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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쳐다보지 마
2021년 말 넷플릭스에서 코미디 영화 〈돈 룩 업〉이 개봉되었다. 미국 변방의 대학교 천문학과 대학원생과 교수가 지구를 멸망시킬 만큼 큰 혜성을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다. 육 개월 후에 지구를 멸망시킬 혜성이 다가오고 있지만 정치가는 표를 얻기 위한 소재로 위기를 이용하고, 기업가는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기 위해 지구를 구할 마지막 기회를 무위로 돌린다. 주인공 랜들 민디 박사는 “제발 과학자들 말 좀 들어라”라고 방송에서 소리치지만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과학자의 외침은 SNS에서 밈Meme으로 희화화되고, 과학적 사실은 정치적 논쟁거리로 전락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지 마Don’t look up”라고 외치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혜성의 존재를 외면한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고 우리가 현재 기후변화를 바라보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제발 우리 이야기 좀 들어라”라고 외치지만 그 외침은 사회를 갈라치기하는 논쟁의 재료로 소비될 뿐이다.
2021년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는 많은 기후변화 활동가의 기대를 부풀게 만들었다. 미국에서 바이든 정부가 출범하면서 좌초 위기에 처한 탄소중립을 되살려 냈기 때문이다. 트럼프 시대에 부진하던 2050년 탄소중립 선언에 대부분의 선진국이 참여했다. 중국마저도 국제사회 요구보다 10년 더 늦은 206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이번 유엔 당사국총회는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파리협약에 규정한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국가별로 제출하고 처음 열리는 회의였던 만큼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렇지만 기대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서로 다투다 아무런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고 끝이 났고 그 이전의 유엔 당사국총회가 그랬듯이 내년을 기약해야만 했다.
영화 〈돈 룩 업〉에서는 ‘행성 킬러’라 부르는 혜성을 맨눈으로 보게 되자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지 마”라는 메시지가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하늘 좀 쳐다봐”라고 외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기후 과학자와 활동가들은 우리 지구가 위험에 처했다고 소리친다. 전 국립기상과학원장 조천호 박사는 “산업화된 나라에서 만약 기후 위기가 일어난다면 대한민국이 첫 번째일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돈 룩 업”을 외치는 듯하다.
우리는 언제쯤 하늘을 쳐다보게 될까?
이미 변해버린 것에 언제 변할지를 묻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돈 룩 업〉을 보면서 씁쓸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이 영화처럼 다가오는 위험을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1988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IPCC가 출범하고 2년 후에 1차 기후변화 평가보고서AR1를 발표하며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1992년에는 브라질 리우에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이 출범했다. 기후변화를 인류가 함께 대처해야 할 재난 상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 가장 흔했던 농담 중 하나는 “점점 더워진다는데, 왜 이렇게 추워”였다. 티브이에서는 짧은 간빙기가 지나고 다시 빙하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곤 했다.
2000년쯤 한 정부 부처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소개하고 우리나라도 기후변화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 주제였다. 한 시간의 강의를 마친 후 질문을 하나 받았다.
기후변화는 지구의 세차운동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선진국이 개도국의 경제발전을 막기 위한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시각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당시 기후변화 강의를 가면 많이 받던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이 질문을 농업 분야 기후변화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받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과학적 사실을 전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이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이런 현상은 지식의 많고 적음이나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과 크게 상관없이 인간이 상황을 인식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914년 8월 2일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 바로 다음 날,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 프라하에서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오후 수영 강습소.
후세의 역사가들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하는 일도 동시대 최고의 지성인에게는 그저 그런 일상으로 인식된다. 수백만 명이 죽게 될 전쟁과 오후의 수영 강습은 같은 비중으로 취급된다.
역사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인간은 현재를 체험한다. 그 당시의 사람들도 역사적 사건을 중대하게 인식했을 것이라고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시대의 비극조차 사후에나 이해된다.
슈퍼 엘니뇨의 해였던 2015년은 ‘여름 같은 봄’과 ‘11월의 비’로 기억되었다. 봄은 짧았고 여름은 일찍부터 찾아왔다. 가을이 왔지만 비는 멈추지 않았다. 늦장마로 곶감에는 곰팡이가 피었고 사과는 수확 시기를 놓쳤다. 추운 겨울을 예상하며 큰 마음을 먹고 산 패딩은 다음 해 초 시베리아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닥쳤을 때 겨우 꺼내 입었다. 하지만 그해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폭염이 찾아와 수백 명이 죽었다.
