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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개념의
기원과 형성
‘인종’ㅗㅗraza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을까? 인종은 인종적 범주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온 것이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민족이나 계급 같은 개념이 태초부터 존재한 게 아닌 것처럼 인종 개념도 사회적으로 역사적인 산물이다. 인종을 ‘역사화’할 때, 즉 인종의 기원과 형성을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우리는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 같은 친숙한 인종 개념이 근대에 생겨난 발명품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물론 유럽에서 인종이라는 말 자체는 근대 이전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때의 인종은 인간이 아닌 가축의 ‘혈통’이나 ‘품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인종이 언제부터 인간에게 적용되기 시작했는지 그 기원을 정확히 잡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16세기경부터는 유럽 각국에서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1492년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가 항해를 떠난 해였던 동시에 그라나다 함락으로 레콩키스타Reconquista가 완성된 해이기도 했다. 레콩키스타란 기독교도가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면서 벌였던 재정복 전쟁을 말한다.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무슬림과 유대인은 추방당할 위기에 내몰렸는데 추방을 면하려면 기독교도로 개종해야 했다. 생존을 위한 개종자가 속출했지만, 개종으로 유대교와 이슬람교 문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동화는 쉽지 않았고 거짓 개종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끊이지 않았다. 1481년 카스티야 왕국은 세비야에 최초의 종교재판소를 설치해 이단과 거짓 개종 유대인을 심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487년에는 종교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거짓 개종한 네 명의 유대인이 공개 화형에 처해졌다.
콘베르소converso, 즉 개종한 유대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그들을 우리와 ‘핏줄’이 다르다는 생각을 낳았으며, 문화나 종교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몸속 깊숙이 본질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의식으로 이어졌다. ‘피’가 다르기 때문에 개종해도 동화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심지어 콘베르소와 유대인의 몸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는 기록까지 있었다. ‘피의 순수성’과 ‘상상의 생물학적 특성’에 대한 집착은 인간에게 동물의 혈통이나 품종을 가리키는 스페인어 ‘라사’raza를 적용하도록 이끌었다. 1611년 편찬된 최초의 스페인어 사전은 ‘라사’를 두고 말horse의 품종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무어인이나 유대인 혈통을 가진 사람을 조롱하는 단어라고 뜻풀이했다.
‘라사’는 남유럽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포르투갈어 하사raça, 이탈리아어 ‘라차’razza, 영어 ‘레이스’race, 프랑스어 ‘라세’race가 쓰이기 시작했다. 이로써 이 종은 생물학적 특성을 고유하는 인간집단이라는 의미를 확연히 갖게 되었고, ‘좋은 혈통’과 ‘축복받은 집안’, ‘나쁜 혈통’과 ‘저주받은 집안’ 같은 가치판단도 개입되기 시작했다. 종교·문화적 차이가 생물학·유전적 차이로 전환하는 이런 변화는 근대 인종 개념이 형성되는 데 주목할 만한 첫 번째 계기였다.
두 번째 계기는 분류 기술과의 결합이었다. 17세기 말이 되면 혈통을 의미하던 인종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을 분류하는 데 적용되기 시작한다. 집단 내부의 가계와 혈통을 가리키던 인종 개념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차이에 주목해 인간을 분류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이래, 유럽 세계와 비유럽 세계 사이의 교류와 접촉이 늘어나고 식민화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새로 발견된 몸의 다양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설명할 것인지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인류를 여러 인종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관념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프랑수아 베르니에François Bernier, 1620~1684였다. 프랑스인으로 의사이자 여행가였던 베르니에는 1684년 「인종에 따른 세계의 새로운 구분」Nouvelle division de la terre par des espèces ou races qui l’habitent에서 인간을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라플란드인, 인디언 다섯으로 분류했다. 과학탐사와 탐험이 식민화와 나란히 추진되면서, 유럽인과 비유럽인의 외양적 차이를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욕망을 자극했다. 베르니에가 열어 놓은 인종 분류 방식이 프랑스의 조르주 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 백장Georges-Louis Leclerc, Comte de Buffon, 1707~1788, 스웨덴의 프리드리히 블루멘바흐Johann Friedrich Blumenbach, 1752~1840 같은 자연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자 18세기 말 인종은 유사한 외양과 특성을 공유하는 인간 종의 생물학적 하위 분류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인종 개념은 유럽인이 비유럽인과 만나는 ‘접촉지대’contact zone에서 생겨났다. ‘접촉지대’는 포르투갈·스페인 문학 연구자 메리 루이스 프랫Mary Louise Pratt, 1948~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프랫도 지적하듯이 유럽인과 비유럽인의 만남은 식민자colonizer와 피식민자colonized의 비대칭적 접촉이었지, 결코 예의 바르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진 조우가 아니었다. 유럽인에게만 ‘신대륙’이었던 아메리카는 콜럼버스의 ‘도착’ 이래 학살과 파괴, 저발전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상호적이지만 호혜적이지 않았던 접촉에서 유럽인은 전 세계의 동식물과 인간을 관찰하고 분류하며 정복했다. 아메리카를 비롯한 비유럽 세계는 인종 개념을 생산하는 작업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무력에 의한 정복뿐 아니라 분류학을 통한 비유럽 세계의 유럽 학문 체계 안으로의 통합, 다시 프랫의 말을 빌면 ‘반정복의 정복’anti-conquest conquest이야말로 근대 유럽 주체와 비유럽 타자 사이에서 발생한 만남의 정체였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폭력을 수반했다. 하지만 물리적 폭력만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었다. 식민지 타자를 폭력적 정복으로 제압하는 동시에, 유럽적 세계관과 지식체계 아래로 포섭해 종속시키는 ‘반정복의 정복’은 더 철저한 ‘궁극의 정복’이 될 수 있었다. 린네의 분류학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베르니에 이후 유럽인들은 세계를 시야에 놓고 지구상의 인간을 인종으로 분류한다는 발상에 익숙해졌으며 좀 더 세밀한 분류의 기술도 고안해냈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얼굴 생김새와 피부색이 닮은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생물학적 인종 개념이 정착됐다. 그렇게 인종은 인간 종의 하위 범주로서 지리나 기후 같은 환경요인에 따라 변하지 않는 안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인종론은 한편으로는 분류학의 계보를, 다른 한편으로는 미학의 계보를 그리며 형성됐다. 인종 담론의 구석에는 과학뿐만 아니라 미학사상의 역할도 컸다. 린네의 생물분류와 요한 요하임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의 그리스 조각 찬양은 18세기 중반 인종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두 개의 계기였다. 독일 출신의 미국 역사가로 파시즘 연구의 권위자였던 조지 L. 모스George L. Mosse, 1918~1999는 과학으로부터 미학으로, 미학으로부터 과학으로의 끊임없는 전환과 순환이야말로 근대 인종주의의 특징이었다고 간파했다. 인간 본성과 내면의 아름다움이 신체적 기호로 드러난다는 고전적 미학사상에 따르면 아름다운 몸은 내면의 고귀함과 조화로움의 표현이었다. 백인 유럽인을 미의 기준으로 삼아 줄 세우는 일은 인종적 서열화와 발맞춰 추진됐다. 인종론의 계보를 추적해보면 린네의 분류학과 빙켈만의 미학은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인종주의를 직조해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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