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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따라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이 소리와 손가락에서 자란 새싹에는 분명 어떤 연관성이 있고 그렇다면 알아들을 수 없는 이 소리는 명백한 언어이며 어떤 것들의 대화임을 나인은 확신했다. 나인은 엿듣고 있다. 도대체 어떤 존재가 하는 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리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더 또렷하게 들려왔고 도시 중심부로 갈수록 흐려졌다. 특히 고가 도로 밑을 지날 때는 완전히 사라졌다. 분명 어떤 조건이 있을 것이다. 소리가 나는, 혹은 소리가 그때에만 들리는 조건이. 건널목에서 자전거를 멈춰 세웠을 땐 손가락을 확인했다. 싹은 또 자라지 않았다. 은행나무 아래 서 있는 소년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등교하는 아이들 틈에서 홀로 다른 교복을 입은 소년은 나인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다. 나인은 인사를 받는 대신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나인은 소년의 얼굴을 안다. 소년을 만난 적 있다. 길에서. 불을 켜 놓은 것처럼, 어두운 밤 홀로 밝게 빛나던 풀 위에서. 찰나여서 정말 빛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전거를 멈추고 뒤돌아봤을 때는 어둠뿐이었던 그 길에서. 소년의 행색은 꼭 귀신 같았지만 그렇게 무섭지 않았고, 현실성이 없어 신기하기만 했다.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소년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저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큰일 났다.”
이 일들은 몇 달 전부터 방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곰팡이처럼 스물스물 나타나기 시작했고, 며칠 사이 급속도로 번지다가 바로 어제, 피날레라도 되는 듯 불꽃을 팡 터뜨렸다. 신호가 바뀌자 건널목을 건너는 아이들 틈에 우두커니 서서 나인은 어젯밤 지모가 건넸던 말을 떠올렸다. 요즘 어떤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도 걱정하지 말라고, 그냥 때가 온 거라던. 그럼 도대체 자꾸 환영처럼 보이는 저 소년은 뭐고, 오늘 아침에 봤던 건 뭘까. 열 손가락 손톱 사이에 자라난 새싹은.
역시, 미치는 중인 걸까.
학교 정문은 평소보다 소란스러웠다. 몇몇 선생이 반죽처럼 뒤엉켜 있었다. 자전거를 보관대에 묶어 두고 고개를 돌리고서야 나인은 선생들이 한 아저씨에게 들러붙어 있다는 걸 알았다. 아저씨는 사람들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몸부림치며 누군가를 가리켰는데, 그 손가락 끝에 닿은 남학생 셋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재미난 구경이라도 생긴 듯 정문에 몰려 수군거리는 학생들에게 선생들이 들어가라 소리쳤다. 학생들은 그제야 느린 걸음을 뗐다. 그 인파에 섞여 정문을 통과하던 나인의 어깨에 누군가가 마른 장미 냄새를 가득 묻힌 팔을 둘렀고, 나인은 그 팔의 주인이 미래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구경꾼 보듯이 쳐다보는 거 실례다.”
미래가 손으로 나인의 턱을 쥐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선생님들이 저렇게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거 처음 봐서.”
“싫을 수도 있겠네.”
미래가 중얼거렸다.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실종된 선배.”
미래는 정확한 정보만 전달한다. 여기서의 정확함이란, 출처가 선연시 경찰인 경우.
“그 선배 아빠.”
한때 모두가 공공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부단히 애를 써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사건.
“그렇지만 경찰은 단순 가출로 정리한 사건.”
미래는 누군가가 억지로 묻은 사건을 모른 척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 학교를 다녔던 학생 한 명이 사라졌고 이 년이 지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지만 경찰은 가출로 단정 지었다. 아저씨는 아들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아들의 친구들을 찾아온 것이었다. 세 남학생은 실종된 아이와 안 친하다고, 그런 애랑은 말도 한번 섞지 않았다고 경찰한테 진술했다가 결국 그중 한 명이 사실 자신과 친한 사이였다고 시인했지만, 그건 가출을 실종으로 바꾸지 못했다. 이상했던 건 친했다고 인정한 그 학생이 실종된 학생과 학교에서 붙어 다니는 걸 학교 학생들 중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뿐이다. 이상은 했지만, 엄청나게 대단하지는 않은.
