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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에 로그인하시겠습니까
2017년 1월 맥도날드에서 배달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플랫폼’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단어였다. 2018년 여름 폭염수당 100원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시작했을 때에도 야외 노동자의 열악한 근무 환경이 주목받았지, ‘플랫폼 노동’이 핵심은 아니었다. 더운 여름 바람이 신선한 가을바람으로 바뀔 때쯤, 플랫폼과 플랫폼 노동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라이더유니온을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배달산업 구조에 대해 듣고 배울 때였다. 플랫폼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열악하다’라는 단순한 표현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
2017년 7월 카카오톡은 키카오뱅크를 출범했고, 2018년 마켓컬리 광고에 배우 전지현이 등장했으며, 2019년 타다는 플랫폼 산업과 4차 산업혁명의 중심이 됐다. 소비자들은 새로운 플랫폼 기업의 등장에 열광했으며, 이들 기업은 소비자 편익과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플랫폼과 플랫폼 노동에 대해 다른 생각을 드러내기 힘든 분위기였다. 진보 지식인들도 플랫폼이 혁신이라고 말했다. 늘 그렇듯 노동은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됐다. 더 큰 혁신을 위한 작은 부작용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가가 플랫폼 노동의 주요 과제였다. 어차피 올 미래이기에 보완책 정도를 마련하는 게 최선이라는 의견이었다.
분기점이 된 건 쏘카 이재웅 대표의 말실수였다. 택시 기사들의 잇따른 분신에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라고 비판했다. 혁신가라고 자부하던 사람의 입에서 너무나 고루하고 구태의연한 표현이 나왔다. 과거 권위적인 지배자들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에 많은 사 람들이 스타트업 기업은 혁신이라는 등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은 ‘플랫폼’이라는 단어가 주는 깔끔한 이미지, 서비스 혁신을 진보이자 좋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고 플랫폼 노동자가 이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니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쳐야 소용없다. 우리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플랫폼이란 대체 무엇이고, 왜 등장했는가?’
노동의 입장이 아닌 자본의 입장에서 왜 플랫폼이 필요한지, 이게 정말로 지속 가능하고 바람직한 방향인지를 고민해야 더욱 풍부한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플랫폼이란
플랫폼을 우리말로 옮기면 ‘정거장’이다. 정거장 경제, 정거장 혁명, 정거장 노동으로 부르면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럼 왜 사람들은 경제나 노동 앞에 플랫폼을 붙였을까? 지하철 정거장을 우선 떠올려 보자. 사람들은 어딘가를 가기 위해 입장료를 내고 정거장에서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린다. 만약 ‘직업’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반드시 들러야 하는 정거장이 있다면 어떨까?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입장료를 내고서라도 ‘일감’이라는 열차를 기다릴 테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거장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린다. 사람들이 마치 구름처럼 모여 있다고 해서 플랫폼 노동을 ‘클라우드cloud 노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이번에 도착한 열차에 모두가 타지 못 할 수도 있다.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 열차를 기다려야 한다.
이것을 지하철이 아니라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스마트폰에 앱을 깔고 로그인입장한 상태에서 일감을 기다린다. 만약 좋은 일감이 떠서 먼저 가져간다면 다행이지만, 일을 가져가지 못한다면 로그인한 채 대기해야한다. 지하철역이나 기차역에서 표를 끊는 것처럼 플랫폼에서는 수수료라는 이름의 입장료를 낸다. 이전에는 돈을 받고 일했다면, 플랫폼 시대에는 돈을 내고 일해야 한다. 물론 이전에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전전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생, 알바, 수습,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입장료를 징수했으므로, 보이지 않던 입장료가 공식화됐다고 할 수도 있다. 플랫폼 노동의 과정을 요약하면 ‘로그인-대기-일감 탑승-수행-대기 또는 로그아웃’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역 주변은 늘 붐빈다. 역 앞에 가판을 차리고 장사하는 노점상부터 높은 임대료를 내고 역사에 정식으로 입점한 점주, 역을 청소하는 노동자와 관리 업무를 하는 직원까지 다양하다. 역 하나가 생기면 주변 경제와 주민들의 삶, 그 도시의 문화까지도 영향을 받는다.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애플리케이션을 중심으로 일감을 중개하는 산업이 만들어낸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변화를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플랫폼’이라는 단어를 고안해냈다.
