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1.
오후내 비 내리더니,
구름 속
노란 빛줄기 타고 내려온 놀라운 힘,
신의 권능이 그런 것이겠지.
그 힘이 나무에 닿자, 나무의 몸
영원히 열렸지.
2. 늪
어젯밤, 빗속에서, 몇 사람이
수용소 철조망을 넘었어.
어둠 속에서 그들은 철조망을 넘을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일단
시도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어둠 속에서 그들은 철조망을, 한 줌 한 줌 잡으며
기어올랐어.
어둠 속이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들켜서
도로 잡혀 들어갔지.
하지만 몇 명은 아직 철조망을 기어오르거나 울타리 너머
푸른 늪을 건너고 있어.
철조망을 빵 덩어리나 신발처럼 잡는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철조망을 접시와 포크, 혹은 꽃다발처럼 잡는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철조망을 문손잡이, 서류,
당신 몸에 덮고 싶은 깨끗한 시트처럼 잡는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3.
또는 이 이야기. 비오는 날, 삼촌이
화단에 누워 있었어,
망가진 싸늘한 몸,
시동 켜진 차에서 끌어냈지,
배기관을 틀어막은 넝마, 반짝이는 호스.
아버지가 소리쳤고,
그다음엔 구급차가 왔고,
그다음엔 우리 모두 죽음을 보았고,
그다음엔 구급차가 삼촌을 실어 갔지.
나는 집 현관에서
다시 돌아보았어,
뒤에 남은 아버지를,
아직도 꽃 속에 서 있는,
미동조차 없는 진흙투성이 남자,
빗속의 작은 형상.
4. 이른 아침, 내 생일
분홍 썰매 탄 달팽이들
나팔꽃들 사이로 기어가네.
거미가 빨강 엄지손가락 같은
산딸기들 사이에서 자고 있네.
나 어쩌지, 나 어쩌면 좋지?
느린 비.
빗속의 활기 넘치는 작은 새들.
딱정벌레들까지도 활기가 넘쳐.
초록 잎사귀들은 빗물을 받아 마시네.
나 어쩌지, 나 어쩌면 좋지?
말벌이 종이의 성 현관에 앉아 있네.
왜가리는 구름을 헤치고 날아가네.
물고기, 온통 무지개와 입만 보이는 물고기가 검은 물에서
뛰어오르네.
오늘 아침 수련은 모네의 수련 못지않게
아름다워 보여,
그리고 난 더 이상 쓸모 있는 존재,
온순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
들판의 아이들을 문명의 교과서로 인도하고
그들이 풀보다 낫다고(못하다고) 가르치고 싶지 않아.
5. 바닷가에서
나 이 음악 전에 들었는데,
몸이 말했어.
6. 텃밭
케일의
주름진 소매,
피망의
빈 종,
래커 칠한 양파.
비트, 보리지, 토마토,
풋강낭콩.
나는 집에 들어와서 조리대에
전부 올려놨지. 골파, 파슬리, 딜,
흐릿한 달 같은 호박,
비단신 신은 콩, 비에 흠뻑 젖은
눈부신 옥수수.
7. 숲
밤에
나무들 아래서
검정뱀이
혈근초 줄기,
노란 잎사귀,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에
마구
몸을 문질러
묵은 삶
벗어던지고
젤리처럼 빠져나오네.
뱀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뱀은
그게 효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까?
멀리서
달과 별들이
작은 빛을 보내고 있네.
멀리서
올빼미가 울부짖네.
멀리서
올빼미가 울부짖네.
뱀은 알지,
여기가 올빼미들의 숲이라는 걸,
여기가 죽음의 숲이라는 걸,
여기가 고난의 숲이라는 걸,
여기서 넌 기어가고 또 기어가지,
넌 나무껍질 속에서 살지,
넌 거친 나뭇가지 위에 눕고
나뭇가지는 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지,
여기선 생명이 목적도 없고
교양도, 지성도 없지.
생명이 목적도 없고
교양도, 지성도 없는 곳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네.
꽃들의
체취 같은 냄새가
나기 시작하네.
목덜미에서
묵은 껍질이 갈라지네.
뱀은 몸서리치지만
주저하진 않네.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네.
물에 담근 새틴 옷에서 색이 빠지듯
허물이 벗겨지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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