품 생산체제와 생산자에게 헌납한 한낱 소비자 신세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능해진 삶의 양태와 전문가 독점을 다룬 책이 『전문가들의 사회』와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이다.
일리치의 화살은 제도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대량생산과 소비를 통해 자신을 유지하고 끝없는 성장을 도모하지만, 내부로부터의 모순으로 인해 결국 자신을 악화시킬 처지에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역생산성counter-productivity 때문이다. 역생산성이란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이 일정 한도를 넘어서면 포화와 정체를 일으켜서 만족이 오히려 저하되는 것을 말한다. 편리하려고 탄 자동차가 도리어 이동 시간을 훨씬 더 많이 소모한다든지, 최신 기기들에 밀려 간단하고 쓸모 있는 옛 도구들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 그러하다. 이 책에서도 예전의 라디오는 쉽게 고치고 개조하여 쓸 수 있었지만, 복잡한 기능을 가진 최신의 라디오는 한 번 고장이 나면 버릴 수밖에 없는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물론 이 역생산성은 필요 없는 기능까지 패키지로 묶어서 판매하는 상품의 논리 때문이다. 한 번 의존하면 끝까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제도적 서비스 역시 마찬가지다. 즉 역생산성은 단순한 도구적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도시 밀집이 슬럼을 낳고, 고속도로가 유령마을을 만드는 것도 상품과 제도적 서비스가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상이 가난의 현대화modernization of poverty이다. 과거의 가난은 기술의 한계와 자연의 제약 때문에 불가피하게 겪는 것이었고 근근하게나마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정도의 일상적 환경이었다. 반면에 현대의 가난은 상품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겪는 지극히 현대적인 현상이라고 일리치는 말한다. 자급자족의 환경과 능력을 빼앗긴 사람들이 상품과 서비스마저 이용할 수 없는 상태에 처했을 때 현대적인 가난을 겪는다. 그런 점에서 산업 사회는 매우 모순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량생산과 소비로 자연을 끝없이 낭비하면서도,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직접 이용할 수도, 상품을 통해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도 없게 하기 때문이다. 역생산성의 효과 때문에 아무리 필요를 충족해도 사람들은 늘 좌절과 불만의 빈곤한 상태를 견뎌야 한다.
필요의 발명, 상품 독점, 역생산성이라는 효과가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장소는 결국 인간의 삶이다. 일리치는 이와 대비되는 인간 삶의 이상적 형태를 공생공락conviviality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꽤나 어려운 이 단어는 함께con- 즐겁고 활기찬vivere 상태를 말하는데, 일리치는 ‘에우트라펠리아’eutrapelia라는 그리스 어원의 단어로 이 말을 풀이한 적이 있다. 친구들끼리 악의 없는 조롱을 건네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잔치석상의 분위기를 가리키는 말로, ‘절제된 즐거움’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일리치의 관심은 제도에 포획된 인간의 무기력한 삶과 끝없는 욕구의 늪에서 벗어나 인간의 생기 넘치는 실존과 공동체적 삶을 회복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이상의 요약에서 보듯이 우리는 일리치의 관심이 그저 현대 문명을 비판하거나 당장의 정치적 변혁을 꾀하는 데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관심은 무엇보다 인간의 타고난 자율성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인간을 제도화된 상품의 세계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곧 산업적 착취의 대상이 된 자연을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한 점에서 선구적인 생태 사상가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일리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인간을 스스로 성화될 수 있는 존재로 믿었다는 점에서 영성의 사상가라고도 할 수 있다. 신이 선사한 인간의 자유와 자기실현의 소명을 되찾아야 한다는 믿음, 그것이 일리치 사상의 근본일 것이다.
학교, ‘가치’를 독점한 체제
이 책 『학교 없는 사회』를 비롯하여 『깨달음의 혁명』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의료의 한계』 등은 일리치의 저술 생애에서 초기작으로 묶을 수 있는 저작들이다. 일리치는 1970년대에 주로 쓴 이 책들에서 현대의 사회적, 생태적 위기가 동시대의 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고, 학교, 교통과 에너지, 의료 등을 주요 제도로 꼽았다. 이후 일리치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 제도들이 생겨난 역사적 연원에 관심을 가진다. 『그림자 노동』 『젠더』 『H2O와 망각의 강』 등이 그런 저술이다. 공유commons가 파괴되고 인간의 삶과 환경 모두가 산업적 대상으로 바뀌던 중세 말과 근대 초의 변화에 눈을 돌린 것이다. 1990년대 이후 그는 역사적 탐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인의 인식 체계와 사고방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말하자면 현대 제도가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에서 의식의 형성 과정으로 더욱 깊이 들어간 것이다. 이 말년의 시기에 나온 저작들이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와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등이다.
