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사람들이 그토록 꿈꾸던 모든 것은 이미 실현되었다. 그러나 당신이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유토피아의 귀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을 짧게 소개하면서 글을 시작해보려 한다.
과거에는 무엇이나 지금보다 열악했다.
세계 역사의 99%를 차지하는 기간 동안 인류의 99%는 가난했고 굶주렸을 뿐 아니라 더러웠다. 두려움에 떨었고, 어리석었고, 질병에 시달렸으며, 못생겼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년은 삶을 거대한 눈물의 골짜기로 묘사하면서 “인류는 비참해질 줄 알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썼다.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년는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외롭고 가난하고 추잡하고 잔인하며 짧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 200년 동안 모두 변했다. 인류가 지구에 존재해온 기나긴 세월 중 짧은 기간 동안 수십억 인구가 갑자기 부를 쌓고 영양분을 풍부하게 섭취할 뿐 아니라 안전해졌다. 말끔해지고 똑똑해지고 건강해졌으며 외모가 준수해지기까지 했다. 1820년에는 세계 인구의 94%가 극도의 빈곤에 빠져 허덕였지만 1981년에 들어서면서 그 비율은 44%까지 떨어졌고, 수십 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현재는 10% 미만이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인간의 삶을 끝없이 지배했던 극도의 빈곤은 조만간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현재 가난하다고 불리는 사람들까지도 역사상 유례없이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네덜란드에서 현재 노숙자가 받는 사회복지 보조금은 1950년 평균 네덜란드인의 소비 가능 액수보다 많고, 과거 네덜란드가 칠대양을 통치한 황금기에 살았던 국민의 소비 가능 액수보다 4배나 많다.
몇백 년 동안 시간은 거의 정지해 있었다. 역사책을 메운 사건은 많이 발생했지만 인간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1300년에 살던 이탈리아 농부를 타임머신에 태워 1870년대 토스카나Tuscany 지방에 데려다놓더라도 별반 차이를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잠시 시간을 내서 그래프를 들여다보자. 원은 국가를 나타내고 원이 클수록 인구가 많다. 그래프 하단에는 1800년에 존재한 국가들이 있고, 상단에는 2012년에 존재한 국가들이 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와 미국처럼 1800년 당시 가장 부유했던 국가들보다 생활형편이 낫다물론 콩고의 소득은 지난 20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기는 했다. 그래프의 오른쪽 위에 있는 “풍요의 땅”에 도달하는 국가가 훨씬 많아지고 있다. 풍요의 땅은 기대수명이 75세 이상이고 평균 소득이 2만 달러가 넘는 곳이다.
역사가들은 1300년경 이탈리아 국민의 평균 연간소득을 약 1,600달러로 추정한다. 그 후 600여 년에 걸쳐 콜럼버스·갈릴레오·뉴턴이 활약하고, 과학혁명·종교개혁·계몽주의가 휩쓸고 지나가고, 화약·인쇄술·증기기관이 발명되었지만 평균 연간소득은 여전히 1,600달러에 머물렀다. 600년 동안 문명이 발전했는데도 보통 이탈리아인의 삶은 언제나 제자리였던 것이다.
급기야 이탈리아 농부가 발전의 물결을 타기 시작한 것은 1880년 경으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이 전화를 발명하고, 토머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해서 특허를 받고, 카를 벤츠Carl Benz가 최초로 자동차를 만들고, 조세핀 코크런Josephine Cochrane이 식기 세착기라는 매우 눈부신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였다. 그 후 세상은 발전의 급물살에 휩싸였다. 지난 2세기 동안 세계 인구와 부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현재 세계 1인당 소득은 1850년의 10배에 이른다. 평균 이탈리아인의 부는 1880년보다 15배 증가했다. 세계 경제는 어떨까? 거의 전 인구가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리고, 두려움에 떨고, 어리석고, 병들고, 못생겼던 산업혁명 이전보다 250배 성장했다.
중세의 유토피아
과거는 생활하기에 확실히 가혹한 시대였으므로 사람들은 상황이 개선되는 날이 오기를 꿈꾸며 살았다.