그렇다면 플랫폼이 만들어낸 변화는 완전히 새로운 것일까? 앞에서 우리는 플랫폼을 정거장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거장 말고 ‘중개’라고 바꿔도 될 것 같다. 중개 자본주의, 중개 혁명이라고 부르면 또 느낌이 다르다. 자본이 플랫폼을 원하는 핵심이 바로 ‘중개’다.
중개 사업은 과거에도 있었다. 전태일이 일하던 1960년대에는 전봇대에 ‘시다구함’이라는 전단이 붙어 있었다. 이 전봇대도 플랫폼이라면 플랫폼이다. 전봇대보다 진화한 형태는 〈벼룩시장〉이다. 길거리에 있는 추억의 종이 신문만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인터넷으로 ‘벼룩시장’을 검색하면 아직도 꽤 많은 구인·구직 광고가 뜬다. 물론 최강의 구인·구직 플랫폼은 알바몬과 알바천국이다. 요즘 알바몬과 알바천국이 아니면 알바 자리를 구하기 힘들다. 알바몬과 알바천국은 반드시 입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독점적인 정거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변화가 있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언제 사람이 필요하고 언제 사람이 필요 없는지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사람이 언제 필요한지를 알려면 사람이 필요한 일이 얼마나 있는지, 나아가 그 일로 만들어진 상품을 소비할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지하철을 관리하는 사람이 시간과 요일별로 승객 숫자를 예측하고 배차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상품 생산과 노동 소비를 예측할 수 있는 시대란 무엇이며, 이것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극단적 비정규직
‘직장’이 아니라 ‘일감’이라는 열차가 오면 타고 간다고 표현했다.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처리하는 것이 플랫폼노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노동자가 너무 불안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이 부도덕하거나 부당하다’는 비난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생각할 문제는 ‘도대체 왜 자본이 이런 시스템을 원하는가’이다. 자본주의 탄생 이후 자본가가 가장 싫어하는 노동자는 놀고먹는 노동자다. 이는 소비자라면 크게 공감할 만한 감정이다. 내가 산 상품을 실제로 써봤더니 흠이 있다. 얼마나 화나겠는가? 그래서 사장이 가장 혐오하는 노동자의 모델이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이나 하는 편의점 알바다. 의자도 빼버리고 핸드폰도 뺏고 싶다. CCTV로 실시간 감시하고 싶은 욕망도 생긴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노동자를 때리면서, 전태일 시대에는 잠 안 오는 약을 먹이면서 일을 시켰다. 하지만 이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때리고 감시하는 것도 막상 하려면 고되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계속해서 감시하지 않아도 노동자들이 알아서 일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테일러-포드주의’다.
테일러주의란 공장에서 노동자의 불필요한 동작과 동선을 없애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규칙과 매뉴얼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소개한 맥도날드가 만든 “감자튀김 소금 뿌리는 높이 20cm” 등의 세세한 매뉴얼이 테일러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보다 강력하게 노동자의 동작을 통제하는 방법이 있다. 노동자의 움직임을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는 속도에 맞추는 것이다. 쉬지 않는 기계를 따라서 인간도 쉬지 않고 일한다. 이게 포드주의다. 이 둘을 합쳐서 테일러-포드주의라고 하는데 대량생산체계에서 노동력 상품을 놀리지 않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도입된 생산 형태다.
그러다 변화가 생겼다. 이 변화를 학자들은 소품종 대량 생산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의 전환으로 설명한다. 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항시 대기할 필요 없이 상품 수요가 늘어날 땐 집중적으로 일하고, 상품 수요가 줄어들 땐 조금 일하는 체계다. 한국과 같은 수출 주도형 산업 구조에서는 수출 환경이 좋을 땐 원청 기업이 하청 공장에 물량 폭탄을 던져서 야근에 특근에 휴일 근무까지 하게 만들고, 수출 환경이 어려울 땐 하청 공장에 물량을 줄여서 칼퇴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이것을 ‘수량적 유연화’라고 부른다. 그 결과 탄생한 게 비정규직이다. 1년, 2년 단위로 쓰다가 필요 없을 때 계약을 해지한다.
