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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년의 느린 변화와 산업 혁명 이후의 극적인 변화
우리 유전자는 아주 느리게 변화해 왔다
열대 기후가 아닌 곳에서 옅은 피부색이 더 많은 것, 그리고 적도에서 멀어질수록 피부색이 옅어지는 것은 ‘유전적 싹쓸이genetic sweep’의 고전적인 예다. 이 말은 어떤 형질이 가진 유익한 점이 너무나 명백해 인구 집단의 모든 사람에게서 그 형질이 발견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피부 색소는 유전적 싹쓸이 중 가장 눈으로 확인하기 쉬운 예지만, 우리는 그것을 독특한 경우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증명하는 예로 받아들여야 한다. 피부색에 관한 돌연변이가 자외선에 대한 노출과 거의 완벽하게 비례하도록 조절되는 일이 4만 명 이내에 일어났다면 그 전 또는 심지어 그 이후에 인류 전체를 휩쓴 다른 돌연변이들은 어땠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의 DNA는 인류 생존에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해 온 돌연변이 유전자들로 가득하다. 그중 많은 수는 위도에 따라 또는 태양에 대한 노출 정도에 따라 피부색을 조절하는 돌연변이보다 훨씬 오래된 것들이다.
그런 유익한 돌연변이라도 피부색 유전자만큼 큰 혜택을 주지 못하는 유전자들은 그보다 더 느린 속도로 확산된다. 그 결과 호모 에렉투스 이후 9만 세대,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출현한 후 1만 세대, 약 1만 2000년 전 농경이 시작된 후 600세대, 카자흐스탄에서 5600년 전 사람의 교통 수단으로 말을 최초로 길들인 후 280세대, 1801년 최초의 증기 기관차가 출현해 현대의 기계적 운송 수단이 도입된 후 10여 세대를 거쳐 오는 동안 우리의 유전적 구성은 대체로 상당히 느리게 변화해 왔다.
속도가 느리다는 것 말고도 자연 선택을 크게 제한하는 또 한 가지 요소는 당장 유익한 것만 선택된다는 사실이다. 몇 년 후, 몇 세대 후 어떤 형질이 유리할지 미래를 낸다보고 판단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 세대 또는 단 몇 세대 사이에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한다면 이전의 자연 선택에서 ‘그 당시 쟁취한’ 유익함은 새로 닥치는 도전에 대처하는 데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20만 년 동안 호모 사피엔스가 전반적으로 융성했던 것은 무작위로 벌어지는 유전적 변화와 당장 유익한 것을 고착시키는 자연선택의 조합이, 그와 비슷한 속도로 느리게 일어나는 환경 변화와 부합했기 때문이다. 물론 간혹 아주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빙하기에 추운 날씨가 시작되면서 인류는 따뜻한 지역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그리고 때때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전쟁, 기아 또는 전염병이 발생해 거기에 더 잘 적응해 내거나 그것을 피해 이주할 수 있었던 소수의 무리만 살아남아 자신들의 유리한 적응 내용을 후세대에 물려줄 수 있었다.
지난 200년 사이에 급변한 세상
그러나 산업 혁명이 시작되어 세상을 극적으로 바꾸기 시작한 19세기 초 이후의 급격한 변화와 그 이전 수천 년에 걸친 느린 변화를 한번 비교해 보자. 새로운 기계, 전기, 가솔린 엔진 운송 수단, 현대식 가전제품 그리고 컴퓨터는 10세대도 안 되는 기간에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비록 가뭄과 기아가 지구 곳곳에서 여전히 발생하고 있지만, 우리는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벨리 같은 사막을 정원처럼 아름다운 지역으로 변화시켰다. 식량 공급이 점점 늘어나 1800년에 10억 명이던 전 세계 인구가 1950년 25억 명, 2000년 60억 명, 2011년에는 70억 명이 되었다. 영양과 위생 상태가 좋아지면서 역사상 내내 50퍼센트말리의 일부 외딴 곳에서는 2000년까지 이 비율이 지속되었다 근처를 맴돌던 높은 아동 사망률이 1990년에는 세계평균 9퍼센트로 떨어졌고, 2013년에는 5퍼센트 미만이 되었다. 가난하고 에이즈가 만연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아동 사망률은 이전 세계 평균의 4분의 1로 떨어졌다. 이처럼 낮아진 아동 사망률은 평균 수명을 높이는 가장 큰 요인이 되어, 19세기 말까지 30세를 넘지 못하던 세계평균 수명이 이제는 71세가 넘고, 80세 이상을 자랑하는 나라도 약 30개국에 달한다. 이런 추세라면 2024년 세계인구는 80억 명을 넘을 전망이다.
