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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중피종
“복막암입니다. 복막에 생긴 중피종이요.”
“양성인가요, 악성인가요?”
“악성입니다. 서둘러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종양이 많나요?”
“복막 전체에 퍼졌습니다.”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암이라는 사실도 그렇지만, 종양이 복막 전체에 퍼졌다는 말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담당 의사가 암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옆에 있는 아내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사에게 질문을 했고, 의사 역시 매우 무덤덤한 태도로 답변을 이어갔다. 의사는 질병이 확인된 만큼 다른 의사를 소개해주겠다고 말하고 병실을 총총히 떠났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다. 태연한 척하는 내 태도 때문이었는지 아내의 표정에서도 변화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다만 말이 없었다.
의사가 나간 뒤 병실은 썰렁했다. 같은 병실의 환자들 역시 애써 그 공기를 피하려는 것 같았다. 60대 이상 노인들만 있는 병실에 40대 후반의 젊은 사람이 입원한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데 희한한 암 판정을 받았다. 간암이나 간경화 등 중병으로 오랜 병원 생활을 한 이분들은 의사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3개월 전 건강검진에서 복수가 발견되었다. 소량이었기 때문에 건강검진을 했던 의사도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복수는 대부분 간 이상으로 생기는 것이라며 큰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보라고 권유했다. 서울아산병원을 찾은 이유였다. 그런데 간에 특별한 증상이 없자, 의사는 입원해서 조직검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의사가 입원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리고 2016년 9월 6일 복막의 악성 중피종 진단을 받았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 며칠 전에 복강경 수술을 했던 외과 의사가 직접 찾아와서 “복막을 아무 데나 잘라내도 될 정도로 종양이 많이 퍼져 있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나는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식사 시간이 되기도 전에, 종양내과 의사가 인턴이나 레지던트도 한 명 없이 홀로 병실을 찾아왔다. 나를 맡게 된 새로운 의사였다. 나도 마침 혼자 있었다.
“부위가 넓어서 수술은 어렵습니다. 방사선치료도 불가능하고요. 항암주사를 맞는 것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일단 항암제로 종양의 수를 줄여보도록 하지요. 그다음에 또 치료법을 찾아봅시다.”
“수술은 아예 안 됩니까?”
“수술은 안 됩니다. 이걸로 수술하는 의사는 없습니다. 일단 종양을 줄인 뒤에 수술이 가능해지면 다른 의사를 소개해드리죠.”
이때도 몰랐다. 설마 내가 시한부 판정을 받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의사의 절제된 말투와 표정에서 심각함이 배어났다. 그래서 살짝 미소를 띠며 농담 비슷하게 물어보았다.
“중피종, 사망률이 어떻게 되나요?”
“네?”
“생존율이라고 해야 하나요? 생존 기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툭 터진 질문에 의사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침대 난간에 걸려 있는 손 소독제를 짜서 바른 뒤 반문했다.
“꼭 알고 싶습니까?”
“네, 그래야 저도 준비를 하지요.”
“중피종 환자는 보통 12개월 안팎을 삽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앞으로 12~16개월 정도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1년이 넘게 남았으니 다행이지요.”
이번에는 내 표정이 굳었다.
“알겠습니다. 아내에게 생존 기간은 비밀로 해주세요.”
12~16개월이라고? 내가 이렇게 멀쩡한데? 믿기지 않았다. 우선 내 몸 상태가 최대 16개월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라면 거동조차 쉽지 않은 상태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거동에 아무런 이상도 없는 내가 시한부라니… 배가 조금 많이 나온 것 외에는, 식사도 문제가 없고 일상생활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병원에 입원하기 불과 며칠 전까지도 후배들과 회식을 하며 술까지 마셨다. 그런데 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막연했다. 더욱이 아이들이 이제 겨우 아홉 살인데. 아내에게 남은 생존 기간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중피종은 석면으로 인해 발병한다고 알려져 있다. 과거 주택이나 학교에서 사용한 슬레이트 지붕에 석면이 함유된 사실이 밝혀졌을 때 크게 문제가 되었다. 지하철 역사 천장에서 석면이 검출되어 논란이 불거진 적도 있었다. 석면은 죽음의 먼지라고 부른다. 짧은 기간 노출되어도 몸에 스며든 석면이 길게는 30~50년 정도까지 오랜 기간 잠복해 있다가 어느 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발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도 2007년부터 석면을 단계적으로 금지시켰고 2015년부터는 석면 사용이 전면 금지되었다. 하지만 나는 석면에 노출된 기억이 없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발병을 촉발한 원인trigger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 뒤 알게 된 현실은 더욱 처참했다. 중피종은 일단 대부분의 의사들이 들어보지도 못했을 만큼 희귀한 암이다. 그 희귀한 암도 보통은 폐를 감싸고 있는 흉막에서 발생하는데 나처럼 복막에서 생기는 것은 그중에서도 드문 경우다. 워낙 희귀한 암이라 치료법은커녕 사례도 별로 없다. 우리나라 전체에 10명이나 될까. 복수가 발생하는 등 상당한 진행이 있기까지는 외적 증세가 없어서 보통 말기에야 발견된다. 이때부터 증세가 악화되는 것이다. 평균 생존 기간이 12개월이라는 말의 의미다.
