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삼국지의 무대
중국, 중국인
중국은 땅도 넓고 사람도 많다. 한때 15억 명을 바라본다던 중국의 인구는, 2021년 5월에 발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14억 명을 ‘겨우’ 넘겼다. 신생아 수가 줄어들고 인구의 고령화 현상이 지속되는 탓이다. 특히 생산 가능 인구15~59살가 줄어들자 중국 정부는 한 가구 한 자녀 정책을 완화하여 두 자녀를 허용했던 정책한족 기준에서 자녀 수 제한을 아예 없애기로 했다. 14억 명이 사는데도 인구가 적다며 인구 증가 정책을 펼치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그런데 옛날에도 중국은 인구가 많았을까? 많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다. 중국 인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역대 중국 왕조들의 인구통계가 부정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 2,000년 동안 동서양을 통틀어 전근대국가가 인구통계를 제대로 낸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도 전근대시대에는 제대로 된 인구통계가 없었다.
중국 인구는 전한부터 당나라 때까지 5,000~6,000만 명이었다. 당나라를 뒤이은 북송 때에 이르러서야 1억 명이 넘었다(1-1 그래프에서는 북송시대 중국 인구가 5,000만 명이 되지 않는 것으로 나오지만 1100년경이 되면 1억 명으로 증가한다). 중국에 많은 사람들이 산다는 사실이 실감나는 시기는 1억 명을 넘긴 송나라 때부터이다. 그에 비해 후한 말 삼국시대 인구는 5,000만 명 정도거나 그 이하였다. 당나라 이전까지 중국 인구는 줄곧 5,000만 명 전후였으니 넓은 영토에 비하면 인구가 많았다고 할 수 없다.
후한과 위진 시대로 좁혀 인구 변화를 살펴보자. 후한 초기인 57년광무제 중원 2년의 인구는 약 2,100만 명으로 전한시대의 절반 이하다. 하지만 약 50년 후에는 5,300만 명, 100년 후에는 5,600만 명으로 늘어나 전한시대의 인구를 거의 회복한다. 따라서 후한 초의 인구 감소는 사람들이 죽어 사라진 결과라기보다는 신나라 말 왕망王莽의 경제 실정, 신말과 후한 초의 군웅할거시대에 생긴 일시적 현상, 통계누락에 의한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후한의 인구가 정점을 찍은 것은 환제 때인 157년이다. 하지만 이 5,600만이라는 숫자를 이해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 이때 후한은 외척과 환관의 발호가 장기간 누적되고 극심해져 농촌이 피폐해지고 유민이 대량으로 발생한 시기였다. 다시 말해 환제 때의 수치는 당시 사회의 안정이나 융성, 번영을 나타내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호수와 인구가 정점을 찍은 배경에는 ‘향거리선鄕擧里選’이라는 관리 임용 제도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인구 20만 명당 1명의 인재를 중앙에 천거하는 이 제도 때문에 지방에서는 중앙정부를 속이기 위한 호구 누락을 무작정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다음 시기, 즉 157년부터 서진이 중국을 통일하는 280년까지 인구는 대폭 감소했다. 이러한 양상은 비단 이 120여 년 동안만이 아니라 이후 이어지는 ‘분열의 시기’ 내내, 즉 수나라와 당나라에 의한 천하통일이 있기 전까지, 위진남북조시대 내내 이어졌다.
위나라가 촉나라를 병합한 263년 위나라의 인구는 약 443만 명, 촉나라의 인구는 약 94만 명이었다. 촉나라의 영토 대부분은 익주였는데, 후한시대 익주의 인구는 약 724만 명이었다. 통계대로라면 익주의 인구는 후한 말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8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러한 현상은 위나라와 오나라에서도 일어났다. 280년 멸망 당시 오나라의 인구는 약 230만 명이었다. 그에 반해 후한시대에는 오나라가 차지한 양주 4군단양, 회계, 오, 예장만도 약 341만 명이었다. 이 숫자는 오나라가 차지한 형주 일부와 교지交趾 인구를 제외한 것이니만큼 오나라 땅의 후한시대 인구는 341만 명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촉나라든 오나라든,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두 나라의 통계상 인구는 후한시대의 일개 주 또는 군보다도 적었다).
이러한 인구 격감은 황건의 난과 군웅할거, 이어진 위, 촉, 오 삼국의 항쟁 등 후한 말 이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데 그 원인이 있다. 하지만 전쟁이 모든 원인은 아니다. 십육국시대와 남북조시대에는 수십 호戶가 1호로 등록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달리 말해 1호만 기록되고 나머지는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중앙정부의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 세력이 대두하는 가운데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지방의 호족들은 상당한 수의 가구호를 직접 지배하며 독자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요역을 부과하면서 자기 재산과 다름없는 가구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거부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람에게 부과하는 인두세를 거둘 수 없었다. 조조가 나중에 호가구마다 세금을 부과하는 징세 방식인 호조戶曹를 도입한 배경도 호구 파악의 부실 때문이다. 대략 한 가구의 구성원 수와 소득원을 파악한 후 적당히 어림으로 계산하여 세금을 매겼다. 이는 위진남북조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그런 점에서 조조가 100만 병력을 이끌고 적벽대전에 나섰다는 소설 삼국지의 이야기42~44회는 당시 인구로 미루어볼 때 지나친 과장이었다.
중국은 땅도 넓다. 약 960만㎢로 세계 4위에 해당한다. 미국약 980만㎢과 거의 비슷하고 유럽 대륙약 1,018만㎢보다 약간 작다. 한반도가 약 22만㎢이니 중국은 한반도 44개를 합친 것과 비슷한 크기이다. 그 자체로 하나의 대륙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처럼 엄청난 크기의 영토를 단 하나의 국가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단적인 예로 중국보다 약간 더 클 뿐인 유럽 대륙에는 약 50개의 나라가 존재한다.
‘중국’과 ‘중국인’이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여러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중국中國은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를 뜻하고, 이때 중국인은 ‘한족’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에서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이고, 이때 중국인은 그 국민을 말한다. 한족이 여전히 인구의 95%를 차지하고 있지만 현대적 의미의 중국인은 한족 외에도 여러 소수민족을 포함한다. 오늘날 우리는 중국과 중국인을 언급할 때 이 두 가지 개념을 혼용하고 있다. 평소에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잘 따져보면 그때그때 다른 정의로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이야기의 배경이 될 중국은 한족이 사는 땅, 한족의 나라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가운데 소수민족의 자치구와 만주 일부를 제외한 지역을 ‘좁은 의미의 중국’이라고 할 때, 이 공간의 대부분이 삼국지의 공간인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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