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냥꾼
1917년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처음으로 해가 떠오르기 전 태초의 시간 같았다. 구름은 그들이 속해 있던 영역을 떠나 나지막이 내려와, 마치 땅에 맞닿은 듯 보였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창공을 둘러싸고 어렴풋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흔들림도 소리도 없었다.
이 아득한 세계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눈길에 난 작은 얼룩처럼 사람 하나가 홀로 걷고 있었다. 사냥꾼이다. 아직 부드러움과 온기가 남아 있는 짐승의 발자국 위로 몸을 구부린 채, 남자는 자신이 노리는 사냥감이 있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눈의 날카로운 냄새가 폐를 가득 채웠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약간의 눈이 내려 쌓이면 그 짐승을 더욱 쉽게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국 크기로 미루어 몸집이 제법 큰 표범 같았다.
남자는 나무들 사이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동물들은 여기 그들의 영토에서 소리 없이 움직였지만, 산은 그의 것이기도 했다. 혹은 바꾸어 말해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산에 속해 있었다. 험준하게 펼쳐진 산들이 특별히 관대하다거나 위안을 주어서가 아니라, 이 깊은 숲의 어느 곳이든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똑같이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산을 타고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았다. 어떻게 숨을 쉬고, 걷고, 생각하고, 죽여야 하는지. 마치 표범이 표범으로 사는 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바닥은 대부분 적갈색 솔잎으로 덮여 있었고, 이어지던 발자국은 점점 뜸해졌다. 남자는 나무둥치의 긁힌 자국이나 주변 덤불에 미세하게 남아 있는 흔적, 부러져 나간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성긴 털 몇 가닥을 찾아보았다. 그는 사냥감과의 거리를 점점 좁히고 있었지만, 지난 이틀 동안 그 짐승의 모습을 포착해 내지 못한 터였다. 준비해 온 식량이었던, 소금 몇 알만으로 맛을 낸 보리쌀 주먹밥은 이미 오래전에 동이 났다. 전날 밤 남자는 붉은 소나무의 갈라진 둥치 틈에 앉아, 까무룩 잠들어 버리지 않도록 밤하늘에 떠오른 하얀 낫 모양의 달을 내내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허기와 피로가 쌓일수록 발걸음은 가벼워지고 머리는 맑아졌기에, 그는 계속 나아갈 작정이었다. 최후의 순간에 쓰러져 죽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살육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토끼나 사슴, 그리고 다른 작은 동물들은 겨우내 씨가 마르기 마련이기에, 인간과 마찬가지로 표범도 먹잇감을 찾느라 고달픈 시간을 견뎌야 했다. 어느 시점이 오면 놈은 결국 멈출 수밖에 없을 테고, 바로 그때 남자는 그 짐승을 죽일 것이다. 음식과 휴식이 필요한 건 둘 다 마찬가지지만, 남자는 할 수 있는 한 자신이 쫓는 사냥감보다 더 오래 버텨내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남자는 험한 산등성이에 뿌리를 내린 어린 소나무들로 에워싸인 작은 빈터에 다다랐다. 삐죽 솟아오른 바위로 올라가, 스산한 잿빛과 회녹색으로 펼쳐진 겨울 벌판을 품은 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떠밀려 온 얇은 구름층이 산꼭대기의 목주변에 걸려 갈기갈기 찢긴 비단처럼 너울거렸다. 남자가 발을 디디고 선 아래쪽으로는 거친 흰색의 심연이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는 이 장소로 이끌려 오게 되어 기뻤다. 표범은 험준한 절벽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고, 따라서 이곳에 그 짐승의 은신처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무엇인가 연약하고 차가운 것이 부드럽게 남자의 얼굴에 와 닿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첫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눈 위에서는 발자국을 쫓기가 더 쉬워지겠지만, 너무 두껍게 쌓이기 전에 짐승을 찾아내 서둘러 산에서 내려가야 할 것이다. 그는 활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직감대로라면 지금 표범은 남자가 서 있는 절벽 아래쪽에 자리한 은신처에 틀어박혀 있을 테고, 그러면 그 짐승을 찾기 위한 고행도 이제 끝날 터였다. 그러나 놈이 다시 먹이를 찾으러 나올 때까지는 자리를 지킨 채 기다려야 했고, 그건 한 시간, 어쩌면 사흘까지 걸릴 수도 있었다. 그때쯤이면 그는 선 채로 머리끝까지 눈에 뒤덮이고 말리라. 남자는 눈이 되고, 바위가 되고, 바람이 될 것이다. 그의 내장은 표범의 먹이가 되고, 그의 피는 어린 소나무들의 영양분이 될 것이다. 마치 그가 산 아래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던 인간의 삶을 아예 가져본 적도 없었던 것처럼.
그 삶에서, 남자는 대한제국군에 복무하던 병사였다. 활 쏘는 기술로는 나라에서 제일이라는 명사수들만 특별히 차출하여 만든 부대였다. 화승총이나 활로는 누구도 남자를 능가할 수 없었다. 각 지역의 특성을 빗댄 옛말을 따라, 사람들은 남자를 ‘평안도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물론 그 사나운 야수들은 평안도뿐 아니라 이 작은 땅의 모든 산과 숲마다 넘쳐났기에 고대 중국은 이곳을 ‘호랑이의 나라’라 부르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확실히 그 별명은 남쪽에서 왔다는 농부들보다 그 남자에게 훨씬 잘 어울렸다. 험준하고 경작하기 힘든 땅을 개척해 낸 북부인들은 사냥꾼의 피를 타고난 자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평양군수 밑에 소속된 병사였다. 훈련을 건너뛸 때마다 아버지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보통은 사슴, 산토끼, 여우, 꿩 같은 고만고만한 사냥감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가끔은 멧돼지, 반달곰, 표범, 그리고 이리를 잡아 오기도 했다.
남자가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 혼자서 호랑이 한 마리를 죽인 적이 있었다. 그 짐승을 산 아래로 끌어오기 위해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세다는 장정이 여섯이나 아버지를 도우러 가야 했다. 마침내 죽은 호랑이를 끌고 내려왔을 때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한마음으로 기뻐했고, 아이들은 군중의 맨 앞쪽에서 내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호랑이 가죽만 해도 병사의 한 해 치 봉급보다 더 값이 나갔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은행나무 아래 거대한 사체가 놓였고, 먹을 것이라곤 한 톨도 없는 상황에서 무슨 수를 쓴 건지 여자들은 그들만의 장기를 발휘하여 어떻게든 잔치 음식을 마련했다. 사발을 가득 채운 뽀얀 막걸리를 모두가 신나게 들이켰다.
그러나 그날 밤, 뜨거운 온돌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은 아버지는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절대 호랑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엄숙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 이제 우린 부자예요. 쌀을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됐어요. 소년이 말했다. 뭉툭하게 그루터기만 남은 초가 조용히 깜박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 작고 얌전한 불빛은, 마치 두꺼운 겨울 솜이불같이 그들 모두를 뒤덮어 보호해 주고 있는 이 깜깜한 어둠에 맞설 뜻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다른 방에서 바느질을 하거나 잠들어 있었다. 사냥 중인 부엉이들이 웅얼대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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