현실은 현실이다. 일단 받아들이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그리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당장은 의사 말대로 항암주사를 맞기로 했다. 하지만 환자가 밀려 있어서 당장 내일부터 맞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2주일 후로 예약을 한 뒤 퇴원을 했다.
퇴원하는 길에 4년 전이 떠올랐다. 결혼 10주년 기념일을 나흘 남긴 2012년 3월 19일 MBC에서 해고 확정 통지를 받았다. 그 때도 아내는 특별한 말이 없었다. 노조 집행부가 될 때부터 아내에게 해고당할지도 모른다고 수차례 예고했던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말을 참는 아내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갔을까. 나는 해고된 뒤에도 파업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골몰하느라 결혼 10주년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루가 지난 3월 24일 밤에 평소처럼 자정 넘어 들어와 자려고 하는데, 아내가 한마디 했다. “어제 무슨 날인지 몰랐어?” 그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할 말이 없었다.
2017년은 어머니가 팔순이 되는 해다. 회갑연도 건너뛴 만큼 팔순 잔치는 몰라도 가족모임이나 가족여행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한부 암이라니. 어머니에게 암 소식을 전하는 것은 4년 전 해고 소식을 알릴 때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해고를 당했을 때도 일단은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언론에 이미 기사화가 되었기 때문에 친인척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전해질 것이 너무 뻔했다. 다른 사람에게서 들으시면 더 충격을 받을 수 있기에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인사위원회 재심이 열린 날 아내와 함께 경기도 일산의 어머니 댁을 찾았다. 아들이 오랜만에 온다는 말에 어머니는 푸짐한 저녁상을 준비하셨다. 어머니 댁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녁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들자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왔다. 재심 결과, 해고가 확정되었다는 통보였다. 참으로 무심했다. 밥이나 다 먹은 뒤에 통보하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어렵게 해고 소식을 전하고 반드시 복직할 거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나를 믿는다는 말로 오히려 위로를 해주셨다. 내가 대의를 좇으니 반드시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고, 저 놈들은 반드시 쫓겨날 거라는 말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가 이 정도 강단을 지니셨기에 그토록 어려운 시절을 버텨오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암 소식을 전해야 한다. 정말 못하겠다.
나의 암 소식은 주변에 빠르게 알려졌다. 당초 서울아산병원에 가게 된 것도 MBC 후배 기자 때문이었다. 건강검진에서 복수가 발견되었지만 별일 아닐 것이라며 석 달 동안이나 정밀 진단을 미루던 나를 후배 기자가 빨리 가보라고 떠밀었던 것이다. 별일 아니면 좋고, 그렇지 않다 해도 하루라도 빨리 치료하는 게 좋지 않으냐며 나를 설득했다.
이번에도 MBC 선후배들이 앞장서서 복막암의 최고 권위자를 찾아 나섰다. 외과 의사인 처남이 소개한 분과 동일한 국립암센터 의사였다. 당장 그 의사와 진료 일정을 잡았다. 서울아산병원에서와 달리 그는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복막을 다 걷어내고 소장과 대장도 상당 부분 절제할 것이고, 개복수술을 하는 도중 위나 간 등 다른 장기에서도 종양이 발견되면 필요한 만큼 다 잘라낼 거라고 말했다. 수술 시간은 12시간 정도를 예상했다. 엄청난 수술이었다. 그래도 수술이 불가능한 것보다는 나았다. 한 줄기 소생의 빛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한 달 뒤로 수술 날짜를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암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변에서 격려와 응원이 쇄도했다. 전화를 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2012년 6개월 파업을 함께했던 선후배와 동료들은 너나없이 억울한 심정을 토해냈다. 특히 후배들은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저들은 저렇게 뻔뻔히 잘 살아가는데,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일까지 당하느냐는 반응이었다. 나도 당연히 공감하는 바였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니 어쩌겠는가. 현실은 항상 그렇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지는 않는다.
한겨레 김종구 선배가 칼럼을 쓰겠다고 집까지 찾아왔다. 이명박 정부 이후 언론장악과 파업, 해고 등의 과정에서 발생한 극도의 스트레스가 결국 발병의 원인이 아니겠느냐며 이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인 만큼 내 문제를 글 도입부에 살짝 다루면서 언론장악 문제를 다시 한번 환기시켜준다면 좋을 것이라는 말에 결국 동의했다. 문제는 신문에 칼럼이 실리면 어머니가 알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신문에 칼럼이 실리기 전에 또다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내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내 나이 마흔아홉. 그동안 결코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애를 썼다. 윤동주의 「서시」는 내 삶의 이정표나 다름없었다. 대학에 들어가 당초 꿈꾸었던 관료의 길을 포기하고 운동권 주변을 전전한 것도 그랬고, 기자로 생활하면서 회사에서나 출입처에서나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항상 까칠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명박 정부 들어 누구나 죽는 길이라고 보았던 노동조합에 스스로 간 것도 내 양심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직 할 일이 많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내 삶의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동안 나는 항상 나를 버림으로써 사는 길을 선택해왔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내 가족, 쌍둥이 아들 현재, 경재와 아내를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을 반드시 찾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선택을 하는 순간이다. 병원 치료를 받는 문제부터 시작해 모든 걸 다시 원점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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