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독서문화생태계에서 지식문화마을공동체로
(중략)
마을살이 정보의 샘
AI시대에 도서 검색 능력은 단순 기술 노동으로 전락하고 있다. 20세기의 도서관에서는 서가의 위치를 알려 주고 책을 찾아주는 일련의 노동이 사람이 해야 할 꼭 필요한 서비스였다. 하지만 곧 스마트 자료실이 대중화될 것이다. 검색 모니터나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찾는 책을 검색하면 책이 꽂힌 서가의 위치가 화면에 뜬다. 이미 기술은 개발되었고 상용화를 위한 시스템 설치 비용만 저렴해지면 전국에 삽시간에 보급될 것이다. 책 중심의 도서관은 사람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원구에서 지향하는 사람 중심 도서관에서는 여전히 사서들의 역할이 필요하고 도서관은 지식문화 플랫폼, 마을정보 플랫폼으로서 마을과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공공도서관의 사서
‘인공지능을 활용한 도서 큐레이션’, ‘생애주기별 도서 큐레이션 플랫폼’, ‘공공도서관의 인공지능AI 도서 추천 시스템’ 2019년 도서관 대회에 등장한 AI 사서의 모습이다. 어느 정도의 깊이로 책을 읽고 추천하는지는 직접 사용해 보지 않았으니 장담할 수 없다. AI의 장점을 살려 동일한 책에 대해 서평가들이 쓴 수백 편의 서평을 읽고 뽑아낸 큐레이션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공공도서관 실정에서 사서가 책마다 수백 편씩 전문 독서가들의 서평을 읽고 책을 추천해 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료실 주제 사서는 일선 사서들이 앉아 보지도 못하고 AI 사서에게 넘겨주게 될 것이다.
책이 아니라 정보를 다루는 도서관을 추구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정보 검색에서는 구글을 따라갈 수 있을까? 사서가 이용자를 대신하여 구글 검색을 해 주는 것으로 사서의 업무를 채울 것인가? 아무리 시스템이 자동화되어도 나이가 든 어르신들을 위한 검색 대행 서비스는 잔존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노동이 사서가 해야 할 대표적 지식노동이라고 우길 수는 없다.
인류 역사에서 도서관은 글자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동굴 생활을 하던 원시 인류에게 도서관은 각종 그림 부호로 가득한 동굴 벽면이었을 것이고, 갑골문자 시대에는 갑골 보관소가 도서관이었을 것이다. 파피루스 시대, 점토판 시대, 양피 시대를 거쳐 종이 시대, 특히 인쇄술의 발달 이후 비로소 도서관은 공공도서관 시대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공공도서관 시대로 오기까지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자료 수집가, 기록자, 학문연구가, 교수, 자료 관리자, 자료 서비스 사서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 왔다.
그럼 4차 산업혁명 시대 마을공공도서관 종사자의 업무는 어떤 것으로 표현될까? 책 서비스 중심 도서관은 빅데이터와 AI 기반 자동시스템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 반면 사람 중심 서비스 도서관은 쉽게 자동화되지 않는다. 사람보다 뛰어난 감성을 가진 AI 로봇이 나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공공도서관은 사람 중심 도서관 경영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부터 21세기 한국의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도서관 운영 방향은 왕과 같은 권력자나 정부 정책 입안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하지만 앞으로 대중지성 시대, 주민주권 시대의 거점 공공도서관과 마을공공도서관의 운영 방향은 지역주민들이 결정할 것이다. 주민들은 이제 단순 서비스 대상자가 아니라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서관을 원한다.
공공도서관 종사자들도 이러한 변화에 발맞출 필요가 있다. 문헌정보학과가 개설된 대학들은 공공도서관에서 실제 필요한 대민 서비스 과목을 개설하면 어떨까? 커뮤니케이션 과목과 마을조사정보수집, 주민조직론, 지식문화공동체론, 작은도서관 경영론, 마을민주주의론 등의 과목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 책 중심 도서관이든 사람 중심 도서관이든 기존 20세기형 사서의 역할은 급속한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공공도서관의 마을정보 서비스
거점공공도서관과 마을공공도서관은 정보서비스 분야에서는 어떻게 사업을 진행해야 할까?
첫째, 마을 정보를 수집, 가공, 저장해서 마을살이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즉 마을살이 정보의 샘 역할을 해야 한다. 마을정보의 구축 과정도 이제는 주민 주도의 마을정보 플랫폼이 필요하다. 마을 정보의 콘텐츠 생산자는 당연히 주민이다. 운영자인 사서는 마을정보 플랫폼의 콘텐츠가 풍부해지도록 주민들의 접속 형태를 더 다양화하고 초기 마중물 정보를 취합하여 재배치해야 한다. 누락된 정보는 보충하고, 주민 기자단조사단이 잘 운영되도록 지원하고 고무하는 등의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플랫폼 알고리즘을 지속적으로 고도화시켜 나가고 빅데이터 처리 능력을 향상시켜 나가는 기술적 업무도 병행해야 한다. 마을정보 플랫폼이 전산상으로 구축되기까지는 예산 문제 등으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전산시스템이 구축되더라도 현장의 마을정보는 사람이 수집 가공할 수밖에 없다.