일리치의 이런 저술 생애에서 볼 때, 이 책 『학교 없는 사회』는 단지 학교교육 하나만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책으로 볼 수 없다. 일리치가 학교를 문제 삼은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산업적인 서비스 제도의 생산양식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일리치는 학교의 이런 기능을 ‘가치의 제도화’라는 말로 표현한다.
“학교는 학생들을 ‘학교화’함으로써 배우는 과정과 배움 자체를 혼동하게 만든다. 이렇게 과정과 실질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새로운 논리가 등장한다. 즉 더 많은 처치를 할수록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거나, 단계를 잘 밟아나가면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 이렇게 되면 학생의 상상력마저 학교화되어 진짜 가치 대신 서비스를 가치인 양 받아들이게 된다. 즉 의료서비스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 개선으로, 경찰 보호를 안전으로, 무력에 의한 균형을 안보로, 무한경쟁을 생산적 활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 이 책에서 나는 이런 가치의 제도화가 필연적으로 물리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력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전 지구적인 퇴행과 현대화된 가난이 생겨난 과정에는 이런 세 가지 차원이 있다.”17~18쪽
이 책 첫머리에 기술된 문장은 더 이상의 부연이 필요 없을 만큼 저자의 생각과 이 책의 의도를 잘 말해주는 듯하다. 학교는 ‘배움’이라는 인간의 자율적 활동을 교육의 ‘필요’로 바꾸고 그것을 하나의 서비스 상품으로 판매하는 기업적 제도이다. 학교는 또 ‘숨은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을 통해 사회 전체에 이런 서비스를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로도 기능한다. 즉 제도가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가 아니면 배움도 만족도 얻을 수 없다는 믿음을 사회에 주입함으로써 사회 전반의 숨은 교육과정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일리치는 이런 제도들의 대표적 사례로 교육, 의료, 교통을 꼽는데, 그 이유는 이 제도들이 자기 분야를 넘어서 타 분야에 대해서까지 권리를 주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대 의료는 아이의 폭력적 성향을 빈곤한 생활환경이나 부모로부터 방치된 결과로 보지 않고 그 아이의 병증으로 봄으로써 사회 문제를 개인화하고 의료의 대상으로 삼는다. 마찬가지로 학교 체제는 ‘평생교육’이라든지 ‘부모교육’과 같은 형태로 학교 서비스가 학교 밖에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다.
일리치는 이처럼 학교가 평생의 서비스로 우리 삶을 구원해줄 것처럼 말하는 점에서 과거 종교의 의례와 꼭 닮았다고 한다. “나는 교회 의식에 대한 수요가 한 사람의 일생 너머까지 이어졌던 중세 말을 떠올린다. ‘연옥’이 만들어진 것은 사람들이 영원한 삶에 들어가기 전에 교회의 주재로 영혼을 정화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 지금은 끝없는 소비라는 신화가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을 대체하였다.”96~97쪽 여기서 ‘연옥’이란 말을 ‘필요’로 바꿔서 읽어보자. 교회 의례가 신앙을 대체한 것처럼 학교는 교육과정이라는 일련의 의례적 절차로 배움을 대체하였고, 성직자들이 면죄부 발부의 권한을 행사한 것처럼 교사와 교육 관료들은 졸업장과 자격증 발부의 권한으로 ‘구원’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학교가 이렇게 구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함에 따라 교육에 이용할 수 있는 자금, 인력, 선의를 독점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노동, 여가, 정치활동, 가정생활조차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우리는 학교 서비스에 의존해서만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근본적 독점이란 이런 것이다. 필요의 발명, 근본적 독점,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삶의 질이 오히려 후퇴하는 역생산성, 불평등과 현대화된 가난 같은 산업 체제의 병폐가 학교에 고스란히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일리치가 학교를 무조건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학교를 ‘조작적 제도’가 아닌 ‘공생적 제도’로서 다시 설계함으로써 학교교육의 병폐를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학교가 독점하고 있는 교육자료사물, 기술지도모범, 인적 교류동료, 전문교육자스승를 상호 조력의 네트워크로 엮음으로써 기회의 ‘사다리’를 기회의 평등한 ‘연결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일리치가 구상하는 학습 네트워크는 공생공락의 사회라는 이상과도 통한다. 즉 “교육이라는 연결망이 사람들 각자에게 기회를 열어주어, 자기 삶의 매 순간을 배움과 나눔과 돌봄의 순간으로 바꿀 수 있게 해주는”11쪽 사회 말이다.