사람들이 가장 선명하게 꿈꿨던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무릉도원 “코케뉴Cockaigne”였다. 코케뉴에 도달하려면 먼저 5킬로미터나 깔려있는 쌀 푸딩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코케뉴에 도착하면 강에는 포도주가 흐르고, 구운 거위가 공중을 날아다니고, 팬케이크가 나무에서 자라고, 하늘에서는 뜨거운 파이와 빵이 비처럼 내리기 때문이다. 농부나 수공업자, 성직자 할 것 없이 모두 평등하고 근심 걱정이 없다.
풍요의 땅인 코케뉴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투지 않고, 파티를 열어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졸리면 아무 곳에나 쓰러져 잤다.
네덜란드 역사가 헤르만 플레이Herman Pleig는 이렇게 썼다. “중세인에게 현대 서구 유럽은 진정한 코케뉴에 매우 가깝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패스트푸드를 먹고, 실내 온도를 알맞게 조절할 수 있고, 자유롭게 사랑하고, 굳이 일하지 않아도 돈이 굴러 들어오고, 성형수술을 받아 젊음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는 굶주려 고통 받는 사람보다 비만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더 많다. 서구 유럽에서 살인율은 중세보다 평균 40배 낮아졌고, 합당한 여권이 있으면 감동적인 사회 안전망을 보장받는다.
그렇다면 현대인이 직면한 최대 문제는 무엇일까? 과거 중세인이 꿈꿨던 유토피아는 빛을 잃었다. 현대인의 소비량과 안전도가 약간 증가한 것은 확실하지만 오염만 비만, 빅 브라더Big Brother,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비롯된 용어로 정보의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권리 권력이나 사회 체계를 가리킨다―옮긴이 등 역효과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세 몽상가가 꿈꿨던 풍요의 땅은 공상 속 낙원이었고, 헤르만 플레이가 말한 대로 “세속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도피처”였다. 하지만 1300년 이탈리아 농부에게 현재 세상을 묘사해보라고 하면 틀림없이 코케뉴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사실 현대인은 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이 실현된 시대를 살고 있다. 맹인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걷기 시작하고,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등 중세였다면 기적이었을 현상들이 지금 주변에서 흔히 일어난다. 아르구스 2Argus ∥는 유전 질환을 앓아 시력을 잃은 사람에게 일부 시력을 회복시켜주는 뇌 이식 장비다. 리워크Rewalk는 하반신마비 환자를 다시 걷게 해주는 로봇 다리다. 레오바트라쿠스Rheobatrachus는 1983년 멸종한 위부화개구리인데, 오스트레일리아 과학자들 덕택에 과거 DNA를 활용해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해당 연구팀은 신약성서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라자루스 프로젝트Lazarus Project”의 일환으로 다음에는 태즈메이니아 호랑이를 부활시킬 계획을 세웠다.
아울러 과학소설이 과학적 사실로 바뀌고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이미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심지어 3D 프린터가 등장해 배아줄기세포 구조를 인쇄하고, 뇌에 칩을 이식해서 생각으로 로봇 팔을 작동한다. 일반적으로 사실로 인정받고 있는 현상의 예를 더 들어보자. 1980년 이후 태양에너지 1와트의 가격은 99%나 곤두박질쳤다. 오타가 아니다. 운이 따른다면, 대중이 모든 생산수단을 통제해야 한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이상을 유혈이 낭자한 혁명을 치르지 않고 3D 프린터와 태양 전지판만 갖고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오랫동안 풍요의 땅은 부유한 서구의 소수 엘리트 집단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는 끝났다. 중국이 자본주의에 문호를 개방하고 나서 자국민 7억 명이 극도의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도 경제 황폐 지역이라는 오명을 신속하게 벗어버리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 성장세를 보이는 10개국 중 6개국을 보유하고 있다. 2013년에는 세계 70억 인구 중 60억 명이 휴대전화를 소유했다. 참고로 당시 화장실을 갖춘 인구는 45억 명에 불과했다. 1994~2014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인구는 0.4%에서 40.4%로 크게 증가했다.
