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2010
나의 고등학교 졸업식과 대학 졸업식에는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빠와 언니가 참석 못한 건 당연했지만 엄마가 그런 건……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참석하지 않았다.
언니가 죽은 후 우리는 경기도 신도시로 이사했고 나도 그곳 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이전 학교와 달리 남녀공학이 아닌 여고였다. 처음엔 나도 엄마도 매우 느린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떨어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엄마는 꼬박꼬박 숍에 일을 하러 나갔고 나도 꼬박꼬박 학교에 나갔다. 엄마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나는 점점 어리둥절해졌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언니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의혹에 빠졌다. 그건 무척 슬프고 괴로운 의혹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것. 과거형이라 이제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것. 그대로 결정돼버린 것.
어느 순간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모든 소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언니의 부재를 가능한 한 덜 느끼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왔지만 그 낯선 공간이 우리의 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했고, 이사의 원인이 된 끔찍한 사건을 더 시시각각 소름 돋도록 환기했다. 머릿속에 물방울만 하게 맺혀 있던 공백이 풍선처럼 훅훅 부풀어올랐다. 세상이 점점 멀어지고 흐릿해지다 아예 사라져버리는 일이 생겨났다. 엄마와 나는 순식간에 추락했다. 엄마는 다니던 숍을 그만두었고 나는 학교를 휴학했다. 우리는 며칠씩 잠만 자거나 며칠씩 잠을 못 잤다. 먹는 것을 잊었고 씻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떻게든 위로 기어 올라가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오랫동안 우물 같은 축축한 어둠 속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그때의 완전히 수동적인 무기력 상태가 더 편하고 안전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 나는 오직 언니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세상에 그보다 절박한 일은 없다는 듯 언니와 관련된 희미한 기억 하나를 떠올리기 위해 몇날 며칠을 거기에 붙들려 있곤 했다. 아마 엄마도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각자의 죄의식은 각자의 몫이었다.
원래 언니의 이름은 혜은이었다. 김혜은. 엄마가 그렇게 지었고 아빠도 동의했다. 공교롭게도 엄마가 지독한 산후몸살을 앓는 통에 출생신고가 한달여간 지체되었다. 그동안 경상도 출신이라 발음이 분명하지 못한 아빠가 언니를 해언아 해언아 하고 불러대는 통에 엄마도 세뇌가 되어 해언이란 이름도 의외로 괜찮구나, 혜은보다 해언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혜은이라 지어도 아이 아빠가 계속 해언이라 불러댈 테니 차라리 그쪽으로 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언니는 김해언이 되었다.
만약 언니가 혜은이었다면 나는 다은이 되었을 것이다. 다은과 다언, 어느 게 더 나은지 모르겠다. 내 경우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언니의 경우는 달랐다. 엄마는 언니가 죽은 후에 갑자기 혜은이라는 이름에 강하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름이 바뀌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국 죽은 언니는 혜은이 되어 엄마에게 돌아왔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팩트다. 언니가 죽고 나서 십년 뒤, 실제로 살아 있는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혜은이 되었다. 내가 엄마에게 준 선물이다.
