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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 폴리틱스
사회에 다양성이 더해지면서 인종차별의 양상 또한 늘어나고 복잡해졌다. 이민자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도 그 속에는 온갖 인종이 있고 출신 국가도 제각각 다르다. 이민자 중에도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일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한 만큼 갚아주는 사람도 있다. 그 공방전을 지켜보는 영국인은 영국인대로 어느 한쪽을 편들며 다른 쪽을 차별하기도 한다. 백인 영국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아들이 백인에게 차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긴 했다. 하지만 인종차별적인 이주민의 아이와 충돌하리라고는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41쪽)
겨울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자 비 내리는 아침이 계속되었다. 내가 운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들은 비 내리는 날도 걸어서 통학을 했다. 그래서 학교에 도착하면 교복 소매와 바지가 흠뻑 젖는데, 그런 아들이 안쓰러웠는지 친구들이 서로 자기네 차를 타라고 꼬드기는 모양이었다.
고층 단지에 사는 팀은 아침에 비가 많이 내리면 무서운 맏형이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준다. (도난 차량이라는 소문도 있다.) 마침 우리 집 앞을 지나가기 때문에 이틀 연속 아들을 태워준 적이 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다니엘이 자기 집 BMW를 타고 가라고 집요하게 아들을 꾀는 듯했다.
“등교는 팀네 형 차를 타고, 하교는 다니엘네 엄마 차를 타는 게 제일 좋긴 해. 팀네 형은 아침에 데려다주면 저녁까지 일을 해서 집에 올 때는 태워주지 못하거든.” 아들은 이러면서 고민했다.
“하지만 집에 갈 때만 태워달라고 하기는 어려우니까, 일단 탄다고 하면 결국 오갈 때 모두 다니엘네 차를 타게 될 거야. 처음 차를 태워준다고 한 건 팀인데, 그렇게 배신할 수는 없어.”
“그냥 아침은 팀네 형, 저녁은 다니엘네 엄마가 너희 셋 모두 차에 태우면 가장 합리적이잖아.”
내 말에 아들은 고개를 좌우로 휙휙 저었다.
“절대로 안 될걸. 걔들은 사이가 좋지 않거든. 어쩌다 내가 둘 사이에 끼어버렸어.”
“친구들 사이에서 쟁탈전이 벌어진 거야? 인기쟁이네.”
내가 웃는데 아들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게 아니야. 그 둘은 서로 혐오한단 말이야.”
다니엘은 부모님이 헝가리 출신 이민자인데도 이민자를 차별하는 말을 내뱉을 때가 많다. 아들도 처음에는 그 때문에 다니엘과 싸웠지만 같이 뮤지컬에서 연기한 걸 계기로 사이가 좋아졌다. 그 뒤로 모범생인 아들이 인종차별에 대해 시끄럽게 잔소리를 한 덕분인지 요즘에는 다니엘도 전처럼 심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언덕 위의 “차브 단지”라 불리는 곳에 사는 팀이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걸 흔쾌히 반기지 않았다. “그 녀석 가족은 반사회적”이라든가 “언더클래스underclass*랑 친해서 좋을 게 없다”고 말하곤 했다. 팀 앞에서까지 그러지는 않는다지만 누군가 나를 편견이 가득한 눈초리로 보면 모를 수가 없다. 팀은 팀대로 “망할 헝가리인”이라든가 “동유럽 촌놈”이라며 인종차별적인 말을 내뱉는다는데, 둘이 마주치면 분위기가 아슬아슬하다며 아들이 한숨을 쉬었다.
*언더클래스: 자원과 기회의 부족을 겪는 하층 계급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영국에서는 일하지 않고 생활보호수당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그래, 둘이 그런 사이면 함께 다닐 수는 없겠네.”
“응, 뭐가 이렇게 골치 아픈지 몰라. 초등학교에도 부모님이 외국인인 아이가 많았지만 귀찮은 일은 없었는데.”
“가톨릭 학교 아이들은 국적이나 민족성이 달라도 가정환경은 비슷해서 그랬던 거야. 다들 아빠 엄마가 다 있고 무상급식 대상자도 없었잖아. 하지만 네가 지금 다니는 중학교에는 국적이나 민족성과는 기준이 다른 다양성이 있어.”
“다양성은 좋은 거 아냐?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는데?”
“맞아.”
“그럼 왜 다양성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거야?”
“원래 다양성이 있으면 매사 번거롭고, 싸움이나 충돌이 끊이지 않는 법이야. 다양성이 없는 게 편하긴 하지.”
“편하지도 않은데 왜 다양성이 좋다고 하는 거야?”
“편하려고만 하면, 무지한 사람이 되니까.”
내 말에 아들이 “또 무지한 게 문제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전에 길에서 인종차별주의자의 욕설을 들었을 때도 내가 그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어렵고 귀찮지만, 무지를 없애기 때문에 좋은 거라고 엄마는 생각해.”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아들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불분명한 얼굴로 치즈 간식을 우적우적 먹을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 또다시 비가 많이 내리던 아침, 팀이 전화를 걸어 여느 때처럼 형 차로 데리러 가겠다고 했지만 아들이 거절했다. 잠시 후 다시 한번 휴대전화 벨소리가 띠링띠링 울렸다. “됐어, 오늘은 괜찮아. 아빠가 차로 데려다준대.” 하는 아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마 두 번째 전화는 다니엘 같았다.
“아빠가 데려다준다니, 밤새 운전하고 퇴근해서 막 곯아떨어졌는데?”라고 말하자 아들이 “알아, 걸어서 갈 거야.” 하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영국인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남자는 진짜로 그런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우산을 들려주면 잠자코 쓰지만, 중학생이 되자마자 “남자가 우산 같은 걸 쓰고 다니면 쿨하지 않아.”라며 거부하기 시작한다.
“우산 쓰고 가! 다 젖잖아!” 우산을 들고 외치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아들은 빗속의 도로로 뛰쳐나갔다.
아마 지금 저 아이에게 다양성이란 비를 쫄딱 맞는 것인 모양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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