그런데 이제 1~2년 단위로 쓰고 버리는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비정규직은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저항도 하고 파업도 벌인다. 그러자 비정규직 노동의 극단적 형태가 탄생한다. 맥도날드가 좋은 예다. 햄버거병 사태가 터져 장사가 안될 것 같으면 맥도날드는 직원들의 근무 시간을 줄인다. 다음 주에는 텔레비전 광고가 나가고 할인쿠폰을 뿌리므로 손님이 몰릴 것 같다. 그러면 근무시간을 늘린다. 노동 시간을 늘렸다 줄였다 한다고 해서 ‘고무줄 스케줄이라고 부르고, 근무 시간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제로아우어’라고도 부른다. 상품의 수요에 따라 주 단위로 근무 시간을 조정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해고해서 노사 분규를 만들 필요도, 악덕 기업으로 욕먹을 필요도 없다.
테일러-포드주의든, 비정규직이든, 맥도날드의 제로아우어든 그냥 도입된 게 아니다. 경영 효율화의 측면, 곧 ‘혁신’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수량적 유연화.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하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다 안다. 수량적 유연화가 비정규직과 별 상관없고, 노동자들 내부의 차별과 갈등을 조장하며, 재계약 여부 등으로 노동자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주 단위로 스케줄을 조정하는 것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에 장사가 잘되는 시간에만 쓰고, 장사가 안되는 시간에는 쓰지 않을 수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플랫폼’이다. 노동력을 눈에 안 보이는 곳에 대기 시켜 놓았다가 내가 필요할 때만 태워서 보내고, 다 쓰고 나면 돌려보내는 역할을 하는 곳, ‘정거장’이 탄생한 이유다.
이렇게 보면 플랫폼은 결코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다. 노동자를 사용했을 때 발생하는 최저임금, 주휴, 연차 등의 비용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회사는 노동자를 고용할 때마다 근로계약서를 써야 한다. 그런데 근로계약서를 쓰면 해고가 문제다. 해고를 하려면 30일 전에 해고 예고를 해야 하며,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서면으로 그 까닭을 설명해야 한다. 초 단위로 쓰고 버려야 하는데 이런 절차를 거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정거장에서 대기하는 노동자를 고용하면 이 대기 시간을 비용으로 지불해야 한다. 앱에서 수만 명을 로그인하게 하는 게 핵심인 사업에서 로그인했다고 돈을 주면 망할 수밖에 없다.
또 그때그때 노동력 수요에 따라 정거장에 대기하는 사람들의 가치가 변한다. 비 오는 날 배달 산업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상여금을 줘서라도 좀 더 많은 이들이 앱에 접속해 일하게 해야 한다. 반대로 봄가을처럼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에는 주문은 적고 일하려는 라이더들은 많다. 쓸데없이 상여금을 많이 줄 필요가 없다. 따라서 플랫폼은 순간순간마다 노동력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수수료 액수를 줄이거나 늘릴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임금유연화가 필요하므로 근로자로 쓸 수가 없다.
게다가 디지털 세계에는 퇴근이 없다. 서버는 잠을 자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로부터 일감과 업무 지시를 받는 노동력도 노동법에서 정한 노동시간의 제한을 받으면 안 된다. 놀고먹는 노동자가 없는 ‘꿈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탄생한 플랫폼에서 노동자는 반드시 사용 자여야 하며, 발전된 기술을 통해서든 자기 착취를 통해서든 끊임없이 감시당해야 한다. 그래서 플랫폼자본주의를 감시자본주의라고 부른다. 플랫폼은 노동법을 절대로 펼칠 수 없도록 노동법 ‘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노동법을 펼치는 낡고 구태의연한 모든 시도는 플랫폼 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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