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대한 변론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본다”
이 새롭고 끔찍한 발명품에서
또 어떤 새롭고 끔찍한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나 볼까
― 2016년 11월 10일, @missokistic이 올린 트윗
도널드 트럼프 취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2017년 초, 나는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아트 앤드 테크놀로지 콘퍼런스 아이오 페스티벌EYEO Festival에서 기조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아는 다른 많은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나도 선거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작업을 지속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오클랜드는 공동체 의식을 지닌 많은 사람들의 삶을 앗아간 2016년의 고스트십 창고 건물 화재를 애도하는 중이었다. 연설 제목을 입력해야 하는 빈 화면을 바라보며 나는 이러한 시기에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어떤 연설을 하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라는 문장을 입력했다.
그 후에 연설의 토대가 될 구체적 장소를 정했다. 주로 장미 정원이라고 불리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모르콤 장미 극장Morcom Amphitheatre of Roses이었다. 내가 연설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시작한 곳이 장미 정원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정원이 내가 다루려는 내용, 즉 아무것도 하지 않기,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구조, 공공장소의 중요성, 돌봄과 유지의 윤리를 전부 아우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장미 정원에서 5분 거리에 산다. 오클랜드에 살기 시작한 이후 장미 정원은 내가 일과 예술 작업을 위해 주로 사용하는 컴퓨터에서 멀어지고 싶을 때 즐겨 찾는 장소가 되었다. 그런데 선거 이후로는 거의 매일 장미 정원에 갔다. 의식하고 내린 결정이라기보다는 사슴이 소금을 핥으러 가거나 염소가 언덕 꼭대기에 오르는 것 같은 본능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정원과 섬뜩한 세상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를 생각하며 약간 죄책감을 느끼긴 했지만, 이곳을 찾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생존 전략처럼 느껴졌다. 나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대담Negotiations』 속 한 문단에서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무의미한 말들, 말도 안 되는 양의 단어와 이미지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절대로 눈이 멀거나 말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독과 침묵이 있는 약간의 틈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틈에서 사람들은 결국 할 말을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세력은 자기표현을 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표현하라고 강요합니다. 할 말이 없다는 것,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입니까. 오로지 그때에만 말할 가치가 있는 극히 드문 것들을 만들어낼 기회가 있습니다.
들뢰즈가 이 말을 한 것은 1985년이지만, 지금 나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이 정서에 공감한다.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은 무언가 말할 것을 만들어내기 이전 단계로 기능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사치도, 시간 낭비도 아니다. 오히려 의미 있는 생각과 발화의 필수 요소다.
시각 예술가로서 나는 오래전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것의 진가를 알았다. 나는 구글 지도에서 농장과 화학 폐기물 처리장의 스크린숏 수백 개를 모아 오린 뒤 만다라 같은 모양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었다. 리콜로지 SF에서 진행한 〈유예된 물건들의 부서The Bureau of Suspended Objects〉 프로젝트에서는 3개월 동안 버려진 물건 2백 개를 사진 찍어 분류하고 출처를 조사했다. 이 물건들을 열람 가능한 아카이브 형태로 전시했고, 사람들은 각 물건 옆에 붙은 태그를 스캔해 물건의 제작 정보와 재료, 생산 기업의 이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시 첫날, 약간 화가 난 듯한 여성이 혼란스러워하면 내게 말했다. “저기요… 그러니까 실제로 뭔가를 만든 거예요? 아니면 그냥 선반에 물건을 올려둔 거예요?” 나는 종종 나의 전달 수단이 맥락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니 두 질문의 대답은 모두 “예스”였다.
내가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만들 수 있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이 훨씬 흥미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게 〈유예된 물건들의 부서〉 프로젝트는 쓰레기장에 있는 멋진 물건들닌텐도의 파워글러브 게임,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 세븐업 캔, 1906년에 사용한 은행 장부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 물건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줄 핑계였다. 이처럼 어떤 대상에 거의 마비에 가까울 만큼 매료되는 현상에 나는 ‘관찰의 에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소설 『통조림공장 골목』 도입부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스타인벡은 표본을 자세히 관찰할 때 필요한 인내심과 세심함을 이렇게 묘사한다.
해양 동물을 수집하다 보면 어떤 편형동물은 워낙 연약해서 건드리면 부서지고 찢어지는 까닭에 온전한 형태로 붙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럴 때는 그 동물들이 자기 의지로 흘러나와 칼날 위로 기어오르게 해야 한다. 그다음에 살짝 들어 올려 해수가 든 병에 집어넣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을 쓰는 방식도 그와 같을지 모른다. 페이지를 펼쳐 이야기들이 스스로 기어오르게 하는 것.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공미술 작품 중 하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만든 것이다. 1973년에 엘리너 코폴라Eleanor Coppola는 〈창문들Windows〉이라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장소들의 목록과 날짜를 적은 지도 한 장일 뿐이다. 스타인벡의 공식에 따르면 각 장소의 창문은 해수가 든 병이고, 그 창문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스스로 기어오르는’ 이야기들일 것이다. 코폴라의 지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엘리너 코폴라는 샌프란시스코 전역에 있는 수많은 창문을 시각적 랜드마크로 선정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공동체 전체가 고유의 맥락 속에 존재하는 예술 작품은 변형되거나 갤러리로 이동하는 일 없이 제자리에서 관객을 맞이한다.
나는 이 작품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공공미술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보통 공공미술 작품은 우주에서 쇼핑몰 앞에 착륙한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강철 구조물이다. 코폴라는 그 대신 도시 전체에 절묘한 프레임을 씌운다.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는 예술을 인식한, 가볍지만 유의미한 방식이다.
좀 더 최근에 이와 유사하다고 느낀 프로젝트는 2015년 샌디에이고 카브리요 국립 기념지에서 있었던 스콧 폴라크Scott Polach의 〈박수를 권하다Applause Encouraged〉이다. 노을이 내리기 45분 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가장자리에 붉은색 로프를 두르고 접이식 의자를 펼쳐놓은 공간에서 안내원이 관객을 맞이했다. 안내원은 관객들을 좌석으로 안내하며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고 알렸다. 관객들은 노을을 감상했고, 해가 다 지자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후에는 다과가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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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젝트들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각 작품에서 예술가가 만들어낸 구조그것이 지도든 붉은 로프를 친 공간이든, 또는 물건을 올려놓은 별것 아닌 선반이든는 사색의 공간을 열어젖히고, 끊임없이 그 공간을 닫으려 위협하는 습관과 익숙함, 산만함에 맞선다.
나는 장미 정원에서 이처럼 관심을 붙드는 구조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평평하고 네모난 땅에 줄지어 장미를 심어놓은 전형적인 정원과 달리, 이 장미 정원은 언덕 위에 있고 장미와 격자 울타리, 참나무 사이사이로 길과 계단이 끝없이 가지를 뻗는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가던 길을 멈춰 장미 향기를 맡는다. 이 정원을 거니는 방법은 아마 백여 가지는 족히 될 것이고, 앉을 공간도 그만큼 많다. 이 장미 정원은 건축학적으로 사람들이 잠시 머물게 되어 있다.
사색적 걷기를 위해 설계된 원형 미로에서도 이러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로는 그 외양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데, 바로 관심을 압축해서 봉합하는 것이다. 미로는 이차원의 디자인만으로도 공간을 직선으로 가로지르거나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의 행동을 가능케 한다. 그다지 넓지 않은 면적에서 비밀과 다채로운 관점을 드러내는 방식 때문에, 나는 이런 종류의 공간도서관, 작은 미술관, 정원, 납골당에 끌린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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