이제는 모든 연령층이 식량과 식수를 더 쉽게 구할 수 있고, 맹수로부터 사망과 부상의 위협을 덜 받게 되었으며, 위생 시설과 항생제와 백신을 비롯한 현대 의학의 혜택을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점점 더 노령화되어 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전세계의 중위 연령median age, 총인구를 연령순으로 나열할 때 정중앙에 있는 사람의 연령은 1950년 24세에서 2010년 30세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유럽의 중위 연령은 30세에서 40세로 늘었다.
사실 인류의 환경이 향상된 것은 우리가 모든 시간을 식량의 사냥과 채집 또는 농장과 가축을 돌보는 데 바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존을 위한 활동에 바치던 시간을 이제 과학, 기술, 예술을 비롯한 현대 문명을 규정하는 다른 발전적인 활동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의 생물 종으로서 인류는 서서히 평균 연령이 높아지고, 실내에서 생활하고, 차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며, 가끔 운동을 하거나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비활동적인 존재로 변화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가 지난 200년 사이에 벌어졌다. 호모 사피엔스의 20만 년 역사와 호모 속의 200만 년 역사에 비하면 눈 깜짝할 사이의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유전자가 현대 사회를 못 따라가고 있다
이제 현대 사회의 난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뇌를 사용해 환경에 대단한 변화를, 그것도 이전에는 예측조차 할 수 없었던 속도와 방향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반면에 세대가 흘러도 이전 세대의 DNA를 ‘복사기로 복사하듯’ 완벽하게 반복하도록 만들어진 우리 신체는 계속해서 느린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우리의 유전자가 현대의 변화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계산은 간단하다. 1000명 중 1명이 가지고 있는 유전적 돌연변이가 10세대약 200년, 즉 산업 혁명이 시작된 뒤부터 지금까지 기간 만에 지구 전체에 퍼지려면 생존에 엄청나게 유익한 돌연변이여야 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유전자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지닌 사람이 자손을 가질 확률이 30배 이상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미국인의 98퍼센트 이상이 이미 자녀를 낳을 연령까지 살고, 그 자녀도 자신의 자녀를 가질 때까지 살기 때문에 어떤 상대적 우위를 가진 유전적 돌연변이도 현대에는 그렇게 신속하고 널리 퍼질 수가 없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우리 모두가 전례 없는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상황뿐이다. 예를 들어 인류 전체가 HIV에 감염되었는데 치료할 방법이 전혀 없는 그런 시나리오 같은 것 말이다.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생존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적응이라는 전투에서는 지고 있다
식량 부족을 견디고, 가뭄을 이겨 내고, 위험한 상황을 인식해 피하고, 상처를 입었을 때 피가 응고되는 형질은 우리 조상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일으켜 온 급속한 환경 변화와 우리 유전자가 변화해 가는 느린 속도 사이의 불균형은, 산업화 이전 오랜 세월 동안 생존을 보장했던 유전 형질에 우리가 오히려 발목을 잡혀 버린 이유를 설명해 준다.
우리 유전자는 현대 사회의 급속한 변화 속도와 발맞춰 돌연변이를 할 수 없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사망 원인이 되어 버린 병들이 우리가 자손을 퍼뜨린 다음에 우리 몸을 공격하고 그 아이들도 다시 똑같은 일을 겪게 되는 한, 자연 선택 과정은 그런 환경 변화에 유리한 유전자를 선택할 기회를 갖기 못한다. 그 결과 인류라는 생물 종을 그토록 효과적으로 잘 보호했던 생존 형질들은 이제 많은 경우 과잉 보호적이고 때로는 명백히 해롭기까지 한 요인이 되고 말았다. 현대 사회에서는 음식과 소금과 물이 너무 흔하고, 폭력 사태는 과거 어느 때보다 줄고, 피를 너무 흘려 죽는 일 또한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경구를 뒤집어 말하자면, 우리는 인류 생존이라는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적응이라는 전투에서는 지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일련의 만성 질환을 앓게 된다. 어떤 병은 단순히 너무 오래 살아서 생기고, 어떤 병은 한때 우리 조상들의 생존에 중요했던 형질들의 부작용으로 생긴다. 이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일상에 미치는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식량과 굶주림에 관해 살펴보고, 이어서 소금과 물, 기억과 두려움, 출혈과 혈액 응고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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