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거미줄
핏속에 거미들이 산다
핏속에서 일하고
핏속에서 잠들고
핏속에서 사랑하고
핏속에서 먹고
핏속에서 죽고
핏속에서 부활하는 거미들에게
피는 무궁무진한 슬픔의 창고
물과 피를 거미줄로 바꾸는
직조의 달인들은
어떤 혈관에든 숨어들어 실을 뽑고 천을 짠다
그러나 너무 밝은 피나
너무 어두운 피는 좋은 재료가 되지 못한다
거미들이 실을 뽑아내기 직전
아주 작고 단단하게 몸을 긴장시킬 때
나는 거미들을 느낀다
내 몸에서 피가 조금 빠져나갔다는 걸 알아차린다
내 피로 뽑아낸 붉은 거미줄은
누군가에게
거처가 되기도 하고 덫이 되기도 했으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거미들은 희미한 진동을 따라 움직인다
피의 만다라에 마악 도착한 어떤 날개를 향해
날개가 파닥거리는 동안
빈혈의 시간은 잠시 수런거린다 고요해진다
입술들을 말한다
입술들을 말한다
자신의 이름과 고향과 사랑하는 이에 대해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죽음에 대해
오늘 저녁 먹은 음식과
산책길에 만난 노을빛에 대해
기후 위기와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대해
생일과 장례, 술과 음악, 책과 영화, 개와 고양이에 대해
마을을 휩쓸고 간 장맛비에 대해 파도 소리에 대해
얼굴도 없이 몸뚱이도 없이
격자무늬 벽에 처박힌 채 입술들은 말한다
입술들은 대체 어디서 모여든 것일까
각기 다른 언어로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기 다른 리듬으로
목소리들은 서로 삼키고 뱉고 다시 삼키고 뱉고 삼키고
들리지 않는 노래를 너무 많이 들었나봐
귀가 먹먹해
먼 들판에 풀벌레 소리 자욱해
못이 박힌 노래를 기에 못이 박히게 들었나봐
귀는 매일 투명한 피를 흘리고 닦아내고 다시 흘리고
격자무늬 벽 속에서 입술들은 말한다
오늘도 잠 못 드는 이유에 대해
왜 자신이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지에 대해
복용해온 약에 대해
또는 피 흘리는 말, 다른 입술들에 대해
그날 이후
출입문의 손잡이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손잡이가 사라졌으니
문은 그대로 벽이 된 것인가
구멍으로 스윽 밀고 들어온 주먹 하나가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어디론가 끌려갔다 돌아와보니
문이 활짝 열려 있다
타인의 시선들로 가득찬 방,
책상과 의자와 침대가 수치심에 떨고 있다
이제 이곳은 내 방이 아니다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지만
출구는 없는 방
문의 공포는
열 수 없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잠글 수 없다는 데 있다
시선의 블랙홀 속에서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이 서성거리는 동안
또 어떤 손이 저 구멍으로 밀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눈동자, 눈동자, 눈동자들,
나는 작살에 찍힌 물고기처럼 파닥거린다
열려 있으면서 닫혀 있는
닫혀 있으면서 열려 있는 방에서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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