아빠는 언니를 끔찍이 사랑했다고 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언니는 예쁜 아기였을 것이다. 나는 아기였을 때의 언니를 상상해본다. 아기란 원래 무심하고 제멋대로이고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이니 어쩌면 언니는 아기였을 때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삶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 언어를 몰라도 괜찮던 시절, 관계를 맺거나 감정을 공유하는 법을 몰라도 흠이 되지 않던 시절, 그 시절의 언니는 최고로 빛나는 피조물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언니를 동네방네 데리고 다니며 자랑했다고 한다. 또 언니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서슴없이 자기 평생에 이보다 예쁜 아기는 본 적이 없노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아빠가 언니의 죽음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던 건 행운이었다. 아빠는 종종 새 담뱃갑에서 첫 개비를 뽑다 실수로 뚝 부러뜨리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얼굴이 벌게지도록 화를 냈다. 아빠는 그렇게, 벌컥 화를 낼 일이라고는 그 정도밖에 없는 평범한 삶을 살다 갔다. 언니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해에, 그러니까 언니가 일곱 살, 내가 다섯 살이었을 때, 아빠는 동료 직원과 지방 출장을 갔다가 삼거리 교차로에서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운전은 동료 직원이 했고 아빠는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마치 신정준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언니가 타고 있었듯이. 그들의 차는 T자 모양의 교차로 아래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다 신호가 바뀌자 좌회전을 했다. 그때 오른쪽에서 맹렬히 달려오던 트럭이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그들의 차를 받아버렸다. 차는 중동이 부러진 담배처럼 꺾였고, 앞문이 휘어 아빠를 구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빠는 차 밖으로 끄집어내지기도 전에 죽었다. 강한 타격에 의한 두부 손상으로 인한 사망. 언니의 사인과 같았다.
친척들은 아버지가 죽은 후로 엄마가 변했다고 쑥덕거렸다. 회사와 보험사에서 꽤 많은 보상금을 받았을 텐데도 저렇게 돈에 무섭다고들 했다. 엄마는 친구의 숍에 돈을 벌러 나가면서 집안일은 맏딸인 언니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건 애초에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집은 엉망이 되었다. 아빠의 죽음과 엄마의 변화로 언니는 상처를 받았을까. 아마 조금은 받았을 것이다.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언니의 성격이 변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언니는 바위처럼 단단해 쉽게 바뀔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안일은 내가 떠맡게 되었다. 나는 여섯 살에 청소기와 세탁기 돌리는 법을 익혔고, 일곱 살에 엄마가 불 쓰는 일을 허락해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가스레인지에 두부와 참치를 넣은 김치찌개를 끓였다. 거의 하루 종일 같이 지냈지만 나는 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언니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언니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위하지 않았고 아무도 해하지 않았다.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니는 간섭받지 않고 무위한 상태로 있을 때 제일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존재였다. 가능한 한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의도된 책략이 아니었음에도, 그런 책략을 쓸 만큼의 용의주도함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언니에게 그보다 더 훌륭한 책략은 없었다. 말없이 상대방을 응시하거나 짤막한 대답만을 던지고 무심히 고개를 돌리는 절제와 우아함이 언니의 미모를 빛나는 위엄으로 감쌌다.
언니는 몸의 물질성에 대한 자의식이 느슨하고 희박했다. 육체가 가진 육중한 숙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외모가 주는 기쁨과 고통을 몰랐다. 언니는 자기 신체의 아름다움을 우연히 해변에서 주운 예쁘장한 자갈 정도로 취급했다. 사람들에게 내보였을 때 유리한 점이 많다는 건 알았기에 때로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외모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몰랐다. 진주와 자갈의 차이를 모르는 어린애처럼 어니는 무심하고 무욕했다.
나는 언니와 먹을 것이나 장난감을 놓고 다툰 기억이 없다. 그런데 그게 좋기보다 서운하고 불안했다. 나는 늘 언니에게 심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언니는 식탐이 전혀 없었으므로 나는 평소에 내가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니가 배가 고파지면 상황이 달라졌다. 언니는 역지사지나 감정이입이 불가능한 존재로 변했다. 최소한의 룰이나 배려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때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기다려야 했다. 자기 배를 채울 수 있다면 언니는 굶주린 아이와 노인의 빵도 태연히 빼앗아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럴 때 언니는 짐승처럼도 보였고 저능처럼도 보였고 심지어 사이코패스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초탈한 성자처럼 보였다. 속옷도 입지 않고 편안하고 헐렁한 잠옷 원피스만 입은 채 무릎을 약간 벌려 세운 방심한 자세로 앉아 있거나 드러누워 허공을 응시하는 언니의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또 근심스러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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