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모든 도시엔 표정이 있다
이 글은 호기심 많은 치과 의사의 여행에서 시작하여 사회의 쟁점을 건축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건축가의 고민으로 마무리한다. 진료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일생을 살아야 하는 치과 의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일상과는 다른 곳을 찾아 떠나게 되었고 사람들과 함께 관광지, 유적지, 맛집을 다니다가 혼자서 떠날 용기가 생기자 도시의 뒷골목을 다니면서 도시와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주어진 삶을 따라 살며 박사 학위를 받고 개원의로 자리 잡은 후 처음 혼자서 무언가를 결정한 것이 건축 공부였다. 처음에는 건축에 관한 책을 읽다가 점차 빠져들어 건축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남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이왕이면 최신 현대 건축을 배우고자 미국의 사이악Southern California Institute of Architecture, SCI-Arc으로 유학을 떠났고 이후 네덜란드 델프트 공과대학교Delft University of Technology, TU Delft 등 현대 건축의 본고장에서 공부했다. 한국에 돌아와 실무를 익히면서는 건축설계는 뛰어난 아이디어, 설계 과정을 잘 풀어내는 논리, 도면과 시공 같은 건축 실무와 미적 감각 등의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며, 건축 이론과 더불어 현대 철학과 사회학 같은 사회 이론을 바탕으로 해야 함을 알게 된다.
미국으로 건축 유학을 가기 전에는 한국 전통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 전까지는 산과 바다 같은 자연을 중심으로 여행을 했다면 이제는 전통 건축을 하나씩 찾아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보적인 수준의 건축 여행이었다. 전통 건축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다녔으니 아는 것도 보는 것도 모자랐다. 하지만 즐거움은 컸다. 대체로 먼저 전통 건축에 관한 자료와 책을 읽고 나서 직접 찾아가 내용을 확인했다. 훌륭한 교수님이나 건축을 전공하는 동료들과 동행하는 일도 간혹 있었지만 매번 동반하기는 어려워서 주로 혼자 다녔다. 외국에서도 여행이라는 방식으로 건축 지식을 습득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다니는 여행은 한국과는 조금 달랐다. 찾다가 헤매기만 하고 돌아오기도 했고, 엉뚱한 곳으로 가기도 했고, 소심해서 혼자 무턱대고 걸어서 가기도 했고, 지금은 가라고 해도 못 갈 것 같은 곳에 무모하게 가기도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모든 여행을 무사히 다녀왔고, 친절하게도 세상은 나에게 건축에 관한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건축을 배우는 제일 좋은 방법은 안도 다다오Ando Tadao가 했던 것처럼 실제 건축 작품을 살펴보고 만지고 느끼는 것이다. 건축설계과정에서 배운 모든 내용을 확인하는 방법은 결국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실제 건축물을 보러 가는 것이다. 그런 핑계로 세계의 많은 곳을 다니게 되었다. 혼자 혹은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그리고 최근에는 건축학과 학생들과 여러 곳을 다녔다. 그 결과로 건축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과 다양한 자료들이 남았다. 많은 자료를 컴퓨터에 묵혀두고 있다가 이제야 용기를 내서 꺼내 들었다. 오래된 똑딱이 카메라와 DSLR 그리고 최근에는 아이폰에서도 다양한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미지들을 보니 기억조차 안 나는 것도 있고, 자료로 사용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꽤 만족스러운 것도 있다. 디지털 시대의 축복인 듯한 수많은 자료를 하나씩 살펴보는 동안 건축에 대한 지식과 함께, 머물렀던 공간과 장소 그리고 같이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이 덤으로 따라붙었다. 사람들이 관광을 많이 가는 익숙한 곳도 있고, 건축으로 유명한 곳도 있고, 나만 아는 곳도 있고, 나도 잘 모르는데 지나가다가 좋아서 찍은 곳도 있다. 이렇게 도시와 건축 공간은 너무나 다양하며 많은 요소가 모여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이제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내가 경험했던 현대 도시와 건축 공간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이 책에서 나는 내가 관심을 둔 건축물과 도시 공간을 현대 건축에서 주요한 다섯 가지 논점으로 구분했다.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건축, 현상학Phenomenology으로 대표되는 지각과 체험의 공간, 새로운 유형의 구조주의적Structuralism 네트워크로서의 건축 공간, 자연을 모방한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와 복잡계 이론에 기초한 건축, 스케일Scale에 따라 건축에서부터 시작해 도시와 사람의 삶으로 확장되면서 다른 곳과 차이가 나는 독특한 도시 여행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순서와 분류는 내 나름의 관점으로 결정한 것이니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분류는 분류일 뿐 어떤 순서로 읽거나 보든 중요하지 않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헤테로토피아는 현대 건축 디자인이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현상과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임을 알게 한다. 또한 스티븐 홀Steven Holl, 안도 다다오, 헤르조그 앤드 드 뮤론Herzog & de Meuron 등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건축가들의 작품은 직접 체험하여 느껴야 한다. 나의 글솜씨는 그 체험을 다 전달하지 못한다. OMAOffice for Metropolian Architecture의 렘 쿨하스Rem Koolhaas나 MVRDVWiny Maas, Jacob van Rijs, Nathalie de Vries, UN 스튜디오UN Studio 같은 네덜란드 구조주의 현대 건축은 건축을 수학 문제 풀 듯 명쾌하게 풀어나갔고, 그 결과 기존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유형의 건축물이 탄생했다. 