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은 서열의 계급장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말 높이와 그에 어울리는 호칭이 있다고들 여긴다. 그런데 말 높이는 비교적 존대와 비존대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반면에 호칭은 그렇지 않다. 상대의 나이나 지위를 모를 경우에 말 높이에서는 존대하면 그만이지만, 뭐라고 호칭을 부를지는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대개 호칭과 말 높임법은 함께 어울려 가는 것이면서도 높임법보다는 호칭이 더 문제를 일으킨다. 호칭은 높임법에 비해 다양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느낌이 달라 사회적 합의가 옅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호칭 문제가 불거진 데에는 당연히 사회의 변화와 인식의 변화가 큰 몫을 했다. 옛날에는 신분과 나이에 따라 위아래 구별이 뚜렷했고 사람들이 서로 맺는 관계가 단순해서 그에 걸맞은 높임법과 호칭을 사용하면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크게 세 가지 사정이 달라졌고, 이 때문에 호칭 문제가 복잡해졈ㅆ다.
첫째, 신분제가 사라진 뒤 사람의 존엄과 인권, 특히 여성과 미성년자 같은 약자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공감대가 높아졌다는 사정이다. 나이가 어리거나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옛날처럼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도 그만큼 커졌다. 둘째, 기업과 정부기관, 병원과 학교 따위의 공적인 사회조직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가정을 벗어난 사회생활에 거의 다 참여한다는 사정이다. 한 사람이 직장의 직원으로, 민원인으로, 손님이나 환자로 매우 다양한 공적 사회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그 관계마다 호칭이 달라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족 말고도 운동과 취미 따위로 만나는 비공식 모임이 크게 늘어났다는 사정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 덕에 이 사적 공간은 끝없이 확대되고 있고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복잡한 관계 때문에 호칭을 고민하게 만든다.
현실과 관념의 충돌
그러나 호칭 문제는 단지 인간관계와 사회구성이 복잡해진 데에서 비롯하는 것만은 아니다. 민주사회라는 ‘선언’과 갑질 사회라는 ‘현실’의 충돌이 더욱 결정적이다. 과거의 신분질서가 해체되고 형식과 제도에서는 민주주의사회가 된 지금 우리는 모두가 사람으로서 평등하다거나 평등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나도 자주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대한항공 땅콩회항사건, 육군 대장의 공관병 갑질 논란, 유명 통닭업체 사장의 갑질 횡포, 어느 대기업 회장의 운전기사 폭행과 욕설, 일부 문화예술인과 대학교수의 권력형 성폭력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의 양반-상놈 신분사회는 사라졌어도 새로운 신분사회가 만들어져 갑-을-병-정 서열이 날로 단단해진다. 현실과 관념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런 서열 문화는 더 큰 문제로 다가온다. 서열이 없어야 하는 민주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서열이 매겨지고 그 서열 질서가 매우 강하게 작동하니 말이다. 그리고 서열을 표시하는 계급장으로 호칭이 나름의 몫을 한다.
흔히 ‘갑질 사회’라고 말하는 새로운 신분사회에서 우리는 호칭이 나이와 지체에 걸맞은 대우와 연결되어 있다는 직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호칭 문제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는다. 누구에게나 같은 존칭을 붙이는 것이 알맞지 않다든가, 반대로 차이를 두어 부르는 게 그리 공정하지 않다는 관념이 우리 머릿속에 어지럽게 깔려 있다. 보이지 않는 서열을 무시하고는 생존할 수 없고, 그 서열은 호칭과 높임법으로 더 단단해지니, 이런 문화 속에서는 위에서 밑으로 내리꽂는 일방통행을 거역할 수 없다. 다양성과 창의성, 반론과 토론,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역지사지는 환영받지 못한다. 압제에서 벗어나려면 오로지 높은 자리에 올라가 권력으로 아랫것들을 밟고 군림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권력에 걸맞은 호칭과 존댓말을 들어야만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자존감을 확인할 수 있다. 진상 고객을 응대하느라 진이 빠질 대로 빠진 감정 노동자가 식당 아줌마한테 이것저것 지적하면서 분풀이하는 ‘서글픈 갑질’까지 일어난다. 이것이 갑질 사회의 병리구조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호칭이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서열 문화는 우리 현실에서 너무나도 강력하기 때문에 서열구조를 깨거나 강도를 약화시키는 일이 사회구조와 정신문화의 전반적인 개혁 없이 말과 호칭의 변화만으로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호칭 민주화는 서열 문화를 바꿔가는 출발점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호칭은 인정의 문제이므로, 호칭을 개혁함으로써 새로운 인정의 문화, 즉 ‘서열 인정’이 아닌 ‘인격 인정’의 문화를 시작할 수 있다. 사회적 인정의 형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와 함께 그 형식에 대한 합의가 일어나고 사회적으로 실행된다면, 점차 사회 전반의 말이 바뀌고 생활문화가 바뀔 것이다. 서로 존중하는 호칭으로 부르면서 아무렇게나 낮춤말이나 욕설을 내뱉을 수 없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의 호칭 민주화에서 관건은 ‘나이’와 ‘지위’와 ‘남녀’의 차이에 따른 호칭의 서열을 어떻게 녹여버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세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차이를 인격의 차이로 확대시켜 차별을 정당화하는 전통적인 서열 기준이다. 그런데 최근에 서열의 3대 기준이 흐트러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갑을 권력관계라고 여기던 질서가 뒤집히는 일이 이제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 나이 많은 남자 윗사람과 나이 어린 여자 아랫사람이 과거의 전형적인 갑을 권력관계였다면, 나이 어린 여자 윗사람과 나이 많은 남자 아랫사람, 나이 어린 남자 윗사람과 나이 많은 여자 아랫사람, 나이 어린 여자와 나이 많은 남자 동료 따위의 새로운 관계들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되었다. 호칭의 민주화는 이들의 대화와 관계의 민주화를 촉진할 것이다.
