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분노’를 맞이하며
내 부모님의 1965년 결혼식은 오백여 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스무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호화행사였다. 사진을 보면 기다란 이브닝가운을 입은 매력적인 여성들과 섬세하게 재단된 검은색 타이를 매고 웃고 있는 남성들이 화려한 모습으로 모여 가로세로 1.5미터의 정사각 테이블을 뒤덮은 케이크 옆에 서 있다.
그날 부모님이 받은 선물 중 가장 값진 것은 웨딩 도자기였다. 흰색과 금색으로 된 접시는 값비싼 의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성인이 되었다는 중요한 상징이자, 결혼이라는 보편적인 의식에, 그리고 바로 이 특정 결혼에 대한 사회와 가족의 승인이었다. 엄마에게 이 그릇들은 자기 정체성의 중추와도 같았다. 한 명의 여성이자 곧 어머니가 될 사람, 가정을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중추. 이 ‘눈으로만 감상하시오’ 그릇들은 내가 자라는 동안 엄마가 세운 그릇의 계급체계 최상위에 있었다. 나와 형제들이 어렸을 때는 정말 특별한 날에만 드물게 사용했고 늘 극도로 조심히 다뤄야 했다.
그것이 내가 열다섯 살이던 어느 날, 엄마가 부엌 밖의 기다란 베란다에 서서 후텁지근한 공기 속으로 그릇을 한 장 한 장, 가능한 한 멀리, 가능한 한 세게 내던질 때 넋을 놓았던 이유다. 당시 우리집은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 끝 언덕 꼭대기에 위태롭게 자리한 건물이었고 부엌은 그 2층이었다. 나는 가벼운 무게 덕분에 한참을 날렵하게 허공을 가르다 저 아래 테라스에 부딪혀 산산조각나는 접시들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한 반면 소리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나마 기억하는 것은 엄마가 체계적으로 접시를 한 장, 한 장, 또 한 장 날리고 또 날려 이윽고 손이 빌 때까지 아무런 잡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내내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누가 보고 있었다는 걸 알기는 했을까. 접시를 다 던진 엄마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와 내게 학교는 잘 다녀왔는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물었다. 나는 내가 본 광경이 대체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지만 물어보기 적절한 때가 아닌 듯했다. 그래서 앉아서 숙제를 했고, 엄마는 저녁을 준비했고,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우리는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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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우리는 어떻게 화를 내야 하는지 배우지 않는 것일까?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듯 나 역시 정보의 공백 상태에서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며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 배웠다. 화가 나면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지, 남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 부모님이나 다른 어른들이 분노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해준 기억은 없다.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은 있다. 질시, 불안, 죄책감은? 있다. 하지만 분노는 없었다. 알고 보니 여자아이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부모들은 아들보다 딸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지만 거기는 분노가 빠져 있다. 잠깐 생각해보자. 감정에 대해, 특히 분노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도록 처음 배웠는가? 분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화가 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권위자나 롤모델과 이야기를 나눠본 기억이 있는가? 당신이 여자라면 답은 “없다”일 확률이 높다.
내가 분노에 대해 일찍이 이해한 것이라곤 접시 던지기 사건이 전부다. 엄마는 줄곧 분노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늘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엄마는 줄곧 침묵을 지키며 자신의 감정을 특정한 방식으로 배출하기를 택했고, 그럼으로써 다음의 귀중한 정보를 전해주었다. 분노는 홀로 느끼는 것이며 입 밖으로 꺼내 다른 이들과 공유할 가치가 없다는 것. 격분의 감정은 혼자만의 비밀이라는 것. 그 감정이 불가피하게 내뿜어져나올 때 그 결과는 무섭고 충격적이며 파괴적일 수 있다는 것.
그날 엄마는 많은 여성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자신의 화를 ‘꺼내놓고’ 있었지만 인간관계와는 동떨어진 채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혼자 있을 때, 그리고 대인관계 문제로 가장 많은 분노를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할지, 또 표현한다면 어떻게 할지를 결정할 때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 즉 가정과 일터, 심지어 정치적 맥락 안에서의 관계를 우선시한다.
접시 던지기는 일종의 대처기제로 볼 수 있지만 분노를 표현하는 효과적인 방법도, 건강한 방법도 아니다. 분노에 대한 대처로 자기침묵을 하거나 무력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분노를 이런 식으로 꺼내는 것은 분노를 가시화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분노를 가시화하는 것은 자신 주변의 세상을 바꾸게끔 도와주는 일종의 변환도구다. 그러나 엄마는 접시를 던져 화가 났다는 내색 없이 화를 낼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착한’ 여성, 즉 까다롭거나 시끄럽게 칭얼대지 않는 여성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삼십오 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우리가 감정에 대해, 특히 여성의 분노에 관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이 사회규범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여전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우리가 분노를 경험할 때 무슨 일들이 일어날까? 화를 느끼는 것은 생리학, 유전학, 인지과정 등의 요소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런 것들이 분노의 기질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당신은 ‘특성분노trait anger’라 알려진 것처럼 급격히 화가 나는 성향일 수도 있고, 천천히 화가 쌓이다 자극을 받아야만 감지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상태분노state anger’라고 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전후 맥락은 중요하다. 자극에 대한 우리의 반응, 평가, 판단은 언제나 기질과 맥락 사이를 오간다. 당신이 어디서 누구에게 화가 나든, 그 감정과 관련된 보다 넓은 사회적 구조소위 ‘정서문화’의 일부 역시 중요하다.
