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밤과 푸른 달
안내받은 장소에는 사람이 많았다.
도저히 새벽 4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양손에 가득 들린 짐을 보고 강설은 그들이 기다리는 버스가 자신과 같은 것임을 알아차렸다. 안내장에는 조리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들이 양손 가득 대파가 튀어나온 봉투와 반찬통을 들고 있는 이유다. 쌀쌀한 새벽바람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강설이 챙긴 것이라고는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가 전부였다. 원래도 요리를 못했다. 명월도 바라지 않을 거였다. 제사상 차리느냐고 비웃었을 테고. 강설은 명월이 보였을 몇몇 반응을 떠올리다 45인승 버스에 올라탔다.
강설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버스 좌석보다 인원이 적어 옆자리가 비었다. 차가 고속도로로 진입하자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쥐었다. 직원이 천장에 달려 있던 모니터를 켜고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을 여는 동안 하늘을 채우고 있던 드론들이 하나둘씩 빛을 끄며 그 사이로 일출의 붉은 파도가 밀려왔다. 앞을 집중해달라는 직원의 목소리에는 잠에서 덜 깬 듯한 피곤함이 느껴졌지만 나긋나긋한 말투는 새벽과 잘 어울렸다. 강설은 직원의 말을 라디오 삼아 들으며 창문에 머리를 기대 태양을 응시했다.
“다들 뉴스에서 들으셨겠지만 외향적인 큰 변화는 없습니다. 한창 인터넷에 떠돌던 괴수 사진은 누가 만들어낸 사진이고요. 그렇다고 아예 변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에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아주 세세한 부분들, 이를테면 손톱이나…….”
앞 좌석 아이가 의자와 창문 틈으로 강설을 바라봤다. 많아 봤자 내년에나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로 보였고 어디를 가는지,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강설은 아이의 쌍꺼풀이 참 짙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만나러 가는 사람은 형제일까, 아빠일까, 아니면 자신처럼 피가 섞이지 않은, 그저 아이의 옆에 있는 엄마의 지인일까를 두고 시답잖은 고민을 했다.
“후각 역시 진화했습니다. 3킬로미터 내의 냄새를 전부 맡을 수 있습니다. 덕분에 어둠 속에서도 크람푸스의 냄새를 맡아 찾아낼 수 있던 겁니다.”
아이는 한참 동안 자세를 유지하다 똑바로 앉으라는 제 엄마의 말에 몸을 돌렸다. 강설도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지만 일출의 붉은 태양은 지나간 후였다. 조금씩 잠이 몰려왔다. 버스 어디에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이미 아는 내용이었다. 몇 날 며칠 찾아봤겠지. 인터넷에 떠도는 음모론이나 가십에 심장이 내려앉았다가 벼랑 끝에 내몰린 인류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아 계속해서 정보를 찾고, 모든 소식을 쓸어 모았겠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듣지 않아도 모두가 알 거였다. 크람푸스를 잡기 위해 탐색하고, 소리없이 접근하다 돌진한다는 것을. 도망치는 크람푸스를 끈질기게 추격하며 막다른 골목으로, 건물 안으로 몰아 잡는다는 것을, 늑대의 사냥 습성이 그러하니까.
기지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이 연구소로 안내했다. 인원 파악이 쉽도록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줄을 서달라고 부탁했다. 짝을 짓는 사람들로부터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강설은 맨 마지막 줄에 혼자 섰다. 다행히 인원은 홀수였다.
연구소는 ‘ㅁ’ 형태로 가운데에 정원을 품고 있었다. 직원은 그곳을 ‘정원’이라 말했지만 사실 그곳은 늑대 열 마리를 가둔 커다란 사육장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유리에 붙어 서서 마치 이곳에 늑대를 구경하기 위해 온 사람들처럼 구는 동안 강설은 몇 발자국 떨어져 자신처럼 무리에서 떨어진 채 큰 바위 위에 엎드려 있는 늑대를 바라봤다. 가장 높은 곳에서 다른 늑대들을 내려다보는 저 늑대가 대장일 것이다. 늑대 사회에서도 대장은 고독하고 쓸쓸한 존재라면, 늑대들의 세계에 따돌림이 없다면 말이다. 고독한 건 둘 중에 하나라고 했으니까. 자처했거나 따돌려지고 있거나.