다만, 남녀차별 문제는 개선 정도와 무관하게 논의가 비교적 널리 일어나는 데 비해 나이와 지위의 높낮이에 따른 차별 문제는 별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호칭 문제에서도 남녀차별 문제는 공감대를 넓히기 쉬운 반면에 나이와 지위의 차이를 뛰어넘는 데에는 더 많은 문화적 각성이 필요하다. 성차별 해소는 근대에 들어 전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과제가 되었지만 나이나 지위에 따른 서열은 자연스러운 사회질서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살펴보아야 호칭 민주화의 바탕을 다질 수 있다. 나이부터 짚어보자.
‘나이가 깡패’인 나라
몇 년 전에 하와이에 사는 고등학교 동기와 통화할 기회가 있어 오랜만에 서로 목소리를 확인했다. 비록 고교 시절에 대단한 ‘절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몹시 반가워하며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함께 기억할 만한 큰 사건 위주로 대화가 흐르던 중 갑자기 다른 동기 이야기를 하면서 옆집에 살던 그 친구가 자기를 형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넌지시 흘렸다. 자신이 몸이 아파 2학년 때 휴학하는 바람에 1년 후배들과 함께 다시 2학년을 다녔고, 그래서 동기들이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았다는 말로 꼬리를 흐리면서. 존댓말이니 반말이니 구별이 거의 없는 미국에서 꽤 오래 생활했음에도 어린 시절의 그 기억이 몹시 억울했나 보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깡패’라고들 한다. 깡패만큼 폭력적이고 그만큼 비합리적이며 위협적임을 누구나 인정한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동갑이면 ‘야’, ‘너’에 이름을 부르며 반말을 하고, 한 살이라도 나이가 많으면 ‘형’, ‘언니’에 존댓말이다. 자신도 그렇게 대우받지 않으면 모욕당한 것마냥 매우 불쾌하게 느끼고, 상대를 버릇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사정이 어떻든, 상대보다 한 살이라도 나이를 더 먹었는데 반말을 듣는 건 대단히 기분 나쁜 일이라고들 생각한다.
나이가 깡패이다 보니 쥐꼬리만 한 권력일망정 자기 멋대로 휘두르려고 나이를 속이는 일까지 일어난다. 범죄자들을 가둔 감옥에서도, 사교 모임에서도, 심지어 직장에서까지 자기 나이를 실제보다 높이는, 이른바 ‘고무줄 나이’를 만날 수 있다. 그만큼 나이로 서열을 매기는 원리가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뜻이다. 그럼 왜 나이는 깡패 노릇을 하게 되었을까?
먼저, 나이는 다른 무엇으로도 왜곡되지 않는 공평한 서열 기준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부모의 재력이나 집안 배경, 유전자와 재능 따위는 이렇게 저렇게 불공평하게 타고난다. 자라면서 학군과 학교 선택에서도 공평한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다. 이 불공평은 출발선이 다르다는 사정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는 공평하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남보다 빨리 두 살씩 먹을 수도 없고, 돈을 쓴다고 해서 나이를 안 먹을 수도 없다. 그래서 나이는 사회적 조건이 결부되지 않은 자연상태에서 가장 공평한 서열 기준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이에 따른 호칭과 높임법은 공평한 서열 기준에 걸맞은 권리와 의무일 뿐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서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나이가 같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도 거의 같으므로 나이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매우 강력하고 보편적이며 유일한 서열 기준으로 작동한다. 중고교 선배는 영원한 선배다. 선배가 후배를 구타한다든지 하는 학교 폭력의 그늘에는 영락없이 나이 서열이 깔려 있다. 후배가 건방지게 ‘꼬나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폭행의 명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입씨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민증 까라’는 말이 나오는 걸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신분과 지위, 재산, 학벌, 학력 따위 사회적으로 서열을 매기는 기준을 다 제치고 나면 남는 건 결국 신체적 나이뿐인데, 누가 더 위인지 투명하게 나이로 판가름하자는 뜻이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나이가 공평한 서열 잣대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어릴 때부터 10대 청소년기를 거치며 언어를 매개로 내면화한다. 나이에 따른 서열 질서는 ‘선배형, 언니-후배야, 너’의 호칭 질서로, ‘존댓말-반말’의 말 높이 질서로 굳어버리고, 호칭과 말 높이 문화는 다시 나이에 따른 서열 질서를 정당화하며 강화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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