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우리, 한번 만나야 하는 거 아니야?
정숙에게서 그 제안을 들었을 때, 모르긴 해도 내 표정은 묘했을 것이다.
그 제안은 정숙 자신도 의도한 게 아니었다. 중고서적을 돌려보는 그룹 채팅방에 얼떨결에 초대되었는데 먼저 그 채팅방에 있던 정숙이 용케 나를 알아보고 개인 채팅을 요청한 것이었다.
너…… 맞지? 하고 정숙이 물었고 나는 그녀의 프로필을 뒤져본 후 그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 그래요, 언니. 이게 얼마 만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연락이 되다니ㅋ
정숙은 이를 드러내고 킬킬 웃는 이모티콘 두개를 찍어 보냈다.
—20년 만이지ㅎㅎ 날 잊어버리지는 않았구나.
우리는 약간 흥분한 상태에서 별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떨었다. 정숙과 다시 연락이 닿아 그런 얘기들을 지껄여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녀와 헤어지던 날 나는 내 평생에 그녀를 두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볕더위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훈이를 주렁주렁 대동하고 헐금씨금 도착한 금성이네 아파트에서, 그 집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입력한 지 한시간도 못 되어 20년간 소식조차 모르고 지냈던 정숙과 문자를 주고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화가 어느 정도 오가고 나서 정숙이 지나가듯 물었다.
― 그래, 지금은 어디 있다고?
나는 우리가 헤어진 뒤 내가 머물다 떠났던 도시 몇 곳을 스쳐 떠올리다가 곧 서울에서 돌아온 후부터 10년 동안 정착해 있던 동북 도시 Z를 언급했다. 결국 한바퀴 돌고 다시 제자리로 온 거죠, 하고 나는 웃었다. 정숙은 자신의 고향이 그리워지는지, 아, 고향 도시가 얼마나 좋니? 나도 기회가 되면 거기서 살고 싶었는데, 라고 약간 감상적으로 답했다.
― 사실 며칠 전에 거기 갔다가 금방 돌아왔거든. 너 Z 시에 있는 줄 알았다면 찾아가볼 수도 있었겠는걸. 암튼 거기 여름은 시원해서 좋겠어.
그래서 나는 내가 정착해 있는 도시는 Z가 맞는데, 지금 이 순간은, 그리고 앞으로 사흘 동안은 동생이 세 들어 사는 아파트가 있는 도시, 상해上海에 머무를 거라고 말했다. 우리 가문의 골칫덩이 노총각 김금성 씨가 드디어 결혼하기로 결정했으므로.
내 문자를 보고 정숙은 잠시 멈춰 있었다. 핸드폰의 빈 대화창에는 나의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다. 1분쯤 지나서 정숙이 다시 말했다.
― 뭐, 상해라고? 그러니까 너 지금 상해에 있단 말이지?
정숙은 자신이 바로 상해에 살고 있으며 이 도시에서의 생활이 올해로 6년차라고 했다. 이번에는 내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배회했다. 그리고 다시 정숙이 말했다.
— 세상에, 이런 인연이. 얘, 우리 한번 만나야 하는 거 아니야?
2
정숙과의 만남이 있기 전의 이틀, 그리고 그 뒤의 하루 동안 나는 까맣게 잊고 살았던 한 시절 — 1998년의 천진天津,무슬림들이 많이 모여 살던 북진구, ‘대외로는 개방하고 대내로는 개혁하자’는 등등소평의 이념이 유례없이 뜨겁고 처절한 가운데 심천을 필두로 한 연해 도시들이 외자 유치에 눈부신 성과를 보이던 그 혁명적인 시간 속에서 다시 사는 듯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것이 좋은 고양이라는 등의 개혁이념이, 사회주의 잡초를 살릴지언정 자본주의 묘목은 뿌리 뽑아야 한다는 모모택동의 문혁 이념을 완전히 대체한 지 20년 남짓 되었고, 마카오의 귀환이 1년 앞인 데다 홍콩은 이미 통행증 출입이 가능해졌으며, 무엇보다 세계를 향한 적극적인 문호 개방이 아시아의 침체에는 아랑곳없이 높은 경제성장률로 이어지던 시기였다. 연해 도시에서는 하룻밤 자고 나면 새 외자기업 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섰고 계획경제 체제에 불만을 가진 공무원이며 보다 큰 전망을 찾아 떠나온 대졸자, 더 비싸게 인력을 팔고 싶어 하는 농어촌의 젊은이와 어쩔 수 없는 인원 감축으로 철밥통에서 밀려나게 된 북방도시의 노동자 등이 밀물처럼 그곳으로 흘러들어 새 회사의 사무실과 공장을 넘쳐나게 메워주었다. 일명 샤하이下海, 취업·창업을 위해 원 근무지를 떠남와 샤강下嵐, 정리해고·실업의 시대였다.
정작 그 시절이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정어리떼처럼 반짝반짝 들뛰기 시작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 무의식이라는 창고 속에서 진작 한줌의 재로 사그라졌을 거라 여겼던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가슴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고 나의 청춘이 꽤 드라마틱한 시대 속에서 연출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정숙을 다시 만나기 전에는 전혀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의 첫 10년은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경력을 쌓기에 급급했고 Z시에 정착한 다음의 10년은 ‘독박 육아’를 해야 하는 중년의 주부로 변신하느라, 서서히 늙어가느라 별 여유 없이 살았다. 서울 숯불갈비집 서빙 시절에 만난 남편은 해산달을 한달 앞두고 나와 함께 귀국했지만 Z시에 아파트 한채를 구입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다른 일을 추진하지 못했다. 긴 로프에 매달려 고층건물 유리를 닦던 그는 아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다시 한국으로 날아가 일거리를 찾아보리라는 결정을 했고, 그 뒤로부터 나는 그에게서 생활비 말고는 다른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는 아내가 된 것이었다.
비행기가 농밀한 안개 같은 구름 속을 지날 때, 나는 문득 20년 전의 천진행 기차 안을 생각했다. 한기가 매섭던 초봄, 아직 성에가 조금 남아 있는 창문, 한적한 겨울 들판과 뼈만 남은 하얀 나무들. 잿빛의 마른 눈이 쌓인 강바닥이 스쳐 지날 때가 있었고 혹간 추위가 산적처럼 웅크리고 있는 저수지도 멀리 보이곤 했다. 창문가의 탁자에는 두꺼운 겨울 스웨터를 입은 젊은 남녀가 마주 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제 내 기억에는 한마디도 남지 않은 자질구레한 수다를 몇시간 동안 내처 떨고 있었다. 탁한 쇳물 같은 낙조가 황량한 어둠에 삼켜져버렸고 그들 가운데에 놓인 탁자 위에는 둘이서 깐 해바라기씨 껍질이 수북이 쌓여갔다. 나는 그녀, 젊은 ‘상아’ 앞 점점 커져가는 해바라기씨 껍질 무지에 잔잔한 슬픔 같은 것을 느꼈다. 불과 몇시간 전에 고향을 떠났으며, 그로부터 아마 영원히 고향을 떠나게 될 그 시절의 내가 느끼는 흥분과 애틋함 과 슬픔, 그리고 곧 도착할 낯선 도시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바로 그 해바라기씨 껍질 무지와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젊고 단순하고 생명력 넘치는 열정의 시절이었다.
(본문 중 일부)
#2020문학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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