나인은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남학생 세 명을 주시했다. 후문 방향으로 가는 걸 이상하게 보고 있으니 미래가 중지와 검지를 입술에 가져가 숨을 훅 빨아들이며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예전에 쓰레기 버리러 갔다가 봤어.”
중앙 계단을 오르며, 나인은 자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을 번복한 그 선배들을, 그 안에 감춰진 진실을 고민했다. 괴롭혔던 걸까. 친한 게 아니라. 그렇지만 괴롭히는 관계였다면 오히려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대놓고 폭력을 휘두르거나 은미하지만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걸 누구든지 눈치챌 수 있도록 행동했을 것이다. 피해자 주변에서 친구들을 쫓아내 혼자가 되도록. 학교에서 힘들고 외로워지도록 만들었겠지. 그러니 미래의 말처럼 이상한 점투성이였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라면 본인도 겪고 있다고, 나인은 문득 걸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나 몸에서 싹이 자라고 자꾸 어떤 남자애 환영이 보여.”
정신 차리라고 말해 주면 정신이 좀 차려질까 싶어서.
“아프냐?”
하지만 대답한 건 미래가 아니고 현재다. 현재가 두 사람 옆에 섰다. 곱슬곱슬한 머리에 눈이 동그란 현재는 지난 겨울방학 내내 아프다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입학식 날 대뜸 키가 불쑥 자라 등장했다. 미래는 현재를 보고 그때 놀라 빠진 턱이 아직도 종종 아프다고 말할 정도였다. 나인보다는 반 뼘, 미래보다는 한 뼘 정도 작았던 현재가 미래보다 반 뼘이나 커져 등장했으니 턱이 빠질 만도 했다.
미래는 한동안 현재에게 비아냥대며 방학 동안 꽁꽁 숨어 살더니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물었고, 현재는 정말 억울하다는 듯 아파서 누워만 있었다고 했다. 미래는 누워만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컸느냐며 네가 무슨 물만 주면 자라는 풀이냐고 버럭 화를 냈었다. 귀여운 것에 사족을 못 쓰는 미래였으니, 동그랗고 작았던 현재가 불쑥 커 버린 것에 낯섦과 배신감이 꽤 큰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몇 년을 치고받고 싸우며 쌓은 시간이 고작 키 좀 컸다고 배신감에 무너질 리가 없을 텐데, 미래는 현재가 말을 걸자마자 아무것도 아니라면 얼버무리고는 계단을 올랐다. 현재가 그런 미래의 등을 향해 물었다.
“우리 주말에 영화 보는 거지?”
미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 묘한 틀어짐을 나인마저도 눈치챘으니, 자신이 등장할 때마다 말을 멈추거나 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미래를 누나들 밑에서 눈칫밥 먹고 자란 현재가 모를 리 없었다. 그것도 계절이 지나갈 동안. 현재는 미래가 올라간 계단을 바라보다 자리를 떴다.
세 사람의 인연은 나인과 현재가 있던 5반으로 미래가 전학을 온 열세 살 6월에 시작되었다. 담임은 ‘신미래’라는 이름을 칠판에 적으며 우리 반에 현재도 있는데 이러다 과거까지 오는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로 반 아이들의 웃음을 터뜨렸다. 미래는 그때도 외꺼풀 특유의 냉랭한 표정으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인의 옆 분단이었던 현재는 홧홧해진 얼굴을 숨기기에 바빴다. 그리고 하필 현재의 옆자리가 비어 있던 터라 미래는 현재 옆에 앉아야 했다. 아이들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미래와 현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미래는 가방을 내려놓다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현재를 보더니, 대뜸 현재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밀어 올리며 우냐? 하고 물었다. 현재는 코와 눈이 빨개져서는 울먹였다. 둘을 지켜보던 나인이 현재가 원래 잘 운다고 알려 주었고, 미래는 그래? 하고 머리카락을 밀어 올렸던 손을 치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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