2016년 5월 초 봄은 이미 사라지고 기온은 30도에 육박했다. 그 당시 5월의 30도는 낯설었다. 아직 건조한 공기 덕에 한여름의 무더위처럼 후덥지근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처럼 느껴졌다. 아파트 담장에는 장미가 예쁘게 피었지만 봄을 느낄 수는 없었다. 엘니뇨의 끝자락에서 맞닥뜨린 이른 더위는 이제 더 이상 ‘5월의 여름’이라고 호들갑 떨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언론은 습관적으로 기후가 변했다는 멘트를 잊지 않았다.
2020년은 54일간의 장마로 찾아왔다. 기상 관측 이래 최장 기간 장마였다. 여름 두 달 동안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비가 내렸다. 그해 벼 수확량은 10퍼센트 감소했고, 여름 배추는 밭에서 물러져 값이 폭등했다. 그해 겨울은 북극의 냉기를 막아주던 제트기류가 남쪽으로 밀리면서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혹독한 겨울을 경험했다.
2020년 겨울이 사라진 해가 지나고 2021년은 10월의 여름을 경험했다. 경상권인 창원은 31.1도, 울산은 30.5도, 밀양은 30.4도, 상주는 29.1도까지 올랐다. 전라권인 광양은 30.3도, 보성은 29.6도, 진도는 28.8도까지 올랐다. 기상 관측 이래 10월 기온으로 최고를 기록했다. 일본 동쪽 해상에 위치한 고기압의 가장자리에서 따뜻한 남서풍이 유입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아직도 기후가 변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물론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는 데 그나마 위안을 느낀다. 그리고 기후가 정말 변할 것인지를 묻는다. 하지만 논점이 틀렸다. 지금의 기후는 30년 전 부모들이 젊었던 시절의 기후와는 전혀 다르다. 앞으로 30년은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보지 못한 전혀 다른 지구를 경험할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그 변화를 언제 깨달을 것인가이다. 이미 강원도 철원에서 사과가 재배되고 제주도의 한라봉은 남해안까지 올라왔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겠지만 요즈음 봄 옷에 돈 쓰기가 꺼려진다. 다시 겨울이 와도 히말라야에라도 오를 것 같은 기세의 두꺼운 패딩은 점점 더 낯설어질 것이다.
이미 변해버린 것을 부여잡고 변화가 언제 올지를 묻는 사람에게 변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다. 《기후전쟁》의 저자 하랄트 벨처는 이를 ‘지시 프레임reference frame’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미디어나 주변을 통해 더 자주 특정 정보를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적인 것처럼 여기게 되는 ‘바탕 교체baseline shift’ 현상을 겪게 된다. ‘바탕 교체’는 나란히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마치 정지해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방향을 안내하는 ‘지시 프레임’을 변화시킨다.
1997년 IMF가 올 때까지 우리나라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랐던 것처럼 우리는 변화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에 덧붙여 사회 이슈는 손쉽게 논쟁으로 발전하는데, 담배 회사들이 담배가 유해하다는 주장을 ‘물타기’ 할 때 쓰던 기법이다. 우리가 언론에서 매일같이 보는 논쟁도 결국 담배 회사들의 성공적인 방법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적 증거를 들이밀면 일단은 부인한다. 그리고 그 반대하는 사실을 과학적 증거로 제시한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실을 논쟁으로 만들면, 사실에 대한 기억 대신 논란에 대한 이미지만 남는다. 하늘 위에 명확히 떠 있는 달을 가리켜도 사람들의 인식에는 손가락만 남는다. 기후변화에 대한 선전포고가 있은 지 오래지만, 오후에 있을 수영 강습을 더 신경 쓰는 것이 우리이다.
기후변화만 그런 것도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가습기 살균제가 위해하다는 정부 발표는 몇몇 학자들의 불완전한 연구 결과로 희석되었다. 언론은 기계적 중립을 지킨다. 사실과 거짓 앞에서 진실의 편에 서기보다는 기계적 중립을 선택한다. 논란은 커져가고 결국 지루한 법적 공방을 거쳐 사실이 인정될 때까지 피해는 확산된다. 미국의 담배 소송에서 벌어졌던 일이고, 우리나라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가장 흔하게는 정치적인 공방에서 ‘달의 손가락화’를 보게 된다. 우리 기억 속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기후는 이미 변했다. 얼마나 더 변할까?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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