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양육’이라는 말을 듣고 경제학을 떠올릴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은 사람들이 어떻게 의사 결정을 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며, 부모로서 내리는 의사 결정은 우리가 살면서 직면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의사 결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몇 명의 자녀를 낳을지, 양육에 얼마나 투자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아이를 키울지 등에 대해 부모가 내리는 의사 결정을 이해하는 데 경제학이 매우 유용한 도구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통상적인 양육 서적과 달리 이 책은 양육 지침서가 아니다. 사회과학자로서 우리는 부모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실제로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그 기저에 있는 요인과 동기를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여러 양육 방식의 장단점을 부모가 이미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즉, 부모가 그러한 지식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최선의 이익을 가져다주리라고 판단되는 방식을 선택한다는 전제하에 분석을 수행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고도로 집약적인 ‘헬리콥터 양육’아이의 머리 위를 ‘뱅뱅 돌면서’ 아이의 삶을 촘촘히 관찰하고 관리하는 방식의 양육이 부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부터 과거에 여성 1인당 평균 자녀 수가 급감하고 핵가족 형태가 떠오른 ‘인구 전환’은 왜 나타나게 되었는지까지, 양육과 관련해 관찰할 수 있는 여러 현상을 이해하는 데 경제학이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모든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했다
실증 데이터와 경제학자로서 배운 학문적 지식 외에 부모로서, 또 어린 시절에 자녀로서 우리가 직접 경험한 바도 이 책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먼저 간략히 우리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럽 출신 연구자들로, 현재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환경과는 지리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매우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또한 성인이 되어서는 일 때문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야 했던 덕분에 상이한 문화와 상이한 양육 방식을 접할 수 있었다. 시대별, 국가별로 자녀를 키우는 방식에 엄청난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우리는 경제학 및 여타 사회과학에서 배운 지식을 양육 행태 연구에 적용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티아스는 독일 북서부 니더작센주의 한 마을에서 자랐다. 주도인 하노버 인근에 있는 전형적인 중산층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주 정부 공무원이었고 부업으로 자그마한 가족 농장도 운영했다. 마티아스의 어머니는 교사였지만 농장 일과 아이를 키우는 일이 너무 바빠서 마티아스가 어렸을 때 교사 일을 그만두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지역의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마을의 장을 지냈다. 마티아스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을 졸업하고 24세에 미국으로 건너와 처음에는 미니애폴리스에서, 그다음에는 시카고에서 공부했다.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캘리포니아에서 첫 직장을 잡았고 미국인인 마리사와 결혼했다. 마리사는 TV와 영화의 캐스팅 감독이다. 마리사와 마티아스는 LA에서 두 아들 오스카와 루카스를 낳았고 2010년에 시카고 인근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시카고 북쪽의 부유한 교외 지역인 에반스턴에 살고 있으며 2013년에 여기에서 셋째 아들 니코를 낳았다. 현재 오스카, 루카스, 니코는 각각 10세, 7세, 4세이고 모두 독일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시카고에 있는 독일국제학교에 다닌다.
이탈리아 출신인 파브리지오는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이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Making Democracy Work》에서 시민 참여 정신이 높은 곳으로 꼽은 에밀리아로마냐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국영 방송사 RAI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더 정확하게는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지역 패션 회사의 의상 디자이너였다. 파브리지오는 볼로냐에서 공부를 마치고 런던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스페인 사람인 마리아를 만나 결혼했다. 마리아와 파브리지오는 여러 유럽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처음에는 바르셀로나, 그다음에는 스톡홀름, 런던, 취리히에 살았고, 2017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현재는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 살고 있다. 딸 노라는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연방공과대학에 다닌다.
노라는 어린이집은 스톡홀름과 런던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스톡홀름에서 다녔다. 2006년에 독일어권인 취리히로 이사했을 당시 부모 모두 독일어를 할 줄 몰랐다. 둘 다 독일인이 아닌데다 학계 종사자들이라 일터나 지인들 사이에서는 영어를 썼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노라는 부모가 잘 모르는 언어와 학교 시스템을 스스로 파악해나가야 했다. 현재 노라는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프랑스어도 수준급이고, 어렸을 때 썼던 스웨덴어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다. 노라는 제2언어를 연구하는 켄달 킹Kendall King과 앨리슨 매키Alison Mackey의 저서 《이중 언어의 강점The Bilingual Edge》에 사례로 등장하는데, 그 책에서 저자들은 이렇게 언급했다. “물론 노라의 부모는 딸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지만, 어린 노라는 예외적인 천재가 아니다. 그보다는, 어쩌다 보니 4중 언어를 촉진하기에 이상적인 환경에서 태어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출장으로 세계 곳곳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파브리지오는 많은 시간을 중국과 노르웨이에 머물고, 마티아스는 독일과 벨기에에 자주 간다. 매번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사실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나라들 사이에서도 아이 키우는 방식에 엄청난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국 부모와 미국 부모가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은 고도로 세계화된 오늘날이라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고, 경제적·정치적 제도도 다르며, 수천 년 동안 문화도 매우 달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똑같이 부유한 유럽 국가이고 다른 대륙 사람들은 노상 헛갈리곤 하는 스웨덴과 스위스가 상이한 양육 행태를 보인다는 것은 설명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무엇이 양육의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스웨덴은 너그러운 ‘허용형permissive’ 양육 방식이 권장되는 문화의 대표 사례다. 스웨덴 부모들은 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아이에게 식당에서 밥 먹을 때 조용히 앉아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스웨덴 부모 대부분은 어떤 형태의 훈육도 옳지 않다고 본다. 체벌은 말할 것도 없고스웨덴에서는 1979년 이래로 체벌이 불법이다, 말로 꾸짖는 것도 그렇다. 다른 나라들에서라면 대개의 부모가 아이의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할 법한 일들가령 낯선 어른을 계속 귀찮게 구는 것이 스웨덴에서는 어린아이의 내재적인 본성에서 나온, 당연히 그럴 만한 일로 용인된다. 한번은 마리아와 파브리지오가 스웨덴의 한 친구 집을 방문했는데 여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 아빠 친구인 어른들에게 “시끄러워요! 나 TV 본다고요!”라고 소리를 쳤다. 아이 부모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 그렇구나”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서, 아이들 TV 보는 데 방해되지 않게 윌, 그러니까 어른들이 옆방으로 옮기자고 부드럽게 제안했다.
