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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애국가〉의 탄생
1936년 1월 16일자 《신한민보》에는 ‘안 씨의 신작 애국가’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짧은 기사가 실렸다. 《신한민보》는 미주 한인 독립운동 단체였던 〈대한인 국민회〉의 기관지였다. 지난 1935년 “12월 28일 지성 한인 예배당에서 안익태 씨가 수 삼년 간 심혈을 경주하여 창작한 애국가의 새 곡조를 친히 연주”했다고 한다. 안익태 〈애국가〉는 이렇게 1935년 12월 28일 초연된 셈이다.
이어 《신한민보》 1936년 3월 26일자에는 〈대한국 애국가〉라는 안익태 본인의 기명 칼럼 기사가 꽤 비중 있는 분량으로 게재되어 있다. 안익태 〈애국가〉의 자작의 변인 셈이라 길게 인용해 보겠다.
대한국 애국가
누구시나 정든 고국산천을 리별하고 저 망망한 태평양 대해를 건널 적에는 큰 포부와 많은 희망으로써 미구에 전개될 자유의 나라 희망의 나라를 상상하면서 이 미주대륙에 발을 부칠 것입니다. 동시에 많은 감상과 인상 중에 자기가 하고자 하는 장차 위대한 사업과 광영의 성공을 믿고 더욱 활기를 얻어 자중하면서 성실히 전진할 이외다.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약 5년 전에 미주 상황에 도착하여 많은 감상과 인상을 가졌는데 특별히 제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상항 한인 예배당 강당 위에 걸린 대한국의 태극기와 제일성에 처음 부른 대한국 애국가였습니다. 상항에 도착한 날 밤 동포 여러분께서 제 음악 연주를 듣기 위해 약 20여 명 동포가 한인 예배당에 모였습니다.
음악 연주 전 여러분과 같이 애국가를 부르고 황 목사의 소개로 강당 위에 올라 약 반 시간 동안 연주를 하였는데 대한국 태극기 아래와 20여 명 동포 앞에서 연주한 실로 사천여 년 이상의 장구한 역사 아래 ○○동시 사방으로 헤매이는 불쌍한 우리 이천 만 동포 앞에서 연주하는 감이였는데 눈물은 제 앞을 가리워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감상이었습니다.
(…)
대한국 애국가 근작
미주 온 후에 목적한 바 몇 가지 하고자 하는 일이 있었는데 제일 급선무로 대한국 애국가 근작을 급히 ○○고 작곡하기로 그때 결심하였습니다. 저대로 부르는 애국가 음악 곡조는 처음 스캇취의 술 노래였는데 그 후 구주 여러 나라에서 별별히 불렀는데 어떤 나라에서는 사랑가로도 부르고 어떤 나라에서는 이별가로도 부르는데 참으로 신성한 대한국 애국가로서 그 곡조를 사용함은 대한국의 수치인 줄로 자각하였습니다.
이래 항상 애국가 근작에 고심하였습니다만은 그리 속히 성공치 못하였습니다. 실로 사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아시아주 한반도의 도덕국인 대한국 애국가이니 만큼 그리고 경솔히 작곡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과거 오년 간 구심근작하여 약 이년 전에 처음 절은 필하였습니다만은 후렴은 필하지 못하고 지나는 중 지난 11월 하루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실로 하나님의 암시로 후렴 전부를 근작하였습니다.
그 후에 유명한 음악가 몇 분에게 신작한 애국가를 보였는데 음악적 표현과 애국심 표현이 충실히 되었다는 세계적 음악가의 평과 또 동포 여러분의 충고로 더욱 자신을 얻어 대한국 애국가로 발표하기로 하였습니다.
음악의 위대한 힘이 실로 민족 운동과 혁명 사업에 대단한 활기와 도움을 주는 것은 과거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라서 진실로 바라건대 이 신작 애국가도 우리 민족 운동과 애국정신을 돕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되기를 성실히 바라는 바입니다.