분노는 우리 내부에서 경험되지만, 타인의 기대치와 사회적 금기로 인해 외부에서, 즉 문화 속에서 다뤄진다. 역할과 책임, 권력과 특권이 분노의 프레임을 구성하게 된다. 관계, 문화, 사회적 지위, 차별에의 노출, 빈곤, 권력에 대한 접근성 등 이 모든 요인이 우리가 분노를 생각하고 경험하고 이용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국가와 지역에 따라, 심지어 같은 주의 이웃한 지역사회에서도 분노의 단면으로서 드러나는 행동양식과 사회역학은 제각각이다. 가령 어떤 문화권에서 분노는 좌절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권력 행사에 가깝다. 미국에서 백인 남성의 분노는 위협으로 묘사된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서구권 여성의 분노는 주로 ‘광기’와 결부된다.
분노는 일방향이 아닐뿐더러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정신과 육체, 지성이 무한히 영향을 주고받으며 순환하는 하나의 회로, 즉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와도 같다. 때로는 이를 보이지 않는 곳에 숨은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등 다른 감정에서 비롯했다는 뜻으로 ‘2차적’ 감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신은 분노가 늘 불편함이나 고통,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이 겪는 감정에는 대개 표현되지 않았거나 부적절하게 표현된 분노가 숨어 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 분노가 불안을 부르고 이는 더 큰 분노로 이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분노가 신체에 남아 물리적 불편을 초래하고, 그들을 다혈질에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어 결국 건강을 해친다. 이러한 분노의 피드백 루프는 주로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사회의 불의와 직결되어 있다. 여성들에게 가장 흔한 분노의 피드백 루프 중 하나는 차별로 인해 생긴 것으로, 차별이 부정되면 분노가 격화되어 스트레스 및 그로 인한 악영향은 더욱 커진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분노를 느낀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분노의 경험에 남녀의 차이는 사실상 없다. 차이가 있다 해도 이 연구들은 남성이 화를 더 잘 낸다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든다. 우리가 앞으로 알아볼 여러 이유로 인해 여성들은 남성보다 더 자주, 더 깊이, 더 오래 분노를 느낀다. 분노에 얽힌 대부분의 상황은 물리적 상호작용이 아닌 언어적 상호작용과 관련 있으며, 여성이 남성보다 더 분노와 공격성이 드러나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남성들이 분노를 강력함과 연관짓는 반면, 여성들은 현전히 분노를 무력함과 연관짓는다.
모두가 분노를 느낀다면, 왜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일까? 왜 젠더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남녀가 비슷하게 분노를 느껴도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주변의 수용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은 또한 분노를 유발하는 자극에 생리학적으로 다른 반응을 보인다. 성역할의 요구에 인종 역할의 요구가 겹쳐지기도 하는데, 이 중첩은 우리가 개인의 삶에서 분노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사회와 정치에 얼마나 참여할지 결정해버린다. 그로 인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성들의 반응은 공적 논쟁의 장에서, 분노 역학 분석에서, 그리고 수많은 ‘분노조절’ 해결책에서 일상적으로 무시된다.
이분법적 성도식은 나날이 도전받고 해체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을 깊게 지배한다. 성도식은 우리가 유년 시절에 습득하는 일반화의 체계를 완성하며, 우리 주변의 세계를 단순화하고 문제적 차별을 계속 양산한다. 태어날 때 부여받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를 바탕으로 가정 내 역할, 자질, 책임, 지위 등이 정해진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의 감정을 경험하는지에 더해 타인이 어떻게 그것을 인지하고 반응할지도 분명하게 결정한다.
아이들은 분노가 남성에게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강화해주지만 여성에게는 혼란을 안긴다는 것을 가정에서 빠르게 배워나간다. 화를 내는 것이 여성적인 것과 거리가 멀고 매력적이지 않으며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주로 어릴 때 학습된다. 우리 다수는 화를 내면 주위에 부담을 주며 남들이 우리를 성가셔하고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배운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거나 관심을 얻고 싶은 사람들과 멀어질 거라고 배운다. 분노는 얼굴을 찌푸려 못생기게 만든다고 배운다. 심지어 격앙되고 위험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화를 내는 경우에도 그렇다고 말이다. 여자아이들은 분노를 두려워하고 무시하고 숨기고 변형시키는 방법은 배워도 인정하고 관리하는 방법은 그만큼 배우지 못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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