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시공간을 넘나드는 헌법 여행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
그리스 하면 일단 민주주의를 발명한 나라, 완전한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나라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나라, 바로 그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나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것은 기원전 399년 6월이니까 무려 2400여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직도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아테네 법정을 들쑤신 철학자의 도발’이라고 꼽고 이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책 《세계를 발칵 뒤집은 판결 31》L. 레너드 케스터·사이먼 정 지음, 현암사, 2014을 볼까요. 이 책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에서 스파르타에게 패한 아테네에 스파르타의 영양하에 있는 30인 참주정권기원전 404~430년이 들어섰는데, 이 정권이 공포정치를 하였고 그 후유증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제물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30인의 참주들은 평소 아테네 민주정을 비판해 오던 자들인데 정권을 잡자 부유한 아테네 시민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민주정 지도자 약 1500명을 처형했지요. 결국 시민들이 봉기하여 내전이 일어났고 그 결과 30인 참주정권은 무너집니다. 그런데 30인 참주의 리더였던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가 플라톤의 친척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었으므로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정신적인 대부로 여겨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거지요.
좀 낯선 이론인데요.
소크라테스가 30인 참주들과 가깝게 지냈고, 그 이전에 아테네를 배신하고 스파르타로 간 알키비아데스도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므로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배경에 그런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고발장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았습니다. 기원전 403년,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사면령이 발효되어서 30인의 참주를 지지했던 자들을 고발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고발인 측은 소크라테스의 고발장을 작성할 때 사면령을 어기지 않는 범위에서 고발이 성립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으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정치적 혐의를 씌우기보다 불경죄라는 모호한 혐의로 고발했지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지 않은 죄’, ‘다른 신들을 소개한 죄;’,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가 고발당한 죄명입니다. 소크라테스 자신도 정치적 의도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았고 자신의 종교적 혐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책에서 소개되고 있듯이 소크라테스가 위 고발의 내용을 반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 재판 방식을 살펴보면, 먼저 배심원단은 유/무죄를 가리는 1차 투표를 합니다. 1차 투표에서 유죄가 결정됐는데, 정확한 처벌 내역이 법에 적혀 있지 않다면 고발인과 피고발인은 각각 처벌을 제안합니다. 양측의 제안을 받은 배심원단은 다시 2차 투표를 시행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서는 1차 투표에서 배심원 501명 중 281명이 유죄에, 220명이 무죄에 표를 던졌어요. 표차가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고 유죄 쪽에 표를 던진 사람들도 소크라테스가 위험한 존재이고 무죄 판결을 받는다면 젊은이들에게 계속 악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하여 유죄에 표를 던진 것이지 사형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유죄가 확정되자 고발인 측은 사형을 제안했지요.
소크라테스는 2차 투표를 앞두고 1차 투표 때처럼 다시 긴 변론을 하면서, 자신은 그동안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해 왔으므로 처벌이 아니라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죄지은 것이 없으니 구금이나 추방형을 제안하지도 않겠다고 단언했어요. 배심원들에게 자신에게 사형 판결이나 보상을 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그러다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에 이르러 벌금으로 은화 1므나장인의 100일치 임금라면 받아들이겠다며 한발 물러섰고,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벌금을 30므나로 올려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벌금형만으로는 소크라테스의 활동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배심원단은 2차 투표에서 361 대 140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립니다. 1차 투표에서 유죄에 표를 던진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2차 투표에서 사형에 표를 던졌지요.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이유를 정치적인 이유와는 다르게 설명하는 이론도 있나요?
미국의 제임스 A. 콜라이아코 교수는 자신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재판》김승욱 옮김, 작가정신, 2005에서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철학에 대한 재판이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유와 공동체를 소중하게 생각했지만, 이 두 가지가 갈등을 일으킬 때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자유를 선택했다. 아테네인들은 공동체와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했지만,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대부분의 시민들이 공동체를 우선했다.(콜라이아코, 375)
물론 이때의 자유는 현대적인 의미가 담긴 개인의 자유는 아닙니다. 아테네에서 인정하는 훌륭한 시민의 기준에 따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겠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를 말합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시민의 의무는 거부함으로써 국가에 복종할 의무보다 신에게 복종할 의무를 우선시하는 것입니다.(콜라이아코, 185)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철학과 아테네의 정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고 하지요. 이와 비슷하게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개인주의의 성장에 맞선 구질서의 항의’라거나 전통과 관습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라 이성적인 토론을 거친 도덕적 신념이 윤리적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윤리적 사유의 출발점이라고 보는 견해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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