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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린이책을 만들던 시절, 저희 팀의 원고를 청탁받은 어느 교수님이 메일의 말미에 이렇게 외친 적이 있습니다. 메일 속 문장이었지만 ‘소리 없는 외침’이 분명했어요.
“도대체 어린이란 누구일까요?”
도처에 어린이들이 뛰어다니지만, 어린이를 향해 책을 쓰려 치면 이만큼 낯선 존재가 또 없습니다. 직업이 초등학교 교사거나 초등학생 또래 자녀가 있어서 어린이를 일상적으로 접하는 이들이 아니라면, 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 이들이 어디까지 알고 어디부터 모르는지 도통 감이 안 잡히지요.
청소년책을 쓸 때도 그와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립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청소년을 향해 글을 쓰려고 하면 많은 이가 불현듯 막막한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대체 저들은 어떤 생명체인가? 분명 우리 모두 지나온 시기이건만, 청소년기란 마치 전생의 시간처럼 아득해 보입니다.
그에 대한 질문을 여러 번 받으면서 제 나름대로 한 가지 적당한 대답을 찾아냈습니다. 청소년이 누구냐고요?
“독자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이 저자라면, 책을 읽는 사람은 독자입니다. 서로가 책을 통해 만나는 이상 내가 저자라면 상대는 반드시 독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책이나 청소년책이라고 해서 달라질 수는 없지요. 상대를 독자로 대접하지 않으면 나 역시 저자로 대접받을 수 없습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객관적 거리’가 청소년책에서는 무척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외로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잊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책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어른’이지요. 성인을 향해 글을 쓸 때는 상대가 독자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 이들이라도, 청소년을 향해 글을 쓸 때면 갑자기 ‘저자’에서 ‘어른’의 입장에 서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청소년을 ‘학생’으로, 가르쳐야 할 존재이자 미성숙한 존재로 인지하는 데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써 상대를 ‘독자’로 호명하지 않으면, 아무리 망치로 내려쳐도 두더지가 끈질기게 고개를 내미는 오락 게임처럼 가르치려 드는 ‘어른’의 얼굴이 원고 곳곳에서 시시때때로 고개를 내밉니다. 옆집 아이에게 훈계하는 동네 어른처럼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독자와 저자 사이의 객관적 거리가 무너져서 글이 무척 ‘꼰대’스러워집니다. 저자는 낯모르는 독자에게 친한 척(?)하려고 섣불리 다가갈 필요가 없습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면 됩니다.
책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발판이자 새로운 사람과 사유를 만나는 계기라면, 청소년들은 책을 통해 세상 밖에 있는 다양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할 거예요. 그러니 청소년책 저자라고 해서 굳이 ‘부모의 마음으로’, ‘교사의 마음으로’ 쓰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시작은 그런 마음으로 했더라도 글을 쓸 때만큼은 저자가 되어야 하지요. 자신이 상대보다 어른이라는 불필요한 자각은 제아무리 철학적인 이야기라도 잔소리로 만들고 맙니다. 저자는 그저 저자이기만 하면 됩니다.
청소년 독자의 특징
물론 ‘청소년 독자’에게는 그들만의 남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청소년을 독자로 명확히 인지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그다음에는 이 독자의 특성을 조금 파악해 보면 좋습니다. 청소년 독자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성인 독자와 다릅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느니 하는 생물학적 · 사회학적 분석으로 들어가자면 무척 심오해지겠지만, 글쓰기라는 일에 필요한 주요 특징만을 나열해 본다면 이렇습니다.
첫째, ‘배경 지식’이 별로 없습니다. 경험 지식도, 배워서 아는 지식도 부족합니다. 이유는 따로 없습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축적할 시간이 아직 많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려서 모른다’고 간단히 생각해 버리면 또다시 ‘어른’의 탈을 쓴 두더지가 고개를 내밀기 쉽지요. 그래서 저는 배경 지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외국인에게 역사 이야기를 하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꼭 들어맞는 상황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모르는 게 당연한 사람, 모른다고 함부로 무시하면 안 되는 사람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전달할 수 있지요.
