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들이 온다. 식탁으로 와 화이를 본다. 큰딸 명현이 고개를 숙이며 슬쩍 올려다보고, 작은딸 래현이 다가와 팔을 잡는다.
“엄마, 이제 괜찮아?”
화이는 앉은 채로 래현을 당겨 안는다. 여덟 살 아이의 달짝지근한 살냄새가 코를 찌른다.
“니 엄마 숨 못 쉬겠다. 와 그리 꽉 끌어안노!”
갑자기 투박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화이는 래현을 감쌌던 팔을 풀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뺀다. 래현의 몸 뒤로, 떡 벌어진 어깨의 중년 남자가 보인다. 탄탄한 체구에 얹힌 복숭앗빛 얼굴.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이 남자는 화이의 남편이다. 최승현이라 불리는 사람. 43일 전 그녀를 집 밖으로 내쫓았고, 43일 만에 다시 만난 지금은 자상한 남편 역할을 천연덕스럽게 해치우고 있는 사람.
“니 뭐 먹을 수 있겠나.”
남편이 의자를 꺼내 앉으며 화이를 건너다본다. 화이는 허리에 매달린 래현을 옆자리에 앉히며 남편을 쳐다본다. 머리가 밝은 갈색으로 물들어 있고, 티셔츠 너머로 보이는 가슴근육이 더 탄탄해졌다. 정기적으로 피부과에 가서 관리받는 피부는 이전보다 더 뽀얗고 탱글탱글하다.
“조금만 먹죠 뭐.”
화이는 앞에 놓인 수저를 잡아끌며 말한다. 남편이 건너편에 자리 잡자 식탁 한쪽에 서서 가만히 엄마를 보던 명현이 그 옆자리로 가 앉는다. 남편과 큰딸이 나란히 자리 잡는 모습을 보는 화이의 마음에 해일 같은 감정이 밀려온다. 이렇게 간단하게 4인 가족의 저녁 풍경이 완성되다니. 여기 앉아 있는 몸이 조금도 제 것 같지 않은데, 한편으로는 완전히 제 것 같다. 가족이라 불리는 사람들, 언제나 너무 넓어 보이는 8인용 식탁, 광활하게 펼쳐진 주방. 화이는 10년 가까이 머물러온 서식지가 너무나 낯설고 너무나 익숙해서 그만 울컥해진다.
“음식 안 짜게 잘해주셨죠? 얘가 회복기 환자거든요.”
식탁에 미역국을 올리고 몸을 돌리던 도우미의 등에 남편의 말이 날아가 꽂힌다.
“아, 네, 그럼요. 한남동에서 말씀도 있고 해서.”
시모 집에서 상근으로 일했던 적이 있는 50대 도우미의 말을 통해 화이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남편이 그녀의 부재를 아파서 잠깐 어디서 치료받고 온 것으로 둘러댔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해 한남동 시모와도 입을 맞추어놓았다는 것.
숟가락으로 밥을 뜨던 화이의 시선이 천장에 가 닿는다. 화이를 내쫓던 날 저녁, 남편은 들고 있던 아령을 집어던져 식탁 위에 달린 샹들리에를 박살냈다. 촛대 모양의 장식물과 수십 개의 전구 유리가 깨지면서 나던 소음,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치던 자신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그날의 풍경을 소환해낸다. 장식이 많이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였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 자리엔 심플한 초롱 모양의 전등 여섯 개가 달려 있다.
“니 마음에 드나.”
남편이 말하며 국그릇에 숟가락을 찔러 넣는다.
젓가락을 들어올리던 화이가 놀란 눈으로 남편을 본다. 방금 저 두툼한 입술에서 나온 말이 뜬금없다. 남편의 입에서 화이의 마음을 살피는 질문이 나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화이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면서,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낀다. 지금 이런 말을 내뱉는 인간이 밥을 먹은 뒤 곧바로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을 테니까. 이유는 모르지만 화이는 알 수 있다. 남편이 자신이 돌아온 걸 반기고 있다는 걸.
“전에 있던 것보다 훨씬 낫네요.”
