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
잃어버린 시가 얼마나 많으냐.
메모 안 해서 잃어버리고,
허공에 날려 보내 잃어버리고,
또 올 테니 잃어버리고,
세상에 널려 있어
잃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잃어버리고,
그로 하여 유쾌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놓아 보내고……
껄껄대며 놓아 보내고……
살구나무에 대한 경배
내 친구 최승희 교수는
한국 고문서 연구의 권위인데
그보다 더 잘하는 건
살구 술 담그는 일.
자기 집 마당에 있는
살구나무를 잘 가꾸어
매년 수확한 살구로 술을 담근다.
가끔 점심을 같이할 때
페트병에 담아 가지고 나오는데
그 맛은 주성酒星의 샘에서 담아 온 것 같다.
어느 날 천주교정의구현 무슨 사제들 얘기와
불교 쪽 얘기가 나온 김에
내가 말했다.
섬기려면 살구나무 같은 걸 섬기는 게
그래도 그중 나은 거라.
매년 가을 떨어진 나뭇잎을 모아
그 나무 밑을 파고 묻어
거름이 되게 한다고 하니 말인데,
아침저녁으로
그 살구나무에 절을 하는 게 좋겠다,
경배할 만한 건 필경
나무 정도가 아닐까 믿어 의심치 않는바……
시간은 간다
― 콜라주
1
나의 탄생을 내가 몰랐으니
나는 처음부터 아는 게 없었다.
2
그렇지 않은가
모든 때가
‘때가 때이니만큼’ 아닌가.
그렇거니, 그렇거니!
3
(괜히 허세를 좀 부리자면)
시간이 가는 것도 두렵지 않고
시간이 가지 않는 것도 두렵지 않다.
시간은 가는 것이기도 하고
가지 않는 것이기도 하니……
녹아들다
녹아들지 않으면
그럴듯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다.
마음은 특히 그렇다.
(지금의 세계는
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녹아들지 않으면
마음은 필경
삶의 전부인 저
진실의 순간을 만나지 못한다.
그런 순간이 없으면
삶은 깡그리 허탕이다.
녹는 일에는
물과 기름과 바람이 있고
살과 피와 무슨 그런 게 있지만
그러나
마음이 녹아들지 않으면
(지금의 세계는
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세계는 잿더미요
삶은 쓰레기 더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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