정원을 지나 도착한 연구실에서 직원은 유전자의 완벽한 결합을 연설하며 투입 1일 차부터 34일 차까지의 변화를 보여줬지만 육안으로는 뚜렷한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손발톱이나 털 따위로는 두 종족이 합쳐졌다는 경이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그 정도의 미미한 변화로는 강설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었다.
훈련받는 영상, 심리 안정을 위한 인터뷰, 대원들의 일상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다 훑은 뒤에야 방진복을 입고 표본실로 향했다. 표본실 안에는 죽은 크람푸스가 살이 벗겨지거나, 해부되거나, 냉동된 상태로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황급히 아이의 눈을 가렸다. 직원은 죽었으니 안심해도 된다며 잘린 크람푸스의 머리와 망치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눈을 가린 아이들 앞에서 망치로 크람푸스의 뿔을 세게 내리쳤다.
“우리는 이 뿔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뿔은 부러지지 않았다.
“실험 결과 이 뿔을 자를 수 있는 건 전기톱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뿔 한 쪽을 자르는 데 세 시간 정도가 걸렸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대해야 했던 건 뿔만이 아니었다. 뿔은 그저 창이었고, 이겨야 하는 건 창을 쥔 몸. 총도 뚫지 못하는 두꺼운 가죽과 인간의 운동력으론 잡을 수 없는 속도, 그리고 당해낼 수 없는 힘의 차이. 인류에게 필요한 건 힘이었다. 크람푸스의 목을 비틀어 숨을 끊을 수 있을 정도의. 반은 염소, 반은 악마인 뿔 달린 외계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서는 총칼이 아닌 머리를 뜯어낼 힘이 필요했다.
“시술의 안정성은 보장되었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건대 강압적인 지시는 없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대원들은 전부 가족을, 그러니까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지금의 선택을 했습니다. 모두가 잘 적응했고, 비극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는 같은 비극을 맞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는 그렇게 발전해왔으니까요.”
직원은 확신에 찬 말투였다. 신뢰를 주기 위한 장황한 연설. 신뢰가 분노로 변하면 가장 무서운 적이 될 집단을 사로잡기 위한 말일 뿐이라고, 강설은 맨 뒷줄에 서서 생각했다. 비극을 되풀이하는 거면서. 단지 그 공간이 지구가 아닐 뿐이면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네 가족이 지구가 아닌 우주에서 전쟁을 치를 예정이니 이해하라는 말이면서.
표본실을 지나 마주한 것은 그 너머에 용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문이었다. 폭탄이 떨어져 건물이 다 무너져도 이 문만은 멀쩡할 것 같은 그런 자태. 버스 앞 좌석의 아이와 눈이 또 마주쳤고, 아이는 떨고 있는 엄마와 달리 너무도 평온한 표정으로 계속 강설을 쳐다보았다. 강설은 아이와 눈을 맞추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홀로 온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불쌍해서 봤던 거구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직 한 번도 울지 않은 사람이 신기하거나.
문이 열리자마자 대원들이 가족 품으로 달려들었다. 육안으로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길고 두꺼운 손톱과 웃을 때 드러나는 송곳니 따위가 눈에 띄었고 그 탓에 가족의 품에 안겨 머리를 비비는 행동들이 꼭 개처럼 보였다. 울어도 끼잉끼잉거릴 것만 같은, 강설은 뒤엉킨 가족들이 자리를 뜰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운동장에서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뒤에야 벤치에 앉아 우두커니 제 발만 바라보고 있는 명월을 발견했다. 강설이 다가가 옆에 섰다. 악다구니가 있는 성격인 건 익히 알았지만 그 시술을 저 몸이 버텼다는 게, 대원 중 가장 세서 팀장이 됐다는 게 무엇보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게 눈앞에 있는 명월을 보고도 영 믿기지 않았다.
“어디 돈이라도 떨어져 있냐?”
명월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파랗다. 따뜻하지 않고 시리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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