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바리 여직원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노동자 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또 다른 다리이다. 민주주의는 위계나 조직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명령이 높은 곳에서 오는 군대 모델이 아니라, 위에서 또 아래에서 오는 힘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조직 내의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_ 도널드 럼볼Donald Rumball, 「캐나다에서의 노동자 참여?Worker Participation in Canada?」, 『오늘날의 산업 민주주의Industrial Democracy Today』 논문집1979 중
20대 여직원, 나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여’가 앞에 붙는 직원. 경험은커녕,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현대그룹에서 근무하던 시절, 나와 같이 일하던 여직원은 상고 출신이었다. 키는 크지 않았다. 얼굴에는 살이 좀 있었지만 팔다리는 정말로 뼈에 얇은 근육만 살짝 붙어 있었다. 그래도 강단이 있었다. 신입직원 단합대회 중 여직원끼리 하는 씨름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 그 시절에는 정주영이 아직 살아 있었고, 그로부터 상장도 탔다. 정주영이 ‘악바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렇지만 악바리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주로 커피를 탔고, 가끔씩 간단한 금전출납 서류를 정리하는 것 외에는 대부분 잔심부름을 했다. 나는 차마 커피 타 달라는 얘기는 못했다.
나는 그녀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편치 않은 가정형편이지만, 그녀는 돈을 벌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현대그룹에 다니는 여직원들의 세계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회사 소속 여자 배구선수들이 나이가 들자 비서실로 가게 된 사연들을 들었다. 그렇게 회사원이 된 선수 출신들이 일반 직원으로 살아남기 위해 했던 몸부림, 나는 그 세계에 관한 얘기를 정말로 처음 들었다.
그녀와는 2년 정도 같이 일했다. 내가 현대에서 보낸 시간은 그보다는 약간 길다. 생각보다 그녀에게 많이 배웠다. 그런 독특한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내 삶은 아마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다른 방식’으로 밋밋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편이 나에게는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나는 늘 사무실의 말단 여직원들에게 많이 배우는 삶을 살게 되었다. 민주정책연구원에 있으면서도 같이 일한 실무 여직원에게 많이 배웠다. 시대를 배우고, 삶을 배우고, 흐름을 배웠다. 그들은 나에게 끊임없이 조언을 했다. 나는 그 조언을 다 따르지는 못했지만, 허투루 듣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IMF 경제위기로 내가 다니던 직장에도 구조조정의 순간이 왔다. 우리의 악바리 여직원에게 ‘정리해고’라는 발령이 났다. 행정실무를 하던 그녀가 파견직이었다는 사실은 그날 알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부당하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우리끼리 한마디 하는 것 외에 딱히 뭐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긴 시간이 지나서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 사건이 나에게 아픔으로 남았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래서 행복해졌을까? 정이 떨어졌다. 그 후 1년이 못 되어 나는 정부기관으로 옮겼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직장생활을 하던 기간에 나는 늘 와달라고 청한 곳에서 일했다. 그래서 편하게 지냈던 것도 알고, 남들보다 꽤 많은 특혜를 받고 지냈다는 것도 안다. 그 시절에는 박사 수당도 적지 않아서 남들보다 월급도 더 받았다. 그리고 부당한 것에 늘 날카롭게 반대하지는 않는, 비겁하게 입 다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도 안다. 직장 안에서 내가 언제나 민주주의 투사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첫 직장에서 그 악바리 여직원과 나눈 우정 때문인지, 나는 가끔 내가 일하는 곳을 그녀의 시선으로 돌아보고는 했다.
여직원들의 세계는 남자들의 세계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그 안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아픔이 있었다. 그리고 절실함이 있었다. 엄마든 엄마가 아니든, 그들은 돈을 벌어야 했다. 절박하게. 남자들도 자신들이 절실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회사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더욱 절실했다. 그래서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을 듯한 순간에도 미소를 짓는다. “우리 사무실의 꽃”, 나는 그런 얘기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너 보기 좋으라고 웃는 게 아니야, 저 미소는.’ 내가 아는 여직원들은 죽지 않기 위해서 미소를 지었다. 남자들은 그 속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의 직장 민주주의는 간단하다. 여직원들이 억지로 웃지 않는 것,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널드 럼볼이라는 기자가 1979년 직장 민주주의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표현을 썼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말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었다. 그러나 그다음 문장을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산업 민주주의 혹은 직장 민주주의는 군대 모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럼볼은 주장했다. 군대? 그렇다. 자본주의는 시작하자마자 제국주의로 전환되었다. 군대와 기업의 구분이 모호했다. 인간이 만든 조직 중에서 가장 효율적인 조직이 군대와 교회다. 교회를 원형으로 한 기업들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기업 특히 대기업은 군대 모델을 차용했다.