예컨대 우리나라 현대사, 그중에서도 1970~1980년대에 대한 역사책을 쓴다고 생각해 볼까요? 한국에서 살아온 성인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면 박정희나 김대중 같은 인물, ‘한강의 기적’이라 불렸던 경제 성장, 학생 운동, 88올림픽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외국인에게 설명한다면 다르지요. 당시 누가 우리나라 대통령이었고 얼마나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는지, 서울 올림픽은 언제 열렸는지부터 하나하나 시작해야 합니다. 영남과 호남이란 단어를 써야 한다면 그 말들이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부터 설명해야 하지요.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절을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른다는 겁니다. 이는 심지어 40대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절에는 계엄령이 자주 내렸다고 하는데, 계엄령이 내리면 뭐가 어떻게 되는지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저로서는 별로 ‘감’이 오지 않습니다. 경찰들이 갑자기 시민을 막아서고는 무릎 위부터 치맛단까지의 길이를 재는 나라에 산다는 것, 대중가요나 책이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금지곡이나 불온 도서로 낙인찍히는 사회에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충분히 실감 나지는 않습니다.
배경 지식은 물론 그 배경 지식에서 오는 정서적 공감대가 별로 없다는 것은 청소년 독자의 큰 특징입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고 쓰면 책의 첫 문장부터 달라질 겁니다. 예상할 수 있는 공통의 정서적 기반 위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다소 건조한 상태에서 기초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게 되겠지요. 혹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에 대한 분노나 슬픔을 이야기한다면 맨 나중에야 조금 드러낼 수 있을 거예요. 그때에 가서야 슬픔의 공감대가 만들어질 테니까요.
청소년 독자의 두 번째 특징은, 이들이 미래의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즉 현재의 주인공이 아직 아닙니다. 더 거칠게 이야기하면 이들에게는 이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데에 큰 책임이 없습니다. 이는 주로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쓸 때 해당합니다.
이 분야의 많은 책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식으로 쓰입니다. 환경오염 문제부터 기후 문제, 이주 노동자나 난민의 인권 문제, 성 차별, 학벌 사회, 비정규직 문제 등 우리 사회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요. 청소년들에게도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공유하고, 사회를 보는 시야를 넓혀 주고자 하는 뜻에서 이런 문제를 다룬 청소년책이 많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 문제를 짚어 가는 원고를 읽다 보면, 가끔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다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주로 일반 시민과 청소년 시민을 구별하지 않고 쓸 때 그렇습니다. 시민의 과제를 이야기할 때는 대개 그 문제를 만든 원인을 밝히면서 이를 여태껏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시민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성인책에서는 그런 식으로 독자를 설정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즉 어떤 문제가 시민의 과제인 한 ‘어른’인 불특정 일반 시민들을 그 문제를 만든 주체이자 동시에 해결자로서 상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심각한 ‘부동산 공화국’이 될 때까지 시민들은 대체 무엇을 해 온 것일까?”라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요.
그런데 청소년을 그 ‘시민’ 속에 포함해도 될까요? 청소년도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이미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에 그저 던져진 존재입니다. 이 사회가 이렇게 되기까지 어떤 식으로든 기여한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지요. 그래서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시민 속에 청소년을 넣으면 글이 어딘가 이상해집니다. 그 이상한 느낌이 심해지면 우리의 독자들은 자칫 자신이 이 책의 독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게 되지요. 이런 함정을 피하려면 『존재, 감』이라는 책에서 김중미 작가가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러 다니는 이유는 여러분 하고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면서 여러분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예요. 어른들이 망쳐 놔서 정말 미안하지만 결국 여러분이 바꿔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찾을 수 있는 희망에 대해 좀 더 생각해 주면 좋겠어요.”
청소년들은 사회를 이렇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것도 아니면서 개선하는 숙제를 결국 떠맡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문제를 만든 어른들과는 조금 다르게 대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이렇게 ‘어른들이 이렇게 만들어 놔서 미안하지만’이라는 전제를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잔디처럼 펼쳐 놓고 쓰면 좋습니다.
청소년 독자의 세 번째 특징은, 청소년의 스펙트럼이 꽤 넓다는 것입니다. 흔히 중 · 고교생들, 13~18세를 청소년이라고 규정하지만, 실제로는 초등학교 5, 6학년부터 사춘기가 오고 이들도 청소년책의 주요 독자입니다. 초등 고학년까지 생각하면 독자가 꽤 넓어지는 것 같지요.