주민들의 플랫폼 접속이 전면화되어 주민이 스스로 마을 정보를 입력하는 등 주민 주도 콘텐츠가 양산되기까지 사서의 역할은 온오프라인을 망라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사서는 주민 기자단을 꾸리고 마을의 돌아가는 사정을 주제별로 정리해 주는 마을정보 전문가, 마을네트워크를 넓혀 나가면서 마을활동가들을 연결해 주는 네트워크 전문가, 지식을 기반으로 주민들을 위한 좋은 프로그램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프로듀서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정보 플랫폼에 모든 관내 주민이 접속할 수 있도록 오프라인 홍보도 해야 한다. 사서는 동네 복덕방이나 슈퍼마켓처럼 만능 연결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특별한 점이라면 지식과 정보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주민들이 도서관에 가거나 도서관 마을정보 플랫폼에 접속했을 때 마을살이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다 있다면 도서관은 절로 마을의 중심이 될 것이고 사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직업군이 될 것이다. 더불어 마을 주민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높이기 위해 주민 맞춤형 독서 전문가가 될 수도 있다. 특정 분야의 이론적 전문가가 아니라 관할 주민들의 취향을 잘 파악하고, 취향에 맞게 각종 지식 기반 활동을 계발하고 소개하는 정보 전문가 말이다.
도서관 직원들은 성향이 내성적인 경우가 많은 편이다. 외향적이라고 마을사업을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내성적이지만 차분하게 마을에 나가 주민들과 함께 조사를 하고 지역 정보를 수집하고, 조용히 주민들의 어려움을 잘 분석하고 실제적인 필요를 잘 파악하여 내실 있는 주민정보 서비스를 할 수 있다. 이제 공공서비스는 권위적인 리더십보다 주민이 주인이 되고 도서관 직원은 훌륭한 조력자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모든 도서관 종사자들은 자신의 장점을 잘 활용하여 사람 중심, 주민 주체의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주민과 궁합이 잘 맞는 지식노동자가 되어 지식문화마을공동체를 종횡무진하기를 바란다.
둘째, 지식과 정보의 샘으로 공공도서관에서 해야 할 일은 일상적 마을 정보의 수집 및 제공 외에 마을아고라 등 마을에서 진행되는 각종 토론 모임에 주제별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현재는 필요한 정보를 스스로 찾아서 참고하지만 이슈나 토론의 질이 점차 높아지면 좀 더 전문성 있는 자료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또한 그동안 도서관의 북큐레이션이 사회적 이슈 중심의 계몽적 성격이 강했다면 앞으로는 주민의 현실적 요구에 대한 맞춤식으로 큐레이션과 정보 제공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정보를 중심으로 서비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2019년 노원의 6개 거점도서관과 1개 휴먼라이브러리는 ‘마을살이 정보의 샘’으로 가는 기틀을 다지고 있다.
셋째,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더욱 벌어지는 주민간 정보 격차의 해소를 위한 주민친화적 정보통신기술ICT 리터러시 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론은 기업 광고의 지배를 받고 있다. 한 예로 꼭 필요하지도 않은 신제품 5G 스마트폰을 할아버지나 아이들까지 사야 하는 분위기다.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살려 주고 국제 표준을 선점해야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채 습득하지도 못한 기술이 금세 사라지고 새로운 상품이 나온다. 새로운 제품에 대한 사용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졸지에 미개인이 된다. 공공도서관의 힘으로 신제품, 신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는 다국적 기업의 옷자락을 잡아당길 수는 없다.
그렇지만 급격한 정보 문맹의 확대에 대한 대책의 수립과 해소 활동은 해야 하지 않을까? 짧아지고 축약된 20대 은어를 배우기보다 50대 이상이면 겁부터 내는 ICT 리터러시 문제를 마을공공도서관에서는 중요한 사업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교실 한 귀퉁이에는 아직 한글도 못 읽는 아이들이 있고, 그냥 들이닥치는 4차 산업혁명 기술은 다수 국민의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고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몰두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국가 경쟁력을 얘기할 때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 보건복지부는 최소한 보통 국민들을 위한 정보통신기술ICT 리터러시 사업 예산을 편성하고 일선 공공기관에 사업 아이디어 공모를 진행했으면 좋겠다.
마을사업 시작 이야기
노원구 구립도서관 마을사업의 역사는 길지 않다. 서울시에서 마을공동체 사업을 2012년부터 시작한 것에 비해 노원구 구립도서관에서는 2012~2013년, 2년 동안은 삼짓날, 단오, 백중, 동지 등 전통 절기 행사를 도서관에 오는 이용자와 함께하는 정도로 마을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다 2015년부터는 노원독서문화생태계 구축사업을 통해 독서를 매개로 주민네트워크를 구성했다. 2016~2017년에 구상 단계를 거쳐 본격적인 마을사업으로의 전환은 2018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16년 대구 전국도서관대회에서 노원구청장의 특별 강연이 있었다. ‘마을공동체활성화를 위한 공공도서관의 역할’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때가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구립도서관의 역할을 내부에서 이론적으로 정립한 단계라 할 수 있다.