산업 민주주의 혹은 직장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다소 모호하면서도 우리에게 어색한 개념을 가장 쉽게 말하면, 군대 모델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럼볼이 한 얘기도 그 얘기다. 한국의 기업은 출발부터 21세기의 지금까지도, 기본적으로는 군대 모델 위에 세워져 있다. 거기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 이 군대 안에서 여성들을 전투의 보조요원 혹은 지원기능 정도로 생각한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군대에서 전투는 남성이 하는 일이고, 여성은 메딕, 그러니까 간호병쯤으로 간주된다.
직장 내 여성의 조건이 나아지면 남성은 불리해질까? 그렇지 않다. 여성의 조건이 개선되면, 남성 중에서 불리한 입장에 있던 사람들의 조건도 어느 정도는 개선된다. 여성 비정규직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면 당연히 남성 비정규직의 처우도 나아진다.
경제학자로서 내가 특별히 더 약하거나 힘든 사람에게 관심 가지라고 배운 적은 없다. 동료로 생각하고 같이 일하던 어떤 여직원이 IMF 때 종이 한 장짜리 통보로 해고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진짜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경제주체로서 여성들, 비정규직이나 하청의 존재 혹은 실무자들의 세계에 대해서 처음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의 동료들이 더 높은 곳, 더 근사한 곳에 관심을 가질 때, 나는 더 낮은 곳, 더 어려운 곳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1998년에 나는 직장 민주주의 같은 개념은 잘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직장 민주주의를 나의 첫 책으로 했을 것 같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 대해서 너무 쉽게 눈을 감는다.
엄마한테
연봉 얘기를 못해요
“선생님, 엄마한테도 연봉이 얼마인지 아직 못 알려줬어요. 생활비도 비싸고, 집값도 만만치 않고, 엄마는 용돈 안 보내느냐는 눈친데, 미안해서 집에 못 가겠어요.”
이명박이 한참 공정 사회 얘기하고 있을 때 부산으로 내려간 금융공기업 젊은 직원들과 간담회를 할 일이 생겼다. 그때 어떤 신입 직원이 친구는 물론이고 엄마한테도 연봉 얘기를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비슷한 하소연이 30분 넘게, 부산의 어느 고층빌딩 작은 방을 가득 채웠다. ‘공정’이라고?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무기력하기도 해서, 진짜로 몸 둘 바를 몰랐다.
‘공시족’을 비롯한 수많은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금융공기업 입사에 성공하는 사람은 별 중의 별이다. 오랫동안 삼성전자와 더불어 입사 희망기업 1위를 다투었던 한국전력공사보다 더 윗길이다. 바로 그 금융공기업에 취업한 사람,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진짜 별 중의 별, 부러운 인생일 뿐이다. 그들이 나에게 털어놓은 고충은, 부산에 와서 혼자 사는 것까지는 감수하겠는데, 연봉이 기대했던 데 비해서 형편없이 적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막상 취직하고 나서는 엄마한테도 진짜로 얼마 받는지 아직 얘기를 못했다는 것이다. 엄살? 아니다. 그냥 하는 소소한 엄살이면 내가 책에다 쓰겠는가?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진짜 동기는 이명박만 알 일이다. 하여간 그는 신입직원, 정확히는 다음 해 들어올 신입직원들의 연봉을 20% 정도 일괄 삭감했다. 공기업은 다 깎았고, 민간기업도 엄포를 놓아서 일부는 깎았다. 연봉을 깎아서 일자리 나누기를 하겠다는 것인데,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잡셰어링job sharing’이 그때 펼쳐졌다. 연봉을 깎으려면 많이 받는 놈 것을 깎아야 맞는 거 아냐? 이게 보편적 정서일 것이다. 물론 나중에 사장 연봉도 깎기는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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