그런데 초등 5학년과 고등 3학년을 생각하면 한 무리의 독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초등학생은 마냥 어린애 같고, 고3은 성인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이거든요. 그 사이 어디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지 애매하지요. (더 나아가서 청소년의 범위에 대학생까지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특히 대학에서 강의하는 학자들 중에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사이에 경계가 확실하고 문화적 단절도 심했던 이전과 달리, 요즘에는 둘 사이의 지적, 문화적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게다가 대학생들의 사회 진출이 점점 늦어지고 있지요. 이런 의견까지 고려하면 청소년의 범위는 더욱 넓어집니다.)
청소년책을 쓰는 많은 이들이 ‘청소년’이라고 하면 고등학생을 상상합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고등학생은 이제 거의 다 커서 성인과 비슷하게 느껴지지요. 쓸 때도 성인책보다 약간만 쉽게 쓰면 될 것 같고요. 실제로 성인 교양서를 만들 때 많은 출판 편집자들이 “고등학생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써 주세요.”라는 주문을 합니다. 이는 정말로 고등학생까지 책의 독자를 확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전문서가 아닌 대중서를 어느 정도까지 쉽게 써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동원하는 수사입니다. 성인 교양서를 쓰는 저자들은 한두 번쯤 고등학생 독자를 상상해 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고등학생도 읽을 수 있는 성인책’이 아니라 ‘청소년책’을 쓸 때는 고등학생 정도를 상상하면 곤란합니다. ‘거의 다 큰 청소년’을 상상하면 결국 그냥 성인책이 쓰일 때가 많아요. 그러면 중학생 독자와 초등학생 독자를 배제해 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중2나 중3을 기준으로 쓰시라고 요청합니다. 나이로 보아도 중2나 중3은 청소년기의 딱 중간입니다. 한두 살 아래위의 독자까지 포용하기에 적당하지요. 무엇보다 ‘중학생’은 성인과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낮은 연령대의 독자를 상대한다는 긴장감이 들지요. 저는 차마 초등학교 6학년을 상상해 달라고 요청하지는 않습니다. 자칫 어린이책이 될까봐 우려해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많은 성인 저자의 상상력이 초등학생까지 뻗어 나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중2와 중3은 실제로 청소년책의 핵심 독자층이기도 합니다. 청소년책을 가장 활발히 읽는 집단이 바로 이 중학생들이지요. 고등학생에 비해 아직 학업 부담은 적고, 어린이책보다는 수준 높은 다양한 주제의 책이 필요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옆집 중학생은 벌써 어른책을 읽던데요?” 중학생을 기준으로 삼으시라 주문해도, 기어이 이렇게 틈새를 찾는 저자들도 있습니다. 아주 근거 없는 생각은 아닌 것이, 청소년들의 독서 능력이란 천차만별입니다. 중학생 가운데서도 아직 어린이책을 읽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성인 인문서를 읽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변에서 실제로 독서 수준이 높은 중학생을 만난 일이 있다면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쉽지요. ‘저 똑똑한 중학생의 수준에 맞춰서 쓰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어른책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중학생은 정말 극소수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기준으로 쓰게 되면 마치 영재 학교 학생을 위한 수학책을 쓰는 것과 비슷한 일이 됩니다. 독자층이 극도로 축소되지요. 사실상 대중서라고 하기 어려워집니다. 더 많은 독자에게 읽히는 책이 되려면, 그런 소수의 경우보다는 평범한 중학생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럴 ‘능력’이 되는 필자들에게는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초등학생도 끼워 주세요!” 초등학교 5, 6학년은 청소년책 시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실제로 많은 청소년책이 이 독자층에 팔리지요. 아이들은 제 나이보다 어린 연령대의 책을 권하면 자존심 상해합니다. 자기보다 권장 연령대가 약간 높은 책에 도전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요.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많은 수가 본격적으로 사춘기에 접어들기도 해 청소년책에까지 손을 뻗게 됩니다. 이들에게 맞춤한 책이 있다면 청소년책의 독자층이 더욱 넓어질 수 있지요.
하지만 초등학생들까지 감당해 달라는 주문은 아무에게나 드리기 어렵습니다. 의지만으로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전문 지식을 초등학생까지 이해할 수 있게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때로 ‘뼈를 깎는’(?)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초등학생들까지 품을 수 있는 ‘능력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능력은 정말 특별한 것이니 자기 안에서 그런 능력을 발견했다면 절대로 감추지 말고 널리널리 활용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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