학교도 이와 비슷한 자유주의 철학을 원칙으로 운영된다. 스웨덴에서는 대부분의 영유아가 무료로 어린이집에 다닌다. 어린이집은 매우 태평하고 자유로운 장소로, 뛰어나고 사명감 있는 전문가들이 어떠한 형태의 공식적인 ‘학습’도 금기라는 원칙에 따라 아이들을 돌본다. 아이들은 절대적으로 최소한의 제약만 받는다. 잘못된 행동은 통제되지만, 제재하거나 벌을 주는 일은 거의 없다. 공식적인 교육은 만 7세가 되어서야 시작되고, 13세가 되기 전까지는 아이의 학업 성취에 대해 등급을 부여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걱정을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그러한 ‘악’으로부터 반드시 보호받아야 한다고 여겨진다. 야심 찬 학생이 ‘과도하게 공부하려’ 하면 교사는 명시적으로 말리며,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줄 정도로 몰아붙이는 부모는 “무책임하다”고 책망을 받는다. 스웨덴 아이들이 ‘경쟁심’을 발휘하는 영역은 스포츠로만 제한된다스포츠는 스웨덴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경쟁이 용인될 수 있다고 여기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다. 아이의 학업에 선제적으로 개입하려는 부모는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다. 파브리지오와 마리아가 딸 노라를 초등학교에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그러니까 만 7세가 아니라 만 6세에 보내도 될지 물었더니 교사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물론 노라는 잘 따라갈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 아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스위스는 어떨까. 국제 기준으로 보면 스위스도 자유주의적인 양육 문화를 가진 곳이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양육과 학교에서의 교육 모두 스웨덴보다는 명백하게 더 엄격하다. 교사는 저학년 때부터 아이들이 교사의 권위를 인식하고 존중하도록 가르친다. 모든 연령대에서 아이들은 교실에 들어갈 때 교사와 악수를 해야 하고, 교사를 절대로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공손하고 공식적인 호칭인 ‘지Sie’3인칭를 사용하며, 교사가 이야기할 때는 조용히 경청한다. 2학년부터는 평가 등급이 기록된 성적표도 받는다. 스웨덴 아이들은 그 나이에야 학교에 입학하는데 말이다. 6학년이 되면 스위스 아이들은 인문계 고등학교김나지움로 가는 선발 시험을 치르는데, 그중 약 20%가 인문계로 진학한다. (스위스에는 중학교가 없고 초등학교에서 곧바로 고등학교로 간다.) 비공식적으로 ‘김프뤼풍GymPrüfung’이라고 불리는 이 시험은 만 12세 아이들이 치르기에는 가혹할 정도로 어려워서 많은 부모가 별도로 사교육을 시킨다. 그 때문에 아이의 자유 시간이 크게 줄어든다. 휴직을 하고 아이의 시험 준비에 매진하는 부모도 있다. 유난히 극성스러운 부모의 행동이라고 간단히 치부할 일이 아니다. 김나지움은 대학으로 가는 관문이다. 김나지움에 못 가더라도 나중에 계열을 변경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하지만, 김나지움에 가면 더 수준 높은 수업을 받을 수 있고 시험에서 뽑힌 뛰어난 아이들을 또래집단으로 둘 수 있기 때문에 김프뤼풍을 잘 치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듯 학교 시스템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가령 김프뤼풍 같은 시험이 존재하는지가 부모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그것이 스위스에서 특정한 방식의 양육을 추동하는 ‘궁극적인’ 요인이라고 여기지는 말아야 한다. 학교 시스템은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접근 방법의 차이를 드러내는 한 가지 측면일 뿐이다. 스위스에서는 스웨덴에서보다 경쟁이 더 쉽게 용인된다. 우수한 아이는 별도로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도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 부모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자랑스러워하고 기꺼이 돈과 시간을 투자해 아이의 학업 성취를 지원하려고 한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