프로메테우스적인 ‘기대’에서 에피메테우스적인 ‘희망’으로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일리치는 일종의 결론으로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틀을 제시하고 있다. 일리치가 학교 없이도 풍요로웠던 과거 민중의 삶을 자주 거론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고적이고 퇴행적인 사회관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일리치는 ‘나눔’과 ‘돌봄’이라는 공생공락의 삶을 인간의 최고 가치로 본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우리가 ‘진보적’이라 부르는 복지국가 시스템에도 반대하는데, 복지국가 역시 조작적이고 계획적인 과정을 통해 돌봄을 제도화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일리치는 이런 제도화에 대비하여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일화로 나눔과 돌봄의 정신을 설명한 적이 있다. 누군가의 명령이나 제도적 의무와는 아무 상관 없이 강도당한 사람을 스스로 구하고 돌본 사마리아 사람의 행위는 우리에게 두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인간은 첫째,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의지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존재이며, 둘째, 제도에 의존하기보다는 서로를 돕고 상호 의존함으로써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일리치에 따르면 이런 인간의 가치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진보’의 정신보다는, 자신이 출발한 곳을 되돌아보고 반성 속에서 ‘희망’을 싹틔우는 정신에서 나온다고 한다. 일리치는 이것을 프로메테우스적인 정신과 에피메테우스적인 정신으로 표현하는데, 『녹색평론』 발행인이었던 고 김종철 선생은 두 가지 정신의 차이를 한 강연에서 이렇게 풀이한 바 있다.
“『학교 없는 사회』의 맨 마지막 장에서 일리치는 이제 인류사회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그 동생 에피메테우스를 기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게 의미심장해요. 프로메테우스가 앞을 보는 신화적 인물이라면 에피메테우스는 뒤를 돌아보는 인물이죠. 그래서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는 늘 전진하는 진보의 표상으로 추앙받아왔잖아요. 근현대의 진보적인 사회사상가들 사이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늘 영웅이었죠. 반면에 에피메테우스는 기껏해야 인류사회에 갖가지 재앙과 질병을 퍼뜨린 판도라의 남편으로 기억되었을 뿐이에요. 엉터리 여자에게 장가를 간 바보 같은 놈으로 취급을 당해왔어요. 마르크스의 영웅도 프로메테우스에요. 그러나 일리치는 거꾸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에피메테우스이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는 거죠. 이것은 끝없이 앞으로만 돌진하다가 지금 생태적 파국이라는 벼랑 끝에 도달한 산업문명의 행로를 들먹일 것도 없이 분명한 사실이에요. 앞을 내다보는 만큼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하는 거죠.”『근대 문명에서 생태 문명으로』, 105쪽
일리치는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가 각각 상징하는 정신적 태도들을 기대expectation와 희망hope이라는 말로도 설명하는데, 이 단어들에서 그의 생각을 더 뚜렷이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희망과 기대를 다시 구별해볼 필요가 있다. 희망이란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연의 선함을 믿는다는 뜻인 데 반해, 기대라는 말은 인간의 계획과 통제에서 나온 결과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 기대란 우리가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을 생산해주리라 예측되는 과정으로부터 만족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89쪽, 208쪽 참조. 학교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학교를 통해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을 배우기보다는 계획된 생산품과 서비스를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하는데, 이런 제도화된 가치를 주입하는 교육이야말로 필요의 경제에 봉사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리치는 에피메테우스의 아내 판도라가 원래는 재앙의 여인이 아니라 대지의 여신이었음을 일깨워주면서, 그녀가 희망을 남겨놓았다는 데 주목한다. 우리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지만 ‘자연의 선함’을 믿고 살아갈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삶의 경이로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의 계산 없는 행위로 인해 삶의 경이로움을 맛보았을 강도당한 이처럼 말이다.
제도는 이런 경이를 가져다줄 수 없다. 합리적인 계획과 과학적 정신을 상징하는 프로메테우스가 결국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기후 위기와 같은 생태적 파국과 사회적 관계의 와해이다. 일리치가 현대의 위기로 제시한 물리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력이라는 세 가지 퇴행은 에피메테우스의 반성적 지혜를 통해서만 희망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에 만연한 ‘학교’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사회를 해방시키는 데서 그 첫걸음이 시작될 것이다.
2023년 1월
옮긴이 안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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