아마도 조상들이 자유분방하게 상상했던 꿈을 오늘날 실현시키고 있는 분야는, 풍요의 땅이 주는 최고의 약속인 건강일 것이다. 부유한 국가의 평균 수명은 매주 주말만큼 늘어나는 데 만족해야 하지만, 아프리카는 매주 4일씩 늘어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기대수명은 1990년 64세에서 2012년 70세로 늘어나 1900년의 2배가 넘었다.
굶주리는 인구도 감소하고 있다. 풍요의 땅에서처럼 구운 거위 고기를 허공에서 낚아챌 수는 없지만 영양실조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1990년 이후 3분의 1 이상 줄었다. 하루 2,000칼로리 이하를 섭취하며 살아가는 세계 인구의 비율은 1965년 51%에서 2005년 3%로 감소했다. 1990~2012년 사이에는 인구 21억 명 이상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됐다. 왜소 성장으로 고통을 겪는 아동의 수는 같은 기간 동안 3분의 1로 줄었고, 아동 사망률은 놀랍게도 41%나 감소했으며, 산모의 사망률도 절반으로 떨어졌다.
질병은 어떨까? 역사상 인류의 최대 사망 원인이었던 무시무시한 두창은 완전히 사라졌다. 소아마비도 거의 사라져서 1988년을 기준으로 2013년에는 환자가 99% 감소했다. 과거에 흔했던 질병에 대해 면역력을 갖춘 아동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홍역 예방접종률이 1980년 16%에서 요즈음은 85%로 껑충 뛰었고, 사망자 수는 2000~2014년 4분의 3 이상 감소했다. 결핵으로 인한 사망률은 1990년 이후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말라리아로 인한 사망자 수는 2000년 이후 4분의 1 줄었고, 에이즈로 인한 사망자수도 2005년 이후 그만큼 줄었다.
일부 수치는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좋다. 예를 들어 50년 전만 해도 아동 5명 중 1명은 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사망했다. 요즘은 어떨까? 20명 중 1명으로 줄었다. 1836년 세계 최고 부자였던 나탄 메이어 로스차일드Nathan Meyer Rothschild는 단순히 항생제가 없어서 죽었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 동안 홍역, 파상풍, 백일해, 디프테리아, 소아마비를 예방하는, 엄청나게 가격이 저렴한 백신은 20세기 세계 평화가 구하는 것보다 많은 인명을 매년 구하고 있다.
물론 암을 비롯해 현대인을 괴롭히는 질병은 여전히 많지만 우리는 최전선에서 생명을 구하는 일에 진보를 보이고 있다. 2013년 권위 있는 잡지 〈사이언스Science〉는 종양과 싸우도록 면역 체계를 구축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보고하면서 그해 과학 분야에서 이룩한 최대 진보라고 환호했다. 같은 해 세계 최초로 인간 줄기세포를 복제하는 데 성공하면서 당뇨병의 한 형태를 포함해 미토콘드리아 병의 치료에 진전을 이룩했다.
일부 과학자들은 살아서 1,000세 생일을 맞이할 사람이 이미 태어났다고까지 주장한다.
게다가 인간은 더욱 똑똑해지고 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아동의 비율은 1962년 41%였지만 지금은 10% 미만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민의 평균 지능지수는 주로 영양 섭취와 교육이 향상된 덕택에 10년마다 3~5점 증가하고 있다. 아마도 인류가 세계 역사를 통틀어 지난 10년 동안 가장 평화로운 시기를 누리는 동시에 과거보다 훨씬 문명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슬로 소재 평화연구소Peace Research Institute는 연간 전쟁 사망자 수가 1946년 이후 90% 급감했다고 보고했다. 살인이나 강도, 기타 형태의 범죄 행위가 발생한 건수도 줄어들고 있다.
얼마 전 〈이코노미스트The Econoist〉는 “부유한 세계에서 범죄 발생 수가 점차 줄고 있다. 범죄자는 여전히 있지만 더욱 적어지는 동시에 나이 들어가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황량한 낙원
풍요의 땅에 온 것을 환영한다.
멋진 삶을 누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부유하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생활하는 무릉도원에 발을 디딘 것을 환영한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이유이다. 결국 낙원에서는 자신을 향상시키려 애쓸 필요가 없다. 1989년 미국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경제적 계산, 끊임없는 기술 문제 해결, 환경에 대한 관심, 복잡한 소비자 요구가 충족되면서 삶이 축소된 시대에 들어섰다.”