2017년부터 시범 사업이 시작되었다. 2017년 월계도서관은 ‘길 위의 인문학’ 사업으로 ‘마을과 인문학 잇기’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월계도서관 사업은 ‘길 위의 인문학’ 주관 기관으로부터 최우수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었다. 문제는 프로그램 기획은 좋았으나 참여한 주민들이 소수였고 프로그램 이후 지속적인 마을활동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같은 해, 상계도서관에서는 상계1동 마을계획단과 협업으로 ‘마을여행길라잡이’ 양성 과정을 진행하였고, 이 팀은 2019년 세 번째 양성 과정을 개최하고 마을여행 해설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월계도서관의 마을 사업이 최우수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었음에도 지속되지 못한 것에 비해 상계도서관의 마을여행길라잡이가 마을활동으로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첫 번째는 후속 활동을 지속할 마을활동가의 존재와 부재의 문제였다. 상계도서관의 경우 ‘상계1동 마을계획단’이라는 주민마을활동가들과 결합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마을계획단 활동가들이 양성 과정 졸업생들을 묶어 마을여행 해설 사업을 지속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활동공동체를 만들어냈다. 반면, 월계동의 경우 수강생 중에 프로그램 이후 활동을 이끌어갈 활동가가 존재하지 않았고 졸업생 중에서 역할을 자임해 주는 활동가를 발굴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마을사업의 특징상 도서관 사서들이 조력자는 될 수 있지만 마을공동체의 활동가로 뛸 수는 없다. 그래서 도서관 마을사업은 마을 활동가와 협업이 중요하다. 프로그램 졸업생들이 이후 활동을 지속하면 도서관의 해당 프로그램도 2기, 3기 계속 수강생을 받을 수 있고 후속 프로그램 혹은 보수교육까지 시행하여 자연스럽게 지식기반 마을공동체 플랫폼으로 자리 잡게 된다.
두 번째는 프로그램이 구체적 사업을 목표로 진행되는지, 소양 교육의 성격으로 진행되는지에 따른 차이였다. 상계동의 ‘마을여행길라잡이’는 구체적 사업을 목표로 프로그램이 구성되고 마을과 도서관이 결합한 협업 형태였다. 따라서 도서관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서동아리 회원들이나 다른 회원들이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이후 마을활동가들과 도서관활동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갔다. 반면 ‘마을과 인문학 잇기’ 프로그램은 마을 관련 인문학 강의의 성격이다 보니 이후 어떤 목표를 갖고 지속되지 못했다.
두 개 도서관의 경험을 토대로 2018년 9월부터 노원구 6개 구립도서관은 각 권역별로 마을 조사를 시작했다. 준비 단계로 『함께 만드는 마을공동체, 함께 누리는 행복한 삶』을 비롯하여 도서관마다 3~6권의 관련 책을 읽고 토론하였다. 마을 조사는 꼼꼼한 보고서를 쓰기보다는 여행하듯이 코스를 정해 돌면서 꼭 2곳 이상 점포든 단체든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고 오는 활동이었다.
내근에 익숙한 직원들이 도서관 밖으로 나가서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뭔가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사서들은 도서관에서 심심찮게 발생하는 악성 민원에 대한 기억이 남아 도서관 밖의 활동은 더 힘들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었다. 다행히 마을 조사 이후 직원들은 사업을 시작하기 전의 불편한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변했다.
“생각보다 주민들과 얘기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어요.”
“초안산 내시묘의 유래도 잘 말씀해 주시고요, 어디서 왔냐고 물으셔서 도서관 직원들이라고 하니 고생이 많다고 격려도 해 주셨어요.” 그중 월계도서관 직원들은 ‘마을과 인문학 잇기’라는 마을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어 사전 자료 토론도 심도 있게 하고 마을 조사도 잘 마쳤다. 마을 조사를 통해 직원들의 마을에 대한 이해와 친근감도 높아져 막연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지역사회 단체와의 네트워크 사업은 관장들 중심으로 진행해 왔다. 관장들은 지역아동센터나 아파트 노인정을 방문하기도 했다. 첫 시도는 무척 어려우나 일단 발길을 트고 말문을 열면 어렵지 않은 것이 마을 관계다. 다른 직업군에 비해 도서관에 대한 주민들의 태도는 대단히 호의적이다. 지식 노동에 대한 전통적인 선망과 책을 읽는 사람들에 대해 배려하는 전통이 700년 이상 내려온 대한민국 아닌가?
마을은 언제든지 도서관을 안아 줄 준비가 되어 있다. 도서관이 마을을 조사하고 주민과 함께 마을정보를 수집하고 마을을 전시하고 마을을 기록하고 보존한다면, 마을은 도서관을 기꺼이 안아 줄 것이고 도서관은 마을로 녹아 들어가 거점이 될 것이다. 그렇게 2018년 마을정보 수집과 서비스를 위한 기초 작업은 완료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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