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ide
보편적이면서 보편적이지 않은 디테일들
아라
초커가 유행할 때도, 유행하지 않을 때도 초커를 했다. 두 개 있었다. 아라가 직접 만든 것으로, 면사에 작은 은 펜던트를 달아 사계절 착용감이 좋았다. 목을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검은 선이 좋았다.
태어난 곳은 W지만 기억은 거의 나지 않고, H에서 내내 자랐다. 스키 리조트 바로 아래 펜션이 집이었다. 펜션은 성수기에나 가끔 손님이 들고, 비성수기에는 거의 비어 있다. 낡았는데 고칠 돈이 없었다. 리조트가 방갈로를 신축하는 바람에 더더욱 손님이 드물어졌다.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 아라는 스키를 잘 탄다. 겨울에는 강사 아르바이트를 한다. 강사들에게는 숙소가 제공되는데, 아라는 숙소가 필요 없음에도 거기 묵었다. 집보다 편했다. 첫날에 쌀 한 포대, 냉동 홍합 한 포대를 여섯 명이 머무는 방마다 나눠 줬다. 그게 ‘식사 포함’의 의미인 걸 깨닫고 멀리서 온 아르바이트생들은 분개했지만, 이내 홍합으로 온갖 걸 해 먹었다. 낮에는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저녁에 홍합 국물로 속을 데운 다음 야간 스키를 탔다.
“이게 눈이야, 얼음이야? 설질이 너무 나빠.”
투덜거리면서도 모두 신나게 탔다. 조명도 음악도 밤이 나왔다. 햇빛으로 눈이 부시지 않았고 어른들의 음악이 나왔다. 아라는 좀처럼 넘어지지 않아서 스키복도 입지 않았다. 데님을 입고 탔다. 아무리 빠르게 타도, 과감하게 타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보드도 탈 수 있긴 하지만 두 발이 한꺼번에 묶이는 게 싫어서 잘 타지 않는다.
눈이 녹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돌아간다. 대학생들은 개강을 하고, 그중 몇 명은 아라와 연락처를 교환하기도 한다.
“너는 여기 계속 있기에 너무…….”
“너무 뭐?”
아라가 다시 물으면 말하던 사람은 늘 형용사를 찾지 못했다. 아라는 형용사의 빈자리를 좋아했다. 그것은 기대감 같은 것.
기대감으로 겨울을 기다리지만, 다른 세 계절은 겨울보다 길었다. 봄과 가을이 짧다 해도 여름이 길었다.
리조트의 작은 수영장만으로는 관광객을 끌기 어려웠다. 여름의 H는 한산해지고, 아라는 두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낮에는 카트 트랙에서, 밤에는 한우집에서 일했다. 카트 트랙에서는 사람들에게 헬멧을 빌려주고 안전벨트를 체크하고 간단한 설명을 한 다음, 서른 바퀴를 돌면 수신호를 보내 들어오게 했다. 낡디낡은 카트였다. 항상 3분의 1에서 4분의 1은 고장 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위험할 만큼 속도를 냈고 어떤 사람들은 싱겁게 천천히 몰았다. 아라는 양쪽 다 좋아했다. 누가 어떻게 몰 것인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핸들을 잘 돌리게 생긴 근육질 민소매의 남자가 모범택시처럼 운전할 때도 있었고, 네 살 아이를 옆에 앉힌 채 폭주하는 젊은 엄마도 있었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헬멧에서는 냄새가 났다. 잘 뒤집어서 햇볕을 향하게 두어도.
한우집에서는 서빙을 했다. 아라는 쟁반 균형을 잘 잡는 편이었다. 한 번도 뭘 쏟은 적이 없다. 유니폼 같은 건 없었다. 아라는 초커를 하고, 티셔츠를 입고, 똑같은 데님을 입은 채로 앞치마만 둘렀다. 고기를 끝없이 날랐다. 사람들은 고기를 먹기 위해 H까지 왔다. 소들은 어디서 죽어가고 있을까? 소가 죽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는데. 아라는 어쩐지 H에 소가 그렇게 많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제주도에 사는 사람은 돼지에 대해서 비슷하게 생각할까?
손님이 없는 날은 검은물잠자리가 가게 안팎을 날아다니는 걸 구경했다. 아라는 어릴 때 검은물잠자리가 요정이라고 믿었었다. 도시로 이사 간 친구는 그곳엔 검은물잠자리가 없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초커에 잠자리 모양 펜던트를 달고 싶다고 아라는 생각한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작은 봉투에 담겨 올 것이다. 몇 그램도 나가지 않을 펜던트가. 진짜 검은물잠자리의 무게는 어떻게 될까, 펜던트보다 무거울까? 가끔 궁금하지만 잠자리를 잡지는 않는다. 정육 저울에 잠자리를 달 수는 없을 것이다.
밤 11시 반쯤, 콜라비 밭과 비트 밭을 가로질러 돌아온다. 콜라비도 비트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비트는 몸을 그대로 통과하는 붉음이 어쩐지 기분 나쁘다. 어릴 때 놀았던 계곡 위로는 고속도로가 놓였다. 고속도로가 산을 피해 높게 높게 지어져서 풍경이 좀 이상해졌다. 적어도 10층 높이가 아닐까, 아라는 가늠해본다. 도로 곁에 10층 건물이 없어서 비교가 어렵다. 계곡에서 함께 놀던 남자아이는 얼마 전 비트 밭에서 아라의 목을 조른 적이 있었다. 손에 돌이 잡혀서 그 아이를 실명시키기 직전까지 때려 벗어났다. 가끔 그 부근을 지날 때 숨이 막힌다. 호신용구를 시켰다. 뾰족한 쇠막대, 돌보다 확실한 물건이다. 택배는 언제나 하루 반이면 온다. 가끔은 하루 만에 로 때도 있다.
“거기 요즘 들썩들썩해?”
이사 간 친구가 전화를 걸어 물었다.
“왜?”
“올림픽 때문에?”
“아무래도.”
“사람들이 못생긴 걸 잔뜩 만들어놓고 가겠네.”
“응. 아르바이트해야지.”
전화를 끊었다. 길에는 아라밖에 없었다.
밤에는 검은물잠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잠자리가 날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걸까, 잠들어 있는 걸까 아라는 가로등 아래에서 빛의 바깥을 바라보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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