이러한 현상학적·구조주의적 건축과는 다르게, 기존 현대 건축의 극단적 파라메트릭 디자인parametric design의 문제점을 자연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바꾸어 풀어나가는 최신 복잡계 건축은 또 다른 현대 건축 분야이다. 일본의 현대건축으로 대표되는 복잡계 건축은 기존의 건축과는 확연히 다르다. 작은 부분들이 모여 만들어진 이 건축물들은 자연뿐만 아니라 컴퓨터 디지털과도 연동한다. 지난 시대에는 알지도 못했던 그리고 있지도 않았던 공간들을 만들어내고 새롭게 제안하는 것 또한 건축가의 몫이다. 이러한 건축이 모여서 도시가 된다. 도시의 풍경과 분위기는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이 사회적 행위를 한 결과이다. 전 세계 수많은 도시는 각자의 표정이 있다. 그중 눈길이 가는 도시를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건축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예전의 나처럼 일상에 만족하면서 살기에 바쁜 사람은 사회에 관심을 많이 두지 않는다. 반면 자신이 사는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사회현상을 바라보며 고민하고 풀어보려고 노력한다.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보려는 건축가의 고민 자체가 건축설계 과정 안에 포함되어 있다. 미술관을 설계할 때는 미술관의 사회적 역할을 찾고, 공동주택을 설계할 때는 주거에 관해 연구하면서 현재 사회의 상황과 문제점들을 찾게 된다. 바로 그것이 건축가라는 직업의 장점이다. 자칫 얕고 넓은 지식으로 현학적이고 아는 체하는 사람인 양 보이기도 한다. 건축가에게는 잡학의 지식보다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특히 현대 건축은 철학, 사회학, 미학, 물리학, 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에서 만든 원리를 가져다가 건축에 접목한다. 그렇기에 건축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문의 끝자락에 손을 댈 수밖에 없는 사람이 건축가이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건축 내외부에서 비판도 받고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사회의 융합을 외면할 수는 없고 건축가들이 뛰어난 이론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는 사회인데 어찌하랴.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수많은 건축 작품을 보고, 느끼고, 도면 보며 공부하고, 친한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배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배운 건축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쌓여 누군가와 나눌 수 있게 되면 시간이 지나 그들이 내 어깨를 딛고 일어나 더 멀리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오늘도 건축 작업을 계속한다.
(중략)
1
헤테로토피아
도시는 일상이 아닌 것을 상상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추모 공간
도시 속 비일상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로 묘역만 한 곳이 있을까? 일상과 비일상이 공존하는 경주 왕릉은 다양한 건축적 어휘와 의미로 지금 시대의 건축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순간의 현재가 거대한 과거가 되는 서울 종묘는 엄숙한 공간을 위해 중앙을 비워내고 바닥을 돌로 채웠다. 옛 위인을 추모하는 전시 공간의 경우 단순한 상징적인 형태만으로 충분함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이차원의 색으로 삼차원의 분위기를 만드는 센다이의 즈이호덴Zhuihoden은 검은색 바탕에 화려한 색을 더해 비통함을 역설적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디자인 접근법은 서양 현대 건축과는 사뭇 다르다. 스페인 이구알라다의 공동묘지와 베를린 시내의 추모 공간은 노출 콘크리트라는 재료 자체로 엄숙함과 두려움이 깃들게 했고, 관의 형상을 반복함과 함께 날카로운 모서리를 만듦으로써 역사의 엄정함을 보여주고 있다.
차라리 인공 산이라고 불러야 할까
거대한 규모의 헤테로토피아가 도시 한복판에서 일상의 공간과 공존할 수 있을까? 이런 장소가 오히려 도시의 풍경을 독특하게 만드는 곳이 경주의 고분군이다. 길 좌우에 집채보다 큰, 작은 산 같은 왕릉들이 잇대어 있는데 천 년 전 고분이 21세기 도시인의 생생한 삶과 하나로 어우러진 풍경이 편안하면서도 숭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분군 중 대표적인 곳이 대릉원인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쪽 노동리와 서쪽 노서리 고분군으로 나뉘어 있다. 고분군 주변은 도시의 일상생활 공간인 주택들로 가득하지만 대부분 낮은 건물들이라 고분군에 가려져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고분군은 주변 맥락과는 다른, 마치 사람이 만들어낸 자연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고분군은 주변 맥락과는 다른, 마치 사람이 만들어낸 자연같이 느껴진다. 고분군을 건축가의 눈으로 바라볼 때 제일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은 무덤의 규모이다. 일반인의 무덤 크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스케일이 마치 산을 연상시킨다. 죽은 자를 기리는 인공 산. 다른 하나는 자연스러운 무덤 형태이다. 땅의 레벨에서부터 명확한 경계 없이 자연스러운 반구가 만들어지는데 대지와 건축의 경계가 모호하고 연속적인 것이 특징인 현대 건축의 대지건축landscape architecture 개념과 1300년 전 신라 시대의 건축물이 공명하는 듯하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유사한 형태를 반복시킨 고분군의 집합성이다. 모여 있는 고분 중간에 서 있는 작은 나무 한 그루도, 고분 사이를 걷는 연인들도 어여쁘다. 왕릉 뒤쪽 배경이 되는 숲은 현실의 세계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가을이면 고분의 경사면에 단풍과 은행잎이 떨어져 포토샵의 픽셀처럼 점점이 덮인다. 혹시 저녁에 휘영청 보름달이라도 뜨는 날이면 신라의 달밤이라는 낭만이 옛 왕릉에서 솟구칠 것이리라.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이질적인 인공 자연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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