대한국 애국가 해석
대한국 애국가를 부르실 때는 특히 애국가 말의 의미를 깊히 생각하면서 애국적 정신으로 활기 있게 장엄하게 부르시되 결코 속히 부르지 마십시오.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부르실 때에 장엄히 애국적 정신으로 엄숙히 부르시되 특히 동해의 ‘해’와 백두산의 ‘백’에 힘을 주고 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에 더욱 힘 있게 충만한 애국심과 활기 있게 부르십시오.
후렴의 ‘무궁화 삼천리’는 힘 있게 부르되 크게 부르지 마시고 엄숙히 의미심장하게 부르며 ‘화려강산’부터는 화려한 ○신과 깊은 애국심으로 부르고 이어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는 처음 절 ‘하나님’과 같이 활기 있게 장엄히 부르십시오. 제2절은 제1절과 같은 의미로 노래합니다.
끝으로 금번 애국가 발행에 뉴욕의 안정수 씨 허진업 씨, 시카고의 한장호 씨, 상항의 최진하 씨 기타 여러분 동포의 찬조와 많은 충고를 감사히 치하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본인의 작곡 노트를 놓고 보자면 안익태의 애국가는 1934년경 후렴을 제외한 상태였다가 1935년 11월 어느 날 아침 마침내 ‘하나님의 암시’를 받아 후렴까지 완성해 그 해 12월 말경 초연된 셈이다. 알려진 것처럼 이 새 애국가의 멜로디가 1938년 2월 더블린에서 초연된 〈코리아 판타지〉의 4악장의 주제로 사용된다. 허영한은 〈코리아 판타지〉는 1938년 3월 경 미국에서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1941년 1월 16일자 《신한민보》는 “임시 정부령은 애국가 곡조를 인준-국민회 창립 기념일부터 실시를 관하 각 지방에 통지”라는 기사를 싣고 있다. 기사 내용을 보자.
대한민국 22년도 제3회 중앙 집행 위원회 결의안 제25호는 애국가[동해물] 곡조 [올드 랭 슨]을 폐지하고 안익태 씨의 작곡을 사용할 것을 결정하고 동년 11월 26일 임시정부에 품청서를 올려 실시를 청원하였는데 임시정부는 동년 12월 25일 이를 전보로 인준하였음으로 중앙 상무부는 제5차 대표 대회에 ○○인준을 보고하고 애국가 곡조 안익태 씨 작곡 사용을 2월 1일 국민회 창립 기념일부터 실시할 것을 관하 각 지방회에 통지하였다.
그런데 막상 당시의 임정 공보 제69호를 보면 약간 다른 뉘앙스가 읽힌다. 《신한민보》 기사는 구 곡조 곧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을 ‘폐지’하고 신 곡조, 곧 안익태의 곡을 사용하기로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실제 이후 대한인 국민회 지부 행사의 식순에는 안익태 곡이 광범위하게 들어가 있다. 하지만 임정의 결정 내용은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신 곡조”의 “사용을 허가”한다는 내용이다. 곧 애국가의 복수성을 전제한 뒤 새 곡조를 불러도 좋다는 말에 가깝다. 더군다나 이 ‘허가’는 일반적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이 곡을 ‘국가國歌’로 인정하는지 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래서 《신한민보》 보도처럼 구 곡조를 ‘폐지’한다는 의미로 읽히기엔 다분히 부족하다. 구 곡조의 폐지와 신 곡조의 사용 허가 사이의 미묘한 간극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살피건대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에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하던 미주 독립운동 단체 대한인 국민회로선 자신들이 출판 보급하는 신 곡조가 이를 위한 하나의 모멘텀이 되기를 갈망하는 주관적 기대가 자못 과도하게 투사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임시정부는 전후 귀국해서도 여전히 〈올드 랭 사인〉에 맞춰 〈애국가〉를 부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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