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민족 만들기
― 주권과 평등
자연적으로 종족 기반 위에서 생겨난 민족은 없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들이 민족을 이룸에 따라, 그 안에 속하거나 그것에 의해 구분되거나 그 지배를 받아온 주민들이 종족으로 묶이는 것이다. 즉 과거에서나 미래에서나 마치 그들이 자연 공동체를 이루기라도 한 듯 그려지는 것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 「민족 형성: 역사와 이데올로기」
누에고치 속 나방처럼, 민족 개념 속에 들어있던 민주주의는 민족주의의 형태를 띠고 이 세상에 등장했다.
― 리아 그린펠드, 「민족주의: 근대에 이르는 다섯 갈래 길」
민족주의nationalism라는 문제를 놓고 사상가들과 학자들이 백 년이 넘도록 머리를 싸매왔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명확한 정의는 이제껏 나오지 못했다. ‘민족’이라는 개념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은 민족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난 뒤라야 가능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개를 펼 것이고, 우리는 그토록 강력하게 근대 문화를 구축해온 이 대단한 집단 정체성을 냉정한 눈으로 되돌아볼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탐구하는 저작물, 특히나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는 저작물이라면, 짧게나마 그것이 다루고자 하는 기본 개념들을 살펴보고 탐구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물론 아무리 사전 설명을 잘한다 해도 앞으로의 탐구가 쉬워지는 것은 아니며 여전히 사람의 진을 빼는 긴 여정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책에서 이용할 개념적 장치들을 설명해주는 일종의 어휘집을 만들어준다면, 장황한 설명이나 종종 일어나는 몰이해를 막아줄 것이다.
유럽 언어들은 ‘민족’n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후기 라틴어 ‘na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는 ‘낳다, 배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nascere’에서 온 것이다. 20세기 전까지 이 용어는 주로 내적 연관성을 가진 크고 작은 규모의 인간 집단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 예를 들면 고대 로마에서 이 용어는 흔히 이방인 집단다른 동물종을 포함을 가리켰다. 중세에는 먼 곳에서 온 학생 집단을 지칭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근대 여명기 잉글랜드에서는 귀족 계층을 가리켰고, 이따금은 공통된 기원을 가진 집단 또는 어떤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데 쓰기도 했다. 19세기 전반에 걸쳐서는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정확한 의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프랑스의 위대한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는 말했다. “역사가들에게는 꽤나 실망스러운 일이겠으나, 사람들이 관습을 바꾼다고 해서 그때마다 어휘까지 함께 바꾸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말에 이렇게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연구에서 시대착오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단 하나는 아닐지라도는 인간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용어 창안 역시 게으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면을 바꿔가며 계속 사용되고 있는 많은 어휘들이 새로운 의미를 덧붙인 상태로 다시 과거에 적용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 머나먼 과거가 마치 오늘날 우리 세상과 유사하고 더 가까운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역사 저작이나 정치 저작을 꼼꼼히 읽어보면, 아니 근현대 유럽의 사전을 읽어보기만 해도, 말의 의미가 용어와 개념의 테두리 내에서 끊임없이 움직여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변화하는 사회 현실을 해석하기 위해 고안한 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예컨대 ‘돌’이라는 단어가 문맥에 따라 다르기는 해도 누구나 동의하는 특정 사물을 가리킨다는 데 우리는 어느 정도 합의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민중people, 인종race, 종족ethnos, 민족nation, 민족주의nationalism, 나라country, 조국homeland과 같은 추상적 개념들은 역사의 흐름과 함께 수없이 많은 의미를 부여받았다. 새롭게 부여된 의미가 때로는 기존의 의미와 상충하기도 했고, 때로는 기존 의미를 보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때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민족’이라는 용어는 근대 히브리어로 번역될 때 ‘le’om’ 혹은 ‘umah’로 번역되었다. 다른 많은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두 단어 모두 풍성한 성서 어휘에서 건져 올린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민족’이라는 중대한 문제로 논의를 진전시키거나, 도무지 모호성을 떨쳐내려고 하지 않는 이 단어를 정의하려 애쓰기 전에, 잠깐 멈춰서 학자들의 어설픈 발걸음을 끝없이 걸고넘어지는 다른 두 가지 골치 아픈 개념을 먼저 살펴보고 가자.
