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어느 별에서 뚝 떨어졌을 가능성
LA의 본관인 럽튼홀 중앙 계단에서 열다섯 발짝 떨어진 곳에 내 두 번째 집인 LA 도서실이 있다. 도서실이 있는 럽튼홀 정면은 채터누가 시민들이 노스쇼어를 지나다닐 때 이용하는 대로변을 향해 있다.
윗부분이 동으로 된 식민지 시대풍 돔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2년 전 도서실 보수 공사 때 케이웰 선생님과 내가 직접 설계한 널찍한 공간이 환해졌다. 도서실 내부는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케이웰 선생님 책상 뒤편에 있는 문 너머 자료실만 빼면 말이다. 흰 벽에는 포스터 한 점 없었다. 도서실 이용객 중에 커뮤니티 게시판이 아닌 다른 곳에 포스터를 붙이려는 낌새까지 내가 철저하게 막아낸 결과였다.
짙은 황갈색으로 착색된 의자와 책장이 가지런히 줄 서 있고, 빈티지풍의 검은색 펜던트 조명과거 이 건물이 공장이었을 때부터 걸려 있었다.이 탁자와 컴퓨터 책상 위에 매달려 있었다.
곳곳에 화초가 있었는데 그 수가 꽤 많았다. 무화과나무, 양치식물, 떡갈잎 고무나무, 스파티필룸 등등……. 학생 부모님 중 교외에서 대형 묘목장을 운영하시는 분이 전부 기부하셨다. 도서관에 두기에는 분수에 넘치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서 케이웰 선생님과 나는 더 마음에 들어 했다. 화초, 컴퓨터, 편안한 의자, 책, 커피, 와이파이…….
여기서 뭘 더 바랄 수 있을까?
도서실에 오면 예상할 수 있는 게 두 가지 있다. 주법에 따라 넘치도록 비치된 건강 관련 팸플릿과 책상에 앉아 있는 케이웰 선생님이다. 하지만 그날은 팸플릿만 제자리에 있고 케이웰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케이웰 선생님?”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책상 뒤쪽에 있는 자료실에 들어가 보았다. 좁은 사각형의 청소도구 보관 창고인데 기증 도서, 낡은 장식품, 잡지, 누렇게 변한 신문을 포함해 알 수 없는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었다.
“케이웰 선생님? 여기 계세요? 루카스 게브하르트 신작 얘기해야죠. 어디 계세요?”
뒤꿈치를 찍고 빙글 돌자 열린 자료실 문 사이로 선생님의 컴퓨터가 보였다. 화면이 켜져 있고, 선생님의 이메일이 열려 있었다.
나는 어느 별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다섯 살 이전의 삶은 기억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이메일을 훔쳐봐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확실히 알고 있다. 그것은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보편적으로 해야 하는 일’ 목록 세 번째에 있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와 ‘SNS에 인기 TV 프로그램 스포하지 말지니라’ 다음이었다.
그래서 선생님 컴퓨터에 이메일이 열려 있는 것을 봤을 때, 맹세하건대 나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바로 그때 머릿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얘, 클라라, 저 이메일에 틀림없이 ‘기밀’이라고 되어 있었어. 그러니 가서 확인해 봐. 어느 별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95퍼센트인데도 불구하고 나의 나약한 의지가 소리 내서 이렇게 답했다.
“그러지 뭐.”
사라진 케이웰 선생님의 컴퓨터에
열려 있는 이메일
파트 A : 문제의 이메일
받는 사람 : 전체 교직원
보낸 사람 : m.walsh@luptonacademy.edu
제목 : FW : 기밀―운영 방침 업데이트
존경하는 교직원 여러분,
여름 방학 동안 열린 다수의 이사회를 통해 학교 운영 방침과 절차에 다음과 같은 변경 사항이 있어 알려드립니다. 이사회가 공표를 승인할 때까지 변경 사항을 기밀로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a) 조퇴 시 지구식료품 풀밭을 지나는 것을 제외하고 수업 시간 중에 기차선로를 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고 학생들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아울러 기차 노선이 폐지되었지만 선로 위에 눕거나, 허가 없이는 죽는 시늉을 포함하여 어떠한 장면도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전달 바랍니다. 학교 위치를 고려하여, 실제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주민이 참여하는 정식 절차를 통과했을 경우에만 촬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고지해 주십시오.
b) 운동 경기 중 캠퍼스가 혼잡해지는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매점 운영 시간이 변경되었습니다. 앞으로 경기 시작 30분 전부터 음식 주문이 가능해집니다. 볼케이노스 파이팅!
c) 럽튼 아카데미는 사립학교로서 설립이래 ‘집중, 지식, 영향’이라는 핵심 원칙을 준수해 왔습니다. 집중은 지식으로, 지식은 영향으로 이어져 우리 학생들에게, 궁극적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핵심 원칙을 이어나가기 위해 제한된 매체 목록을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교내에서 해당 매체를 소지하거나 그것에 관해 논의할 경우 학칙에 의거, 3회 적발 시 정학 처분을 받게 될 것입니다.
파트 B : 뒤이은 내 반응
B.1. : 생각
‘제한된 매체’? 딱히 악의가 느껴지지 않지만, 격식에 얽매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제한하다’의 동의어는 ‘금지하다’, ‘매체’의 동의어는 ‘책’, ‘영상’, ‘게임’, ‘보드게임’ 등이다. LA가 카드 게임 때문에 전쟁을 시작할 리는 만무하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TV를 본다는 것도 말이 안 되니, 남은 게 뭐지?
프라이버스 침해를 좀 더 강행하여 이메일에 첨부된 PDF 파일을 열었다. 그러자 50권이 넘는 ‘제한된’ 도서 목록이 죽 펼쳐졌다.
《호밀밭의 파수꾼》 ‘부적절한 언어 사용’.
《빌러비드》 ‘생생한 폭력, 성적 요소 및 언어’,
《앨저넌에게 꽃을》 ‘정신 장애가 있는인물에 대한 거북한 묘사’.
그리고 걸작.
최후의 한방.
《날 짓밟지 마》에는 ‘분열을 초래하는 내용 및 동성애’를 비롯해 말도 안 되는 형식적이고 구차한 헛소리가 적혀 있었다.
“럽튼 아카데미, 이럴 거면 그냥 마켓 스트리트 다리에서 뛰어 내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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