이렇게 말하다가 화이는 아, 소리를 낸다. 발목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덩이가 느껴진다. 화이의 상체가 아래로 구부러지면서 식탁 밑에 자리 잡은 피조물과 눈이 마주친다. 회색빛 털에 휩싸인 초록 눈과 마주치자 내면에 있던 둑 하나가 무너진 듯 마음이 요동친다. 그때 거실에서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채리야.”
순간 화이의 눈동자가 커지면서 몸에 힘이 들어간다. 채리란 말에 몸이 절로 반응한다.
“아유, 사모님 퇴원하셔서 식사하시는데 얘기 방해를 하네요. 채리야, 이리 와.”
“괜찮아요. 그대로 두세요.”
이렇게 말하며 화이는 발목에 머리를 비벼대는 생물,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 털을 자랑하는 제 반려동물의 살덩이를 느낀다. 집을 떠나 있는 동안 가장 보고 싶었던 건 큰딸 명현도, 작은딸 래현도 아닌 이 아이, 온종일 화이를 졸졸 따라다니는 단짝, 채리였다.
화이는 젓가락을 놓고 의자를 뒤로 뺀다. 입을 벌리고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제 반려동물을 안아 올린다. 손님이 방문하면 싱크대 밑에 숨어 절대로 나오지 않는 이 까칠한 반려동물은 집안 식구들 중 오직 한 사람, 화이에게만 손길을 허락한다. 식구들 모두 이 아이에게 손을 데려다 손에 긁힌 자국을 안고 번번이 패퇴했는데 유일하게 화이만, 응징당하는 일 없이 채리를 만지고, 들어올리고, 볼을 비빌 수 있다. 무릎에 앉은 채리가 고개를 숙이며 정수리를 드러내자 화이가 머리를 내밀어 제 반려생명체의 머리에 부딪힌다.
“채리야. 엄마 보고 싶었지?”
이렇게 말한 순간 화이는 비로소 실감한다. 돌아왔다는 것을. 4인 가족과 한 마리의 반려동물이 있는 60평대 아파트 안주인으로 다시 안착했다는 것을.
2
서재에 앉아 교정지를 보고 있는데 남편이 들어왔다.
“바쁘나?”
“할 말 있으면 해요.”
태연한 척 말하며 의자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팔걸이에 얹은 손이 떨리고 몸에 오한이 일었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을까. 화이는 입을 꽉 다물고 조금 전 공기를 갈랐던 제 음성을 떠올려보았다. 아닐 것이다. 아주 당당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티 나게 겁먹은 목소리도 아니었다.
“어쭈, 이화이 세졌는데?”
남편이 책상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지는 순간, 화이의 몸이 의자를 회전시켜 완전히 창가를 향했다.
“니 그동안 어데서 지냈나?”
머리 받침대에 남편의 손이 얹히는가 싶더니 의자가 스르르 돌아 앞을 향했다. 화이는 벌떡 일어나 의자를 빠져나왔다. 그와 가까이 마주 보는 상태를 잠깐이라도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투 좀 안 쓰면 안 돼요?”
남편은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경상도말을 쓸 이유가 없다. 신성포장의 사장으로 부임하기 전, 남편은 교육 애플리케이션 사업을 차렸다가, 엔터테인먼트 업체를 차렸다가, 정치권에 들어가 일했는데, 보좌관으로 일하던 시절에 ‘모셨던’ 국회의원이 경상도 토박이였다. 상사를 지나치게 경외한 나머지 그와 비슷한 말투를 쓰려고 노력하다가, 급기야 경상도말도 서울말도 아닌 이상한 말을 쓰게 된 것이다.
“할 말만 해요. 나 이거 주말까지 마쳐야 되니까.”
화이는 의자를 제 쪽으로 당겼다. 상대에게 역겨움을 느끼자 경직됐던 몸이 풀리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겨났다.
“이 가스나가, 이게 이게 미칬나.”
남편의 윗입술이 코 쪽으로 벌어져 올라가면서 한쪽 손이 번쩍 위로 들렸다.
“니 내가 이 집에서 다시 나갔으면 좋겠나.”
불쑥, 화이의 입에서 남편의 희한한 억양이 튀어나왔다. 남편은 눈을 크게 뜨고 한동안 화이를 쳐다보더니 천장으로 목을 꺾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이 가스나 봐라. 머라꼬. 다시 나갔으면 좋겠냐꼬!”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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