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집을 떠나고
“아버지, 저 소 한 마리 키울라요.”
“뭔 놈의 소를 키운다고 그러냐?”
“소 한 마리 키움서 집에서 살고 싶당께라.”
“남자로 태어나 공부를 해도 부족할 판에 소를 키운다니 시방 말이나 되냐?”
아버지는 언성을 높였다.
“아버지랑 같이 살면서 일도 거들고, 형 동생들도 보살피며 살라요.”
“듣기 싫다. 소 키울라믄 나가서 키우든지 집을 아예 나가라.”
아버지는 둘째 아들 정모가 집에 들어와 농사짓고 소 키우겠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완강했다. 아버지는 시골에 살았지만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었다. 틈만 나면 한문을 쓰고 읽으셨다.
날마다 라디오를 끼고 사셨는데, 라디오는 아버지를 세상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아버지는 비록 산골벽지에 살아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서울 소식은 물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세상 소식을 꿰뚫고 있었다.
전처에게서 낳은 분가한 두 딸 외에도, 아들 딸 일곱의 대가족을 건사하려니 고단한 일상이었다. 아버지는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오직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식들을 다 가르칠 여력이 안 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들들만이라도 기필코 대학교육까지 마치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아버지는 당연히 둘째 아들 정모가 공부해서 성공하길 바랐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런 아들 딸에 대한 차별과 차등교육이 못마땅했지만 딱히 다른 방도를 찾을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유달리 둘째 아들 정모에게 마음이 쏠렸다. 자식들 가운데 유독 정이 많고 똑똑한 아들이었다.
“정모야, 느그 아버지 말에 너무 서운해하덜 말어라. 다 너를 위해서 그리 말하는 것인께.”
하지만 정모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맨날 공부만 강요하는 아버지가 싫었다. 공부보다 시골에서 터를 잡고 농사도 짓고, 소를 키우며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난 여기서 소 키우면서 살고 싶당께요.”
“아버지가 저리 반대하니 어떡하겄냐. 아버지 성질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소 키우는 게 뭐가 어쩐다고 그란다요.”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마뜩찮아 했다. 미래가 창창한 아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가난하디 가난한 시골에 들어와 소를 키우며 살겠다는 말이 지독히도 듣기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모가 하는 이야기는 무질러 버렸다.
정모는 형 윤모랑 광주 월산동에서 자취를 했다. 정모는 대성초등학교에 다니고, 윤모는 광주남중학교를 다녔다. 윤모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의 4대 명문인 용산고등학교로 진학해서 올라갔다. 그리고 정모는 형이 서울로 가버리자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화순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못마땅했다. 어떻게든 아들들 공부를 제대로 시키려고 했는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윤모는 학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갔고, 똘망똘망해서 공부를 잘할 거라고 기대를 했던 정모는 공부를 포기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농사를 짓겠다고 하니 아버지 마음속에서는 천불이 일었다.
정모는 아버지와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참다못한 정모는 결국 집을 나와 광주에서 버스 차장 일을 시작했다. 버스 차장은 기사 조수 역할이다. 운전 보조부터 승객들 승하차 관리, 그리고 차량 기본정비, 세차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승객이 가득 넘치다보니 버스 문을 제대로 닫지 못한 채 출발하기도 했다. 두 손으로 문 고정대를 간신히 붙잡고 버스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면서 “오라이~~” 하면 그때서야 버스는 출발했다. 비록 몸은 고되고 나날이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정모는 틈나는 대로 학운동 배고픈다리 옆에서 자취하는 작은집 동생 창모를 찾아갔다. 시커멓게 때가 낀 손에는 가끔씩 고등어나 명태가 들려있었다. 어느 때는 버스 토큰을 한 웅큼씩 가지고 와서 창모에게 건네곤 했다. 둘은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 웅크려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정모는 다시 일터로, 창모는 학교로 나갔다.
정모는 버스 차장 일을 몇 년 동안 하더니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그만두었다. 10대 후반부터는 기와공 손씨 아저씨를 따라서 시멘트기와를 만들어 지붕을 얹는 일을 시작했다. 마을에서 기와를 찍고 그것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기와 얹는 일을 배웠는데 일감이 줄어들자 그 일마저도 접었다.
20대로 접어들자 정모는 화순읍내로 나갔다. 화순 향청리에 있는 브로크 공장에 취직을 했다. 월 급여는 8만 원이었다. 이곳에 정착해 일을 하면서 기술도 익힐 수 있었다. 더불어 돈을 버는 재미까지 있었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유독 정이 많은 정모는 부모님과 형제들 생각에 시골집에서 정착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이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정모의 고향마을 화순 동면 동림동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그리 크지 않는 마을에 백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작은 마을이지만 집집마다 대식구여서 수백 여 명이 마을공동체를 이루었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 이외에도 누에를 치거나 가축을 길렀으며, 산나물을 캐다가 시장에 내다 팔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너나없이 궁핍한 생활이었다.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잇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수년간 마을 이장을 지냈고, 한때는 동네 방앗간도 운영했다.
스스로 ‘오산처사梧山處士’라 당호를 지어 불렀다. 완고하면서도 호탕한 선비형으로 가족에겐 엄격하면서도 이웃 주민들에겐 술과 음식을 아끼지 않고 항상 베풀었다. 다들 꺼리는 문중 일을 도맡아 할 만큼 부지런한 어른이었다. 집안이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마을 대소사 일을 챙기면서 자식 교육에는 누구 못지않게 열정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가 주로 바깥일을 보다보니 어머니는 힘들고 고단한 농사일을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이나 해야 했다. 그야말로 뼈가 녹아들 정도로 일을 해야 그 많은 가족들을 겨우 건사해 낼 수 있었다. 단 하루도 편히 쉴 틈이 없었다. 산과 들과 논과 밭을 종횡무진하며 지치고 힘들게 일에 파묻혀 살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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