구매력을 약간 높이거나 탄소 배출량을 약간 낮추는 새로운 정책은 우리가 추구하는 비전의 정도와 관계가 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부와 과잉 풍요의 시대는 정말 황량하지 않은가! 후쿠야마는 이 시대에 “예술도 없고 철학도 없다”고 주장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인류 역사 박물관을 영구적으로 돌보는 일”뿐이다.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에 따르면, 인간은 풍요의 땅에 도달하자마자 다시 한 번 머나먼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하고 닻을 끌어 올려 항해를 떠나야 한다. 와일드는 “진보는 유토피아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저 멀리 수평선은 텅 비었고 풍요의 땅은 안개에 싸여 있다. 우리는 이 풍요롭고 안전하고 건강한 장소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유토피아를 매장시켰다. 여태껏 누려온 것보다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없으므로 지금까지 꾸어온 꿈을 대체할 새 꿈이 없다. 실제로 부유한 국가의 국민은 대부분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잘 살지 못하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현 시대와 세대가 직면한 진정한 위기는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고, 심지어 더욱 열악한 환경을 유발할 수도 있다.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위기는 우리가 더욱 바람직한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없는 데 있다.
청사진
이 책은 미래를 예측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로 향하는 문을 열고, 아울러 정신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려 한다. 물론 유토피아가 말해주는 것은 실제 모습이 아니라 이를 상상한 시대이다. 유토피아적 풍요의 땅은 중세의 삶이 어땠는지 알려준다. 한마디로 냉혹했다. 아니 거의 모든 곳에 사는 거의 모든 인간의 삶은 거의 언제나 냉혹했다. 따라서 문화를 불문하고 인간은 나름대로 풍요의 땅을 꿈꾼다.
단순한 욕망은 단순한 유토피아 개념을 낳는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은 음식이 흘러넘치도록 풍부한 연회를 꿈꾼다. 추위에 떠는 사람은 따뜻한 모닥불을 꿈꾼다. 건강이 나빠진 사람은 영원한 젊음을 꿈꾼다. 모든 욕망은 삶이 여전히 무겁고 잔인하고 짧았던 시절에 꿈꿨던 오랜 유토피아 개념에 반영된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시인 텔레시데스Telecides는 “세상은 무서운 것도 질병도 만들어내지 않는다”라고 상상했고,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저절로 생겨날 것이었다. “시내에는 포도주가 넘쳐흐르고, … 물고기가 집으로 찾아 들어와 저절로 구워져 식탁에 누울 것이다.”
내용을 더 전개하기 전에 두 가지 형태의 유토피아적 사고를 살펴보자. 첫째는 가장 친숙한 형태로 유토피아를 청사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칼 포퍼Karl Popper,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과 심지어 현대 철학을 대변하는 한 갈래인 포스트모더니즘도 이러한 유토피아 유형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 이와 같은 시도는 대부분 성공을 거둬 그들의 주장은 청사진처럼 펼쳐진 유토피아에 관한 결론적인 주장으로 남았다.
청사진을 구성하는 것은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어떤 불일치도 용납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이다. 이탈리아 시인 토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가 발표한 《태양의 나라The City of the Sun, 1602년》가 좋은 예다. 캄파넬라가 주장한 유토피아 아니 디스토피아는 개인의 소유권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누구에게나 타인을 사랑할 의무를 지우고, 다투는 사람을 죽음으로 처벌한다. 출산을 포함해 모든 사생활은 국가가 통제한다. 예를 들어 똑똑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하고만, 뚱뚱한 사람은 마른 사람하고만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다. 호의적인 중립을 형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게다가 시민은 누구나 방대한 정보망으로 감시당한다. 죄를 지으면 악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던지는 돌멩이를 맞아 죽겠다고 선선히 굴복할 때까지 언어로 위협을 당한다.
나중에 세상에서 벌어진 상황을 알고 나서 캄파넬라의 책을 읽으면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집단 학살 등을 암시하는 대목에서 소름이 끼치는 경험을 할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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