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843년 5월: 귀향 여행
떨어지는 순간 마치 서서 걸어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그렇게 떨어지는 것, 삶의 도약을 걷기로 전환시키는 것, 그것은 오로지 신앙의 기사만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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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물음을 온몸으로 살다
전에는 결코 그렇게 빨리 이동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고요하게 앉아 있다. 전혀 거북해 하지 않고, 휴식하기까지 하면서, 심지어 “멋진 안락의자”에 앉은 채. 들판이 나는 듯이 스쳐 지나가는데, 여전히 봄의 밝디밝은 초록색이다. 여행을 재촉하는 그의 돛에는 아무런 신성한 바람도 없다.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기적이다. 증기와 강철, 창의력과 야망의 연금술적 융합이 철로를 통해 기독교 세계를 직통으로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종류의 이동 덕분에 그와 같은 사람에게 휴식 시간이 허용된다. 일등실 객차는 정숙하며, 또 여느 때처럼 그는 혼자 여행하고 있다. 흘러가는 풍경은 지나가버린 시간, 변해버린 모든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지난 몇 주간의 긴장, 지난 몇 달간의 위기, 그리고 그 이전에 대학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음을 회상한다. 어쩌면 이제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있는 것인가? 시속 65킬로미터로 베를린을 떠나 발트해를 향해 질주하면,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법이다. 이틀이 채 되기 전에 쇠렌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에 도착할 것이다.
때는 1843년 5월 말, 키르케고르는 이제 막 서른이 되었다. 석 달 전 그는 순식간에 화제를 불러일으킨 방대한 양의 괴상한 철학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출판했다. 그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1841년 겨울 동안 베를린에서 집필했는데, 이 기간은 그때까지의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리고 이번 달에 그는 더 짧은 방문을 위해 베를린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일을 다시 반복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아니다 다를까, 그는 원고 두 편을 가방에 넣고 오늘 기차에 올랐다. 그는 『반복』의 집필을 끝냈는데 이 저서는, 키르케고르 자신처럼, 젊은 여성과 약혼하지만 마음이 변해 파혼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또 다른 작중 인물이 들려주는데 그는, 역시 키르케고르처럼, 두 번째로 베를린으로 여행을 가서 젠다르멘마르크트 광장에 있는 그의 예전의 숙소를 다시 잡고 같은 극장에서 같은 연극을 관람한다. 절반은 소설이고 절반은 선언문인 이 희한한 소책자는 새로운 종류의 철학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 철학에서는 진리가 앎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어떻게든 삶으로 영위되어야 한다.
아직 완결되지 않은 또 다른 저서는 『공포와 전율』이다. 이 책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고,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사흘 동안 모리아산으로 걸어가서,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손발을 묶고 칼을 높이 들어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그에게 이삭 대신 어린 양을 죽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다시 사흘 동안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 늙은 남자는 그의 아내 사라가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을 때 뭐라고 말했을까?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성서의 화자는 아브라함의 생각, 감정, 의도에 관하여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며, 우리는 오직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저술하면서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내면의 삶을 독창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혹자는 이런 종류의 시적 사유는 철학이 아니라고 주장할 테지만,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모리아산으로의 여정에서 엄청난 철학적 교훈을 이끌어내고 있다. 게다가 그는 아브라함의 칠흑 같은 수수께끼에 매혹되었다. 아마도 그는 심지어 자신의 삶이 유사한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즐기기까지 할 것인데, 이러한 그의 수수께끼를 다른 사람들이 언젠가는 상상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사람은 나의 삶을 이해한 셈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어느 누가 이것을 이해했을 것인가?” 그는 『공포와 전율』이 작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주기를, 또 여러 언어로 번역되기를, 세대를 이어가면서 연구자들에 의해 연구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지금처럼 이렇게 열심히 작업해본 적이 결코 없다네”라고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 보에센Emil Boesen에게 베를린에서 고향을 향해 출발하기 직전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 “아침에 잠시 외출했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내 방에 세 시까지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앉아 있다네. 그러면 눈이 침침해져서 거의 볼 수 없게 되지. 그러고 나서 살그머니 외출해서 단장短杖을 들고 식당으로 향하는데, 너무나 쇠약해져서 만일 누군가가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른다면 아마도 졸도해서 죽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이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서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네.” 그의 신체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구에게 “자네는 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는 걸 알게 될 걸세”라고 말했다. 설령 그가 “새로운 위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기꺼이 자신의 과거를 기록하고 있다. “요즘 세 달 동안 나는 게으름을 피우면서 기력을 충분히 회복했고 이제 현을 팽팽히 잡아당겼는데 그러자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폭포수처럼 솟아나고 있다네. 건강하고, 행복하고, 왕성해지고, 명랑하고, 축복받은 아이들이 어렵지 않게 태어났는데, 그럼에도 이 모든 것에는 내 개성의 탄생 표식이 담겨 있다네.”
베를린에서 이렇게 작업하면서, 설탕이 듬뿍 들어간 커피로 기운을 차리는 동시에 긴장을 유지한 채, 키르케고르는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닌 힘으로 얻은 활력이었다. 그는 절망과 충일함의 순환에 빠졌는데 그 자신은 이것을 영적 교육의 일환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일지에서 이 순환의 비참한 국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런 때에는 “캄캄한 지옥에 내던져진 채 고뇌와 고통 속에서 이리저리 기어 다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출구도 전혀 없었다.” 이러한 수난은 뒤따르는 것에 필수적인 것처럼 보였다. 아이를 낳는 여자의 산고처럼 말이다. “그다음에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내 마음에 떠오르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생생해서, 전에는 결코 한 번도 품은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은 생각이다. (…) 그 생각이 내 안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면 나는 약간 느슨해지고 팔을 붙잡히는데, 그러다가 나, 그때까지 메뚜기처럼 무력해져 있던 나는, 다시 성장해서, 건강하고, 왕성해지고, 행복하고, 애정이 넘치며,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생기가 넘친다. 그때는 마치 내가 이런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약속해야 하는 것과도 같다. 나는 내 생명을 걸고 맹세하고 그러면 이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준비를 갖춘다. 나는 멈출 수 없으며 내 체력도 유지된다. 그러다 끝을 내고, 그러면 그것은 완전히 다시 시작된다.” 그의 창조력은 축복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지만, 그 어느 쪽이든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관념들은 독자적인 생명력으로 그의 내면에 흘러넘쳤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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