1
‘민중’인가 ‘종족’인가
‘민중이라는 용어의
짧은 역사
이스라엘에서 출간된 역사책들을 살펴보면, 거의 전부가 ‘le’om’nation, 민족의 동의어로 ‘am’people, 민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am’ 역시 성서에서 온 말로, 러시아어의 ‘나로드’Narod, 독일어의 ‘폴크’Volk, 프랑스어의 ‘푀플’peuple, 영어의 ‘피플’People에 해당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유럽어 단어들이 ‘사람들’이라는 복수 의미를 띠고 있는 데 반해, 현대 이스라엘에서 사용되는 히브리어의 ‘am’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통일체 내지 통합된 실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건 그렇다고 해두고, 고대에 사용된 히브리어에서 ‘am’이라는 용어는 다른 언어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유동적인 단어였다. 그런 용법이 지금까지 매우 허술하게 이어져온 탓에, 이 단어를 이념적으로 사용할 경우 안타깝게도 단어 자체를 어떤 의미 있는 논의에 포함시키기가 어렵다.
어떤 개념을 정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개념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장에서 ‘am’이라는 용어의 진화 과정을 상세하게 논하기는 불가능하므로, 일단은 이 단어가 과거에 획득한 의미들의 역사에 대해 몇 가지 언급을 하는 정도로만 끝내겠다.
유럽에 근대 사회가 등장한 18세기 이전에도 대다수 농경사회에는 주변 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엘리트들에게 다양한 집단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상위문화들이 전역에 발달해 있었다. 그런데 상당수 역사책들이 지속적으로 유포하고 있는 바와 달리, 당시의 군주국, 공국, 대제국 등은 결코 그 행정적인 상위문화에 ‘민중’ 모두를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참여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또 그런 참여를 가능하게 할 만한 기술적, 제도적 장치 혹은 의사전달 체계를 보유하고 있지도 않았다. 전근대 세계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한 소농들은 대개 문맹이었지만, 별다른 지장 없이 자기들 지역의 비문자 문화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고 있었다. 통치 도시 내부 또는 인근에 사는 민중들의 경우에는 중앙의 행정언어와 더 가깝게 닮은 방언을 썼는데, 이런 백성들subjects이야말로 당시 ‘민중’이라 불리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정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 지역에서 땅을 일구며 살아가던 이들의 방언은 중앙 행정언어와 미약한 관계만을 가지고 있었다.
인민의 의지가 아닌 ‘왕권신수’神授神授라는 원리가 사회를 지배했기에 통치자들에게는 백성들의 애정이 그다지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민중의 두려움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힘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물론 통치자들은 정부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행정부의 충성심만큼은 확보해두어야 했다. 하지만 소작농들은 그저 잉여 농산물을 바치고 가끔씩 군주와 귀족에게 병력을 제공해줄 것만을 요구받았다. 세금도 설득이나 합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력으로 징수하였으며, 무력이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꾸준한 암묵적 위협을 가하여 징수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권력의 존재가 식량 생산자들권력층에게도 소중한에게 신체적 안위를 제공해주기도 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안위야말로 백성들이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로서, 권위의 존재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금을 징수하고 병사를 징집하는 데만 혈안이 된 국가기구들이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귀족과 정치권력층 같은 상류층의 일치된 이해관계 덕분이었다. 이들 국가기구의 지속성과 상대적 안정성 ― 그저 통치자 한 명에게 왕관을 씌우는 일만이 아니라 왕조를 세우는 것까지 포함하는 ― 은 특정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통해 일찌감치 확보되어 있었다. 통치 중심부 주변에서 번성하던 종교 교단이 초세속적 정당화를 통해 위계구조 내 상류층의 충성심을 강화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신교 내지 이후의 일신교적 종교가 정부 기능을 직접 수행했다는 얘기가 아니다이들 종교가 발흥하게 된 상황은 좀 더 복잡하다. 다만 정부로서는 이런 종교 이상의 것이 필요치 않았고, 예외가 없지는 않겠지만 종교가 거의 언제나 권력의 재생산에 이바지했다는 얘기다.
통치 권력 주변에 신앙이 자리 잡으면서 미약하지만 중요한 사회 계층이 탄생했다. 이 계층은 행정기구 내부에서 자라나서 때로는 행정기구 자체와 통합되기도 했고 나중에는 경쟁하기도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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