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949년 7월 23일 서울시경찰국 수사관들이 서울지방검찰청에 들이닥쳤다. 김영재 차장검사를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덕수궁 옆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건물을 대법원, 서울지방법원, 서울지방검찰청 등이 나눠쓰던 시절이라 충격적인 소식은 법조계 전체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대구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김영재는 1937년 고등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일제시대 경성과 평양에서 검사로 일한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다. 고등시험 행정과에도 합격한데다가 경북 안동의 손꼽히는 양반가 출신이기도 해서 해방후 정치·사법·행정·교육 어느 분야에 진출해도 신생국가의 지도자로 미래가 보장된 인물이었다.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수재스타일이라 큰 사고를 칠 성품도 아니었다. 그런 김영재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프락치’라니, 오랜 세월 그와 함께 일해온 동료들은 혼란에 빠졌다.
해방 4주년, 정부수립 1주년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제주 4·3사건, 여순반란사건에 이은 국가보안법의 시행으로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기세는 현저히 약화되었다. 국민보도연맹의 깃발 아래 좌익활동 전력자들의 전향도 줄을 이었다. 1949년 5월 ‘국회프락치’ 사건 수사가 시작된 후 지난 두달 반 동안은 거의 매일처럼 온 나라를 뒤흔드는 대형사건이 터졌다. 5월 4일과 5일에 최전방 대대장인 표무원 소령과 강태무 소령이 각각 자기 부대원을 이끌고 월북했다. 2명 모두 이른바 숙군肅軍대상자들이었다. 강태무 대대장이 월북하던 바로 그날 옹진에서는 ‘육탄 10용사’가 장렬하게 산화했다. 혹은 그렇게 알려졌다. 삼팔선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남북 간 무력충돌의 부산물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6월 6일에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경찰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6월 16일에는 국부에 암호문을 숨기고 월북하려던 남로당 여성공작원이 개성에서 체포되었다. 경찰과 검찰의 발표에 따르면 암호문에는 국회 내 프락치들의 암약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가 잔뜩 담겨 있었다. 이로써 경찰과 검찰은 ‘국회프락치’ 사건의 승기를 잡았다. 6월 26일 김구가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밀려드는 대형사건의 한복판에서 서울지방검찰청의 2인자이자 실무책임자가 남로당 프락치로 잡혀 들어갔다. 이렇게 1차 ‘법조프락치’ 사건의 막이 올랐다. 1949년 6월의 미군철수 완료를 전후해 남한의 극우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진행한 이른바 6월 공세의 일환이었다.
1차 ‘법조프락치’ 사건은 한국전쟁 이전의 어떤 좌익 관련 사건보다도 남아 있는 기록이 적다. 그나마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은 오제도 검사가 남긴 책, 『사상검사의 수기』와 『추격자의 증언』이다. 이제는 잊힌 인물이지만 ‘특별수사본부’의 주인공 오제도 검사는 1970년대 책깨나 읽는 어린이들에게 어벤저스 수준의 히어로였다. 86세대가 대학시절 어두운 하숙방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으며 새로운 세계관에 눈 뜨는 과정은 반공영웅 오제도로 상징되는 한국전쟁 세대를 극복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일제시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서기로 일했던 오제도는 해방후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을 거쳐 검사로 임용되었다. 이 짤막한 이력의 숨은 의미는 본문에서 상세히 검토한다.
오제도가 남긴 글을 인용할 때는 적지 않은 부담이 따른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사상검사’ 또는 ‘추격자’의 일방적인 입장에서 썼고, 과장과 자기미화가 심한데다가, 당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던 고문과 조작에 대해서 완전히 함구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스파이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었던 오제도의 강박과 집착은 이 책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분법적으로 선악을 나누고 자신을 정의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하는 오제도 식의 기독교세계관도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1969년 출간된 『추격자의 증언』의 추천자는 김형욱이다.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나중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실종되는 그 사람이다. 책의 판권지에는 아예 ‘중앙정보부 검열필’이 인쇄되어 있다. 중앙정보부가 주도해서 만든 이런 책들을 1970년대 여러 반공드라마·라디오극·실록소설의 원형이 되었다. 그래도 이 책은 최소한 ‘추격자’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사건을 ‘만들었는지’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조심스럽게 참고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오제도 검사가 기록한 1차 ‘법조프락치’ 사건의 시작은 이렇다.
“적탄에 쓰러져 지금은 고인이 된 서울시경찰국 김호익 총경으로부터 1949년 7월 11일 밤 전화가 걸려왔다. 검찰프락치 사건이 적발되었는데 보고차 가도 좋은가 하는 내용이었다. 곧 오라고 하여 사건전말을 청취해보니 문제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변호사 윤학기로부터 차장 검사 김영재가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라 한다.
오제도에게 전화를 건 김호익은 ‘국회프락치’를 비롯한 여러 공안사건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유명한 경찰관이다. 반민특위 와해를 주도한 서울시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의 손발이기도 했다. 보고를 받은 오제도는 윤학기를 외딴 별실로 불러 상세한 상황을 물어보았다. 윤학기는 “차장검사 김영재가 남로당 세포회의에 수차 출석했고 변호사 오관, 백석황, 강중인도 함께했다”라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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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현대사에 정통한 독자들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나온 이름의 태반은 금시초문일 것이다. 이들은 해방을 전후한 시절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인재들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철저하게 망각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법조계만큼 종사자들의 자서전이 많은 직역도 드물다. 그러나 해방공간에 관한 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좌익과 중도에 속한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으니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도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좌익경력을 가지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자기 과거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 좌우익 모두에게 친일은 숨기고 싶은 약점이었다. 그만큼 감출 것이 많은 세대였다. 그래서일까. 이들이 누린 영광과 좌절에 비해 각자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매우 적다. 사라진 사람, 잊힌 이야기를 생략하다보니 해방직후 초창기의 공식적인 법조계 역사는 마치 이 빠진 퍼즐 같다. 남겨진 기록들도 대부분 별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만큼 모두에게 껄끄러운 주제였다.
이 책은 바로 그 껄끄러운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방후 우리나라 법조 직역의 형성과정을 복원하려는 시도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매우 간단하다. 김영재·강중인·조평재·윤학기·백석황·이홍규·이정남 같은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 이들은 누구였고, 일제시대 무엇을 했으며, 해방공간에서 어떤 꿈을 꾸었고, 그 꿈은 왜 좌절되었나? 초창기 혼란 속에서 만들어진 법조계의 기본틀은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나?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우선 1부는 1937년 합격자들을 중심으로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 제도를 탐구했다. 바로 제1법률가군 이야기다. 안동지역 유수의 독립운동가 가문 출신으로 일제시대 검사로 일한 김영재의 이야기는 독립운동가 가문과 친일 가문이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당시 현실을 잘 보여준다. 다들 빈곤한 시절이었으므로 합격자라면 누구라도 자신을 역경의 승리자로 포장하고 싶었겠지만, 객관적인 자료들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고등시험 합격자 중에는 유난히 면장집 아들이 많다. 당시 기준으로는 사회경제적으로 최상층부에 속했다. 부잣집 출신일수록 상급학교에 진학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시대다. 재력은 거의 그대로 학력에 반영되었다. 개천에서 난 용은